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수는 여지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몇 번을 말해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연예인 비위 맞추는 것도 매니저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의 기분 때문에 하루를 망치면 여러 사람이 힘들어진다. 조용히 촬영장으로 향하는데 동수의 따가운 눈빛이 느껴졌다.
“왜? 뭐 묻었어?”
“아니, 내 선물 못 받았어?”
“무슨 선물? 아, 혹시 종이봉투? 그거 너야?”
“어. 안 열어봤어?”
“아직, 아침에 옷 갈아입고 나오느라 바빴어.”
“외박했냐?”
“내가 외박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시죠? 한 배우님?”
동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받았다고 할 걸 그랬나. 기분이라도 바꿔야겠다 싶어 신나는 음악을 틀었다.
“동방신기 틀면 안 돼?”
“동방신기? 요즘 아이돌 노래 좋잖아. 언제적 동방신기야.”
“그래? 난 아직도 동방신기가 좋아.”
동수는 조용히 앉아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까짓거 틀어주마. 나는 내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동방신기 곡을 틀었다. 동수는 신난 거 같았다. 예전에는 춤 못 춘다고 나한테 구박 많이 받았는데, ‘그래, 맞아. 그랬는데.’ 기억나지 않았던 한 부분이 툭 튀어나왔다. 하지만, 또 거기서 끝이었다.
촬영장에서 동수는 다시 한 시윤이 되었다. 김다혜와 사귄댔지. 다시 보니 눈빛이 둘 다 진심인 거 같았다. 연기를 정말 잘하거나 진짜 서로 사랑하거나. 아무렴 어때. 나랑 상관없는 사람들인데. 나와 다른 차원의 사람들.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촬영장에 있는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 눈길을 쏟아 보았다. 내 남편 찾기 프로젝트는 암암리에 진행 중이다. 촬영장에서 만나려고 이런 상황이 생긴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드라마 촬영은 무사히 끝났고, 한 시윤은 더 인기가 높아졌다. 광고며 화보며 예능 출연까지 섭외가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몸이 두 개라도 힘들 것 같은데도 그는 한 치의 오차 없이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고, 나도 그 덕에 인센티브 제법 받아서 삶의 여유가 조금 생겼다.
시간은 어느덧 6개월이 지나, 1년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영화 섭외 문제로 사무실 미팅이 있어 오랜만에 최 부장을 비롯해 회사 사람들을 만났다. 여전히 환대해 주는 사람들. 네가 없으니, 사무실이 텅 빈 것 같다는 사람. 안 바쁠 때 연락 좀 달라는 사람. 대나무 숲이 없어서 어지간히도 답답한 모양이다. 나의 빈자리가 이제 익숙할 법도 한데 답답한 사람들은 아직도 많은가 보다. 조그만 일도 크게 부풀려지는 게 직장이다. 내가 가진 눈치는 그런 일에 최적이었다. 소원해진 사람들을 다시 이어준다거나 답답한 이의 하소연을 들어 준다거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언의 토닥임을 해주는 일. 생존을 위해 터득한 삶의 필살기. 그리고, 그건 나의 문제가 아니다.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척하면 끝난다. 어릴 때는 친구들의 고민에 같이 아파하고 같이 힘들어했었다. 그러나, 그게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느낌으로 알았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자기방어에 강해졌다고나 할까? 나는 나만의 이런 인간관계가 마음에 들었다. 겉으로 한없이 친절하고 속으로 한없이 의심하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아무에게 들키지 않고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곁을 한없이 내주지만, 나는 쉽게 내 틈을 보이지 않았다.
최 부장은 새로 들어온 영화 문제로 한참 한 시윤과 얘기 중이다. 나도 매니저로서 같은 자리에 앉아 있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동방신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한 시윤이 자리를 비우고 최 부장은 답답한 듯 나에게 물었다.
“이 영화 어떻게 생각해. 해? 말아?”
“그건 한 배우님이 결정해야죠.”
“시윤이가 네 결정에 따른다잖아. 여태 뭐 듣고 있었던 거야.”
“네? 그걸 왜 제가?”
“난들 아냐? 네가 하라는 대로 하겠대. 쟤 저러는 거 처음 보네. 내가 아무리 하라 해도 본인이 싫으면 안 하는 놈인데. 그나저나, 시윤이 계약만료 얼마 안 남은 거 알고, JR엔터에서 계속 작업 들어오나 보던데, 마음 다른 데 가 있는 거 아니겠지? 그런 말 없었어?”
“네, 그런 얘기는 없었어요.”
“그래? 일단, 서 대리가 나가서 얘기 좀 해봐.”
나는 그 녀석이 갈만한 곳을 찾았다. 옥상 맨 구석 벤치에 앉아서 멍하게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 배우님, 아니 동수야. 왜 안 한다는 거야? 그 감독님 작품이면 너 칸도 갈 수 있을 텐데.”
“자신이 없어. 그 역할.”
“이미지 변화하기도 좋고, 너무 멜로만 해서 그런 악역도 한 번 해보는 게 네 필모그래피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김다혜가 떠올랐다. ‘한동안 못 만나겠지. 바쁘다 보면 헤어질 거고…. 나 참,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동수는 한참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 정말 해도 될까? 내가 할 수 있을까?’ 꼬리 돌돌 말린 강아지. 뭐가 두려운 걸까? 분명히 두려움이다. 이 표정은. 악역을 해본 적이 없어서일까? 그동안 봐 온 한 배우라면 안 해본 역할이라고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근데 왜일까?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또 기회는 있으니까.”
나는 어쨌든 본인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데 억지로 맡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억지로 권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다. 동수는 미동도 없이 한동안 바닥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심한 듯 일어서며 말했다.
“해볼게. 그런데 그 전에 약속해 줘.”
“무슨 약속?”
“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네가 제일 먼저 와준다고.”
“무섭게 왜 그래. 그냥 영화잖아. 역할일 뿐이라고. 전문인 애가 왜 이러실까?”
“혹시 내가 쓰러지거나 그러면 말이야. 너 내 매니저잖아. 약속해 줘.”
“알았다. 알았어. 내가 네 옆에 대기하고 있을게. 됐냐?”
동수는 최 부장에게 내려가 영화에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워낙 유명한 감독의 작품이고, 각본도 훌륭해서 해외 큰 상까지 노려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최 부장은 나에게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했다. 나는 동수를 집에 데려다주고 지수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우리의 열다섯 때의 일을 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궁금해졌어. 갑자기.”
주춤하는가 싶더니 지수는 이내 별일 아닌 듯 이야기했다.
“뭐 별거 없지. 매일 동방신기 춤이나 추고. 공부는 안 하고 말이야. 다시 돌아가면 내가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할 텐데. 그럼 9급 아니라 7급으로 바로 시작했을 거 아니냐고. 왜 그땐 몰랐을까. 그런데, 너 무슨 일 있어?”
“아니야, 혼자 운전하다가 문득 생각이 났을 뿐이야. 늦게 전화해서 미안. 얼른 자.”
“그래, 조심해서 운전해.”
지수 얘기에서도 크게 특이한 건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아무리 떠올려도 떠오르지 않는 그 시간. 비어 있는 기억. ‘뭔가 있긴 있었어. 그건 분명해.’ 나는 비어 있는 퍼즐 조각을 찾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