드라마 촬영장은 화보 촬영과는 또 달랐다. 동수는 드라마 섭외 1순위였다. 그가 나오는 드라마는 인기가 높았고 드라마가 성공하면 스캔들은 늘 따라다녔다. 생각해보니, 잦은 스캔들에 비해 실제로 확인된 일은 없었다. 며칠 있다가 흐지부지 사라지거나 상대의 다른 스캔들로 덮이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회사에서 잘 막아서인지도 모른다. 에라이, 지금 그 녀석 스캔들 따위가 뭐가 중요해. 나는 그의 스캔들보다 스케줄이 더 신경이 쓰였다. 스케줄이 많다는 건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만큼 내가 할 일이 많아진다는 뜻이니까. 편하게 앉아서 일하다가 동분서주 이게 뭐람. 최 부장은 미안했는지 섭외 관련된 문제는 자기가 알아서 한다며 나에게 그런 부담까지 주진 않았다. 굳이 회사에서 나서지 않아도 일이 넘치긴 했지만 말이다. 내 인생 최고의 기로에 서 있는, 서른의 중반을 혼자 넘냐 같이 넘냐 중차대한 이 시점에 이리 인생이 꼬이다니. 작년에 본 타로점도 다 뻥인가보다. 서른 중반부터 활짝 핀다더니 개뿔. '서 지은! 흥분하지 말자! 다 이유가 있겠지. 한 배우가 바빠서 일이 많으면 너도 인센티브 많이 받는거잖아. 돈 보고라도 일하는거야. 대출금 갚아야지? 안그래?' 다시 마음을 고쳐 먹었다. 매니저가 되기로 한 이상 맡은 일은 제대로 하자! 열심히 연기에 대한 모니터도 하고 일주일분 스케쥴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한참 그의 연기를 동영상에 담고 있었다. 핸드폰 화면에 비치는 동수는 한 시윤이다. 떡 벌어진 어깨에 180이 넘는 훤칠한 젊은 사장 역할이었다. 슈트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지금 한 시윤이 멋지다고 생각한 거야? 정신 차려! 서 지은!’ 그와 동시에 어좁이 동수가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 서운해지려고도 했다. 촬영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상대편 여주인공도 유명한 사람이다. 실제로 보니 너무 예뻐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저런 얼굴로 살면 어떤 기분일까?’ 촬영이 잠시 쉬는 틈을 타 그들을 배경으로 셀카 한 장을 찍었다. ‘앞에서 찍어서 그래. 내 탓이 아니야.’ 사진을 삭제하며 엄마가 새삼 원망스러웠다. ‘좀 예쁘게 낳아주지. 아니면 얼굴이라도 조막만 하게. 이게 뭐야.’ 평범한 내가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졌다. 오리가 백조랑 섞여 있으면 이런 기분일 거란 생각도 들었다. ‘바보냐? 오리가 무슨 죄야.’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평범한 직장인. 한 시윤의 매니저이다. 드라마 촬영을 마치고 팬 사인회까지 마쳤다. 이렇게 바쁜 게 맞는 건가 싶었다. 이날은 스태프 회식이 있었다. 최정예 부대로 이루어진 회식이다. 집에 가서 자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었지만 빠질 수가 없었다. 최 부장도 오랜만에 만났다. 사무실에서 마주칠 때는 몰랐는데 밖에서 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서 대리! 어때? 힘들지?”
“죽을 거 같아요. 부장님. 빨리 다른 매니저 뽑아 주세요.”
“알았어. 좀만 버텨. 잘하고 있던데 뭘. 시윤이가 아주 만족해해.”
“그건 다행이네요. 한 배우 잘하더라고요. 연기 실력이 상상 이상이던데요.”
“그러니까, 서 대리가 중요해. 다른 데서 빼가려고 접근했었나 봐. 잘 좀 지켜 줘.”
“아, 네.”
여기저기서 술잔을 맞대며, 각자의 고충을 털어놓느라 다들 바빴다. 그러던 중, 의상팀 몇몇이 하는 얘기가 귀에 쏙 들려왔다.
“김다혜랑 사귀는 거 진짜야?”
“스캔들이 한 두 번이었어야지. 그런데 이번엔 스캔들도 안 나는 거 봐. 오히려 더 조심하는 느낌이지 않아? 촬영장 스태프들도 이전과 다른 묘한 기류래. 진짜 사귀는 거 아니냐고. 이번엔 진짜 같아.”
김다혜. 한 배우의 상대 배우다. 핸드폰 화면으로 이미 확인했다. 둘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잘난 놈, 잘난 년 다 해 먹어라 젠장.’ 내 결혼 프로젝트가 그 녀석 때문에 날아갔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잘난 사람들에 치여 비교당하고 살고 싶지 않았다. 비주류에서 중상층. 그거면 족했다. 그런데, 주류인 김다혜가 부러웠졌다. 그녀의 미모와 그녀의 몸매와 그녀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더 이상 술 마실 기분이 나지 않아서 피곤하다는 핑계로 회식 장소를 빠져나왔다. 내일은 오후 스케줄이다. 조금 늦게 일어나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했다. 집으로 곧장 가려니 커다란 식탁.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어둠과 적막이 나를 반겨줄 것 같지가 않았다. 오랜만에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이 지수. 너 어디야.”
“나? 집. 너 술 마셨냐?”
“마셨다. 어쩔래?”
“야. 집에 들어가. 더 취하기 전에.”
“많이 안 마셨어. 너하고 2차 하려고.”
“오~~ 안그래도 딱 한 잔 생각나던 참인데. 맥주 마실 거지? 내가 지금 사 올게. 집으로 와.”
나는 지수네 집으로 가는 동안 중학교 때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이상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지수는 혹시 다른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을까? 동수가 가고 아팠다는데 이십 년 동안 왜 나는 그 아이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던 걸까? 해답이 없는 말풍선은 지수네 앞에 도착해서야 사라졌다. 익숙하게 비번을 누르고 집으로 들어갔다. 자주 함께 마시고 자고 그랬는데 최근엔 바빠서 그러질 못했다.
“내 잠옷 내놔.”
“그럴 줄 알고 내가 꺼내 놨어.”
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지수네 거실에 벌러덩 누웠다.
“2차 시작도 하기 전에 뻗는 게 어딨어. 나 좀 전에 내일 휴가 냈단 말이야.”
“공무원 좋네. 휴가도 쉽게 내고. 나는 병가는커녕, 24시간 대기인데.”
“그래도 한 시윤 보고 좋겠다. 진짜 멋지지 않아? 어깨 넓은 거 진짜야? 드라마 요즘 정주행하잖아. 완전 멋있어.”
나는 벌떡 일어났다.
“너 언제부터 한 시윤 팬이었어?”
“오래됐지. 네가 하도 한 시윤 욕을 해서 티는 못 냈지만 말이야. 나랑 살 것도 아닌데 스캔들 나든 말든 뭔 상관이야. 안 그래?”
맘 같아선 그 녀석 욕을 한가득 해주고 싶은데 옆에서 본 한 시윤은 흠잡을 데가 별로 없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예의가 발랐다. 하지만, 남자들 특히나 또래 젊은 남자들에게만은 예외였다. 소문으로 들어서 대충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 날카로웠다. 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뭔가 불안불안한 느낌이랄까. 여자만 좋아하고 남자는 너무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내는 거 같아서 처음엔 반감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계속 보니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불안한 눈빛. 강아지가 꼬리를 돌돌 말고 바짝 긴장하는 모습. 과하다 싶은 자기방어 기제? 그래서 남자 매니저들이 다 못 견디고 간 건가 싶었다.
그나저나, 지수에게 한 시윤이 동수라고 말해주려고 했는데,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 저렇게 좋다는데 동수라고 하면 얼마나 김이 샐까.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서 그동안 밀린 얘기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나와 지수는 아점을 대충 먹고 지수는 필라테스로 나는 집으로 향했다. 옷만 갈아입고 나가면 된다.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현관문에 낯선 종이봉투 하나가 걸려 있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봉투를 열어보았다. 안엔 조그만 상자가 이쁘게 포장되어 들어 있었고 카드도 한 장 눈에 들어왔다.
‘너 생일 다가오지? 내 매니저 해줘서 고마워. 안 비싼 거니까 부담 가질 거 없어. ’ <똥물>
상자 안엔 앙증맞은 귀걸이 한 쌍이 들어 있었다. 남자에게 이런 선물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한 시윤이라니. 김다혜도 있으면서. 차라리 문상이 낫겠다 싶었다. 보란 듯이 이 귀걸이를 하고 다니려니 부끄러웠다. 괜한 오해를 살 게 뻔했다. 자기가 준 거라고 자주 하고 다니네. 얼마나 나를 놀려댈까? 생각만 해도 닭살이 돋는다. 일단, 모른 척 상자를 덮어 고이 식탁 위에 올려두고 옷을 갈아입었다. ‘김다혜에게나 줄 것이지. 아, 그녀에게 주기엔 너무 초라한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