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은 나만 몰라

by 열정아줌마

영화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심지어, 크랭크인이 스페인이라니! 일로 가는 거지만, 유럽이다. 내 인생 이렇게 갑자기 업그레이드 되어도 되나? 유명한 감독도 지척에서 보고, 해외로케까지 간다니 너무 설레었다. 영화 선택할 때 힘들어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동수는 대본리딩도 잘 참여했고, 감독에게 연기도 호평을 받았다. ‘엄살은 자식, 안 해봐서 쫄았던 거였군.’

내일이면 출국이다. 여권이랑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제일 중요한 동수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촬영이라니... 다시 봐도 너무 빡빡한데 싶었다. 한 배우 일정 때문이라 불평할 수도 없다. ‘시차 적응할 틈도 없겠네. 기내에서 일단 푹 자게 해야겠다. 그리고, 혹시나 너무 무리다 싶으면 내가 중재해야지.’ 영화도 영화이지만, 내 배우도 중요하니까. 그러고 보니 나도 이제 제법 매니저티가 나는 것 같다.

올로케가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무리 좋은 유럽이라도 내 나라가 좋은 법이다. 일주일, 이상적인 일정이다. 촬영장에 기본 스태프가 있지만 손발은 우리 회사 사람들이 잘 맞을 터였다. 많은 사람이 함께 갈 수는 없어서 딱 필요한 정예 요원만 함께 하기로 했다. 의상팀 한 명, 분장팀 한 명, 그리고, 나.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제법 이 일에 자신이 붙어서 해볼 만했다. 하긴, 배우가 다 하는 거고 나야 서포트만 하면 된다. 제일 중요한 게 배우의 컨디션 조절! 각종 비타민에 자양강장제, 그리고 홍삼, 몸에 좋다는 것들을 바리바리 내 짐에 챙겨 넣었다. 덕분에 내 옷이 몇 벌 줄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동수의 불안한 눈동자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김다혜가 어련히 챙겼을까 싶다가도, 그녀는 그녀대로 나는 나대로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이다.


저녁 비행기지만 일찌감치 나서서 동수 집 앞에 도착했다. 동수는 이미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보니 동수가 나를 기다리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캐리어는 달랑 하나. 물론 의상팀과 분장팀에서 필요한 것들을 챙기긴 하지만, 유명 배우의 캐리어치고는 너무 단출했다. 내 캐리어도 두 개인데, 살짝 부끄러웠다.

“짐이 이게 다야?”

“응.”

“그래도 명색이 배우가 이게 뭐냐?”

“촬영만 하고 오는 건데 뭐. 짐 많으면 더 피곤해.”

그건 맞는 말이다. 가져간 게 많으면 갖고 올 것도 많은 법이다. 촬영을 많이 다니니 확실히 나름의 노하우가 있나 보다. 감탄하며 차에 올랐다.

“차에 뭐 놓고 내리지 마세요. 배우님, 여권 확인하시고요.”

“너나 잘하세요, 매니저님.”

웃으면서 출발했다. 직항이라고는 하지만 열네 시간이 넘는 비행이다. 이렇게 장거리는 처음인데 걱정하는 내가 동수의 눈에도 보였나 보다.

“너 장거리 처음이지?”

“어, 심지어 유렵은 더 처음이야. 표 많이 나?”

“엄청. 하하. 네가 무서운 것도 있구나.”

“무서운 게 아니라, 안 해봐서 그런 거야. 그냥 불안한 거라고.”

“걱정 하지 마. 예전엔 직항도 없어서 스무 시간 가까이 걸리고 그랬어.”

“너 스페인 가봤어?”

“응. 그러고 보니 나도 십 년 만에 가는 거네.”

“데뷔하고 바로 간 거야?”

“아니, 그 전에. 스페인에서 데뷔한 거나 마찬가지야. 거기서 최 부장님을 만났거든.”

“그래?”

더 묻고 싶었지만, 걷잡을 수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이 문득 들었다. 공항에 도착하고, 출국 수속 절차를 밟느라 그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몰려든 팬들 때문에 한차례 폭풍을 겪은 뒤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빨리 비행기 좌석에 앉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열네 시간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내리 잠만 자야지 생각했는데 계속되는 난기류에 겁이 났다. 무엇보다, 자려고 하면 나오는 기내식 때문에 화가 나서 잘 수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은 포기해야 얻는다. 내가 난기류와 싸우고 기내식을 못 참아 내는 동안에도 동수는 계속 잠만 잤다. 마치 비행기 안이 제일 편안한 곳인 것처럼 몇 시간을 이어서 잤다. ‘컨디션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나는 뜬 눈으로 버티다가 도착하기 한두 시간 전에야 겨우 잠들었다. 곧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순간 내 눈앞에 멈춰있는 동수의 눈을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뻔했다.

“야. 깜짝 놀랐잖아.”

“입 벌리고 자길래. 살짝 닫아주려고 했더니.”

‘아 놔, 이 녀석을 그냥!’ 나는 고개를 홱 돌려 손으로 입가를 닦았다. 다행히 침은 안 흘렸나 보다.

“도착했어?”

“응, 이제 곧 착륙할 거야.”

“컨디션은 어때?”

“푹 자서 괜찮아. 너는?”

“나는 당연히 괜찮지. ”

비몽사몽이었지만, 공항에 내리자마자 준비된 차량으로 숙소까지 이동했다. 짐 풀 시간도 없이 바로 나가야 했기에 캐리어만 방에 올려두고 간단한 소지품만 챙겨서 촬영장으로 이동했다. 촬영팀은 이미 장비 세팅을 다 마친 후였다. 한 배우의 촬영 준비도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오늘 촬영분은 영화 마지막 장면이다. 엔딩부터 찍는 것도 신기했지만, 악인이었던 이가 잘못을 뉘우치고 스페인 마요르카 작은 해안가에 정착해서 참회하며 살아간다는 설정은 너무 이상적이었다. 과연 그런 일이 현실에서 가능할까? 각본에 따르면 남을 무참히 짓밟고 살아온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갑자기 지나간 일들을 후회한다? 현실감은 없지만, 그 미묘한 인간의 감정까지도 한 배우와 감독이 잘 살려낼 테니 내가 걱정할 바는 아니다. 한 배우의 컨디션도 괜찮고, 오늘 촬영이 무사히 끝나면 내일 하루는 쉴 수 있다. 빨리 호텔로 돌아가 푹신한 침대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런데, 한 배우의 연기가 영 신통찮다. 어색하다. 분명 리딩 때는 잘했었는데, 몇 차례 엔지가 나더니 결국 잠시 쉬어가자는 감독의 사인이 떨어졌다. 일몰 전에 촬영이 끝나야 한다. 그래야 각본대로 한 배우의 뒷모습과 일몰을 한 장면으로 잡고 끝낼 수가 있다. 시간은 얼마 없는데 동수의 표정이 너무 힘들어 보였다.

“힘들어? 힘들면 오늘 안되겠다고 말할까?”

“아니야, 그럼,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해. 나 하나 때문에.”

“지금 그게 중요하니. 네가 중요하지. 있어봐. 내가 감독님 만나고 올게.”

동수가 급히 일어서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아니야, 할 수 있어. 해볼게.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야. 언제까지 물러나 있을 수는 없으니까. 대신 네가 나 잘 봐줘. 그럼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래, 너 보고 있을게.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연기 한 장면 하는 데 이렇게 비장할까 싶던 차에 한 배우는 엔딩 장면을 한 번에 마무리 짓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감독은 그 장면까지도 한 배우의 연기인 줄 알고 카메라에 담았다. “엑설런트”라는 환호를 지르며. 나는 너무 놀라 동수에게 뛰어갔고 그제야 정말 실신한 걸 알아챈 감독이 멀리서 달려왔다. 동수는 내가 이름을 부르자 반응했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바들바들 떨었다. 나는 촬영팀에 이야기하고 동수를 먼저 숙소로 옮겼다. 식은땀을 펄펄 흘리며 동수는 허공에 대고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밤새 동수 옆에서 단단하면서도 여린 손을 잡고 지키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침대에는 내가 누워 있고, 동수가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너 괜찮아? 그런데, 내가 왜 누워 있는 거야?”

“너 한숨도 못 잤잖아. 너 잠든 지 한시 간도 안됐어.”

“야, 나 너 잘못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미안. 내가 공황장애가 있는데 그걸 너한테 말을 못 했어. 미안해. 연기하는 도중에 올까 봐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게 뭐라고. 나도 한참 공황장애 때문에 힘들었던 적 있어. 얘기하지 그랬어. 그거 아무것도 아닌데. 요즘 둘에 하나는 공황장애래.”

“거짓말하지 마.”

“응, 거짓말이야.”

동수와 나는 한참을 웃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이 축 늘어졌다.

“좀 더 자. 너 너무 못 잤어. 나 잠시 나가서 산책 좀 하고 올게.”

“그럼 한 시간만 더 잘게. 한 시간 후에 나 깨워 줘! 밥 먹어야지.”

“하하하, 그래. 밥 먹자. 일단 누워.”

잠에서 깬 건 점심때가 다 되어서였다. 동수는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왜 안 깨웠어. 너 배 안고파?”

“배고파. 다른 애들도 좀 더 자고 밥 먹자고 해서 기다렸어. 이제 가서 깨우자. 나 여기 맛집 꽤 알아.”

다른 스태프들을 깨워서 한 배우가 안내하는 곳으로 향했다. 호텔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해산물 레스토랑이었다. 너무 맛있어서 놀랐고 유창한 한 배우의 스페인어에 또 놀랐다.

“우아, 한 배우님. 스페인어는 언제 배우셨어요?”

“응, 나 잘하지? 거의 현지인 수준이랄까?”

“네, 여기 사는 줄. 영어도 잘하지 않으셨나?”

“영어도 완벽하지. 나 같은 사람 별로 없을걸.”

스태프들은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근처 산책한다고 먼저 일어섰다. 솔직한 친구들이다.

“잘하고 욕먹는 사람들이 있어. 꼭 너처럼 말이야.”

“맞아. 잘해도 못해도 이유도 없이 욕먹는 사람이지 난.”

“무슨 소리야. 너 같은 사람이 그런 소리 하면 재수 없다고 해요. 한 배우님! 다혜 씨는 그런 말 안 해?”

“다혜? 어떤 다혜? 김다혜?”

“너는 바다 건너왔다고 사랑하는 사람 이름도 잊은 거야? 촬영장 사람들 눈치 다 깠던데.”

“누가 연인인데? 다혜가? 무슨 소리야. 걔 나보다 열 살이나 어려.”

“어린 거랑 무슨 상관이야. 요즘 나이가 대수니?”

“이거 봐, 내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그런 거야. 나랑 아무런 상관없어. 전화번호도 몰라. 다혜가 들으면 깜짝 놀라겠다. 이런 아재랑 엮이다니. 작품만 하고 나면 매번 이런 말도 안 되는 스캔들에 엮인다고. 내 눈알이 멜로인 걸 탓해야 하나. 나 참.”

나는 동수의 말을 들으면서 몹시 유쾌해졌다. 그러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빵 하나를 집어 들고 맛있게 먹었다. 최근에 먹은 빵 중에 제일 맛있는 빵이었다.

시에스타 시간을 안내해 주는 직원 덕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요르카의 오후는 조용했다. 상점들은 대부분 문이 닫혀 있었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건 거의 외국인들이었다. 그들 틈에 섞여 있으니, 마치 나도 관광 온 것 같았다. 여유로운 오후였다. 제일 중요한 촬영을 어쨌든 마무리한 것도 다행이고, 김다혜가 한 시윤의 여자 친구가 아님을 알게 된 것도 다행이었다. 나랑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그냥 기분이 좋았다.

나머지 촬영들은 악인이 스페인에 정착해 살아가는 일상을 담은 것들이라 무난하게 한 번에 통과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 왔다. 감독과 촬영팀이 한자리에 모여 남은 한국 촬영도 잘해보자는 시간을 가졌다. 현지에서 마시는 스페인 와인은 너무나 근사했다. 그렇지만 계속 즐길 수는 없었다. 촬영팀은 다른 배우와의 일정이 남아 있어서 더 머물러야 했고, 한 배우는 한국에 다른 일정 때문에 내일 아침 7시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아쉽지만, 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그들과 헤어졌다.

숙소로 돌아온 셋은 이대로 마지막 밤을 보낼 수 없다며 내 방으로 다 모여들었다. 아쉽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몰라 챙겨온 숙취해소제를 모두에게 권하고 들고 온 소주 팩을 깠다. 역시 대한민국 소주다. 스태프들은 환호하며 컵라면과 소주를 연신 마셔댔다. 와인에 소주까지 급하게 마시더니 둘은 금방 나가떨어졌다. 각자의 방으로 데려다주고 동수와 나는 다시 3차전에 들어갔다. 이 녀석도 보통 주당이 아닌가 보다. 나도 한 술 하는데 끄떡도 없다.

“너 술 세다. 예전에 네 모습으론 상상이 안 돼.”

“내가 예전에 어땠는데?”

“조그맣고 나보다 작았어. 그리고 어깨는 요만하고.”

손으로 내 어깨보다 좁다고 시늉을 하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네 기억 마지막에 그런 내가 있구나.”

“나는 사실 네가 기억이 안 나. 작았다는 것도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어. 우리 한참 동방신기 춤에 미쳐 있었잖아. 스탠드에서 지수랑 셋이 춤 따라 춘 거만 기억나. 그리고, 최근에 기억난 건데 내가 너한테 춤 못 춘다고 놀린 거랑. 거기서 끊어져.”

동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혼자 소주 한 팩을 조용히 마시더니 갑자기 졸린다며 방으로 돌아갔다. 뒷정리를 대충 끝내고 나니 침대 옆 디지털시계는 새벽 3시를 넘기고 있었다. 잘 시간도 없겠다 싶어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공항에서 가까운 숙소라 해도 출국 수속을 하려면 최소 두 시간 전엔 공항에 도착해야 할 터였다. 한 시간 여유가 있다. 내 아무리 주당이라지만 그 시간 홀로 술을 더 마시자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져온 믹스커피 한 봉지를 타서 창가로 갔다. 어둠이 내려 앉아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어둠을 응시하며 좀 전에 이 방에서 동수와 나눈 얘기들을 곱씹었다.

‘왜 거기서 더 말을 하지 않았을까? 내 기억이 끊어졌다는데 궁금해하지도 않았어.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 내가 잘 못 봤나.’ 달콤 쌉싸름함이 목 안을 감싸자, 온몸이 잠시 이완되는 느낌이 들었다. ‘동수가 알 리가 없잖아. 걘 이미 떠난 뒤였어. 하여튼 넌 너무 생각이 많아.’ 나는 커피 한 봉지를 더 타서 천천히 마셨다. 그리고, 정해진 예정대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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