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

by 열정아줌마

한국에서의 하루는 더 빠르게 돌아갔다. 영화에 드라마에 광고까지 너무나 바쁜 나날들이었다. 일 얘기 외엔 할 시간도 없었다. 영화 촬영도 모두 끝나고 홍보 일정만 남기고 있었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었다. 매니저로 있는 동안 많은 걸 경험한 귀한 시간이었다. 최 부장이 약속한 일 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최 부장은 나에게 이번 영화 마무리까지만 부탁한다고 사정했다. 일 년이 다 되도록 다음 매니저는 감감무소식이다. 태생이 저질 체력인데 일 년 동안 너무 바쁘게 살았더니 그즈음 감기가 떠날 날이 없었다. 내 체력이 한 배우의 일정을 따라가기에 무리였다. 이대로 가다간 한 배우에게 괜히 민폐가 될 것 같았다.

“다른 매니저 찾아봐야 할 거 같아. 너무 힘들어. 나도 벌써 서른다섯이야.”

“너만 서른다섯이야? 나도 서른다섯이야.”

“너는 돈이라도 많이 벌잖아. 나는 아직 대출도 다 못 갚았다고.”

“내가 갚아줄까?”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걸 네가 왜 갚아?”

“그건 아니지 그지?”

“당연하지!”


그때였다. 전화기 두 대가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걸려 온 건 최 부장이었고, 동수는 대표였다. 일단, 내가 먼저 받았다.

“무슨 일이세요? 대표님도 한 배우한테 전화하신 거 같던데.”

“인터넷 기사가 심상치 않아. 댓글도 그렇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시윤이가 학폭에 연루됐었다는 기사야. 시윤이가 이민 간 시점이랑 맞아떨어지는 데다가 댓글들이 시윤이에게 불리한 것들뿐이야. 일단 둘 다 사무실로 들어와.”

전화를 끊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동수 표정도 심상치 않다.

“너 아는 거 없어?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동수는 한참 침묵하다가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한다고 믿어줄까? 그때도 안 믿어줬어.”

나는 차를 잠시 멈췄다. 잃어버린 퍼즐 조각, 그 시간이 틀림없다.

“너 알고 있지? 내가 기억 못 하는 그 시간에 대해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봐 늘 조마조마했어. 연기를 하고 유명해지면 질수록, 이름까지 바꿨는데. 안 되는 놈은 결국 안 되는 건가 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급히 차를 사무실로 몰았다. 이럴 때는 여러 사람이 뭉쳐야 한다. 퍼즐은 못 맞춰도 사태 수습엔 빠른 편이다. 대표실에 모여 앉은 우리는 일단 기사가 거짓임을 알려야 했다. 누구보다 한 시윤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최 부장과 대표는 한 배우를 무조건 믿었다.

“내가 얘 스페인에 처박혀 있는 거 데리고 왔어. 와서도 군대부터 다녀와야 한다며 나를 2년이나 기다리게 한 놈이야. 10년을 봐왔지만, 시윤이는 누굴 때릴 위인이 못 돼.”

대표가 이어서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먼저 나간 매니저 놈들이 너무 악의적으로 인터뷰를 했어. 이건 어쩔 거야.”

“무고죄 이런 걸로 걸어야죠. 무슨 근거로요? 본인들 말밖에 더 있습니까? 그리고, 걔들이 시간 못 지키고 한 배우 일정 다 꼬이게 한 거잖아요. 우리한텐 그 증거가 다 있고요.”

최 부장은 화가 안 삭히는지 책상까지 쾅쾅 내려치며 말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던 대표는 작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기자회견 날짜 잡아. 영화 홍보하자마자 터지는 게 아무래도 걸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JR엔터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아직 심증일 뿐이지만. 기자회견 하기 전에 대응책을 좀 마련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시윤이는 당분간 집에 있어야겠어. 서 대리 미안하지만, 한 배우랑 같이 좀 있어 줄 수 있겠나? 이 친구 공황장애가 있어서 내가 안심이 안 돼. 무슨 일 벌일까 봐.”

“네, 그럴게요.”

나도 실마리를 풀어야 했다. 내게서 지워진 그 시간. 그 기억이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 집으로 가자. 너희 집은 이미 기자들이 둘러싸고 있을 거야.”


나는 동수의 대답 따윈 필요 없다는 듯 그를 이끌고 내 집으로 향했다. 차는 두고 택시로 이동했다. 그리고, 지하 주차장에서 내려 계단으로 이동해 집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아직 아무도 안 찾아온 것 같았다.

“냉장고에 맥주 있어. 마셔.”

“괜찮아.”

“야! 네 어깨가 아깝다. 겁먹지 마. 왜 쫄고 그래?”

나의 말도 동수에게 큰 위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동수는 아이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스페인에서 말했던 넘어야 할 산... 동수에게 그 산은 어떤 의미일까? 이 일과 관련이 있을까?’ 일단, 갈아입힐 옷부터 찾아보았다. 아빠가 가끔 오시면 입는 잠옷을 동수에게 건넸다. 역시, 체구가 작은 아빠 옷이 맞을 리가 없다. 결국, 꼭꼭 숨겨둔 내 최고 전성기 때의 2XL트레이닝복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180이 넘는 동수는 나의 숨기고 싶은 과거의 옷을 오버핏으로 멋지게 소화해 버렸다.

“이 옷, 네 거야?”

“아니야! 아니라고!! 그게 중요해 지금?”

당황한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빨리 화제를 돌려야 한다.

“새벽 배송으로 너 속옷이랑 필요한 거 몇 개 좀 시켜. 칫솔 같은 건 우리 집에 있고. 면도기 이런 거. 우리 집 주소는 알지? 내가 주문해주고 싶어도 아는 게 없어. 가지러 갈 수는 없잖아.”

그리고, 나는 지수에게 전화해서 내일 식료품 몇 가지를 현관 안에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혹시나 집 앞에 기자들이 있으면 네 집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지수도 눈치가 빠르다. 더 이상 묻지 않고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제 내 기억만 불러오면 된다.


“자, 이제 말해. 너는 알고 있어. 분명히!”

“응, 알아. 그런데 말할 수 없어.”

“왜?”

“너를 보름동안 혼수상태로 만든 것도 모자라서 기억까지 잃게 한 일이니까. 너에게 다시 그 고통을 안겨줄 수는 없어.”

“박동수, 아니 한 시윤! 똑바로 들어. 너도, 나도 이제 서른다섯이야. 열다섯이 아니라고. 그때는 아무것도 못 했을지 모르지만, 이젠 아니야.”


“아니, 넌 그때도 했어. 용감하게.”


동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동수의 말들은 내 기억 어느 부분에서 맞닿아 연결되고 끊어지고를 반복했다.

“내가 ADHD가 있다는 걸 초등학교 때 담임이 공개수업 때 말해버렸어. 물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겠지만. 그래서, 나는 내내 그 꼬리표를 달고 살았어. 다행히, 약을 먹고 꾸준히 치료한 덕에 충동적인 부분이랑 폭력적인 부분은 거의 없어졌는데도 사람들은 나를 여전히 행동장애가 있는 아이라고 생각했어.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박동수는 주의력 결핍 장애아니까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했고, 아이들은 대개 부모의 말을 잘 들었어. 그때 네가 나에게 다가왔어. 내가 너에게 말했는데도 지금은 괜찮은 거잖아라며 아주 쿨하게.”

“그거 말고, 2학년 겨울 방학을 앞두고 네가 사라지기 직전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어. 종종 꿈을 꿔, 네가 농구대 아래에서 맞고 있고, 나는 그런 너를 가만히 보고 있어.”

“너도 농구대 밑에 있었어.”

“뭐라고? 지켜본 게 아니었어?”

“응, 지켜보지 않았어. 농구대로 뛰어왔지.”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결심했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날도 어김없이 아이들에게 맞고 있었어. 한참을 맞고 있었는데 네가 뛰어 와서는 그 녀석들에게 달려들었어. 가만히 있을 놈들이 아니지. 우리 둘 다 심하게 맞았어. 특히, 네가. 소리를 듣고 학교 선생들이 쫓아왔는데, 때리던 놈들은 이미 다 도망가 버린 뒤였고, 정신 잃은 너와 피투성이 나 둘만 있었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내가 널 때린 걸로 됐어. 도망간 놈들이 선생들에게 그렇게 말했거든, 자기들이 봤다고. 넌 보름동안 깨어나지 않았고.”

“하, 어이가 없다. 너도 다쳤잖아? 근데 그걸 다 믿은 거야? 선생님들이?”

“걔네 부모가 학교 운영위원이었나 뭐 그랬던 걸로 기억해. ADHD 때문이라며 밀어붙였어. 그 녀석들 짓인걸 알았다 하더라도 내가 피해 갈 방법은 없었을 거야.”

“내가 빨리 정신을 차렸어야 했네. 그랬더라면 네가 뒤집어쓰는 일은 없었을 텐데.”

“지수가 도망가는 다른 아이들을 봤다고 말했는데도 안 믿더라.”

“지수가 그랬다고? 혹시 지수는 그날 일 알고 있어?”

“응. 잠시 한 눈 판 사이에 네가 없어졌고, 농구대 밑에서 소리가 나기에 가니까 그 녀석들은 도망가고 있고, 우리 둘은 그 지경이었던 거지. 지수도 그때 충격 많이 받았어. 최 부장이 너를 내 매니저로 추천했을 때, 너무 고민스러웠어. 네가 날 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페북으로 이십 년 만에 지수에게 연락했었어. 내가 한 시윤이고 또 동수라고 그때 말했고, 네가 그날 기억을 못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어. 그 얘기는 금기어처럼 여겼대. 지수도 친구들도 너희 부모님도. 근데 지수가 그러더라. 언젠가는 기억할 거고, 말하지 않은 우리에게 서운해할지도 모른다고. 너라면 말이야.”

“나쁜 년, 나한테 귀띔이라도 해줄 수 있었잖아.”

“모른척하는 수밖에 없었을 거야. 너한테 어떤 증상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어. 넌 꽤 오래 아팠으니까. 이런 일이 안 생겼더라면 계속 말 안 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일 년간 지켜본 이 아이는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다. 내 기억이 또렷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답답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이민까지 갈 건 뭐야. 그렇게 갑자기. 꿋꿋하게 버텼으면 내가 깨어났을 거고, 기억해 냈을 수도 있었잖아.”

“우리 부모님은 더 이상 이런 나라에서 나를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하셨어. 가장 빠른 방법이 스페인이었다나 봐. 난 고작 열다섯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어. 미친 듯이 공부하고 운동했어. 나약해지지 않으려고. 내가 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내 주위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는 걸 그때 깨우쳤는데... 제기랄, 다시 그때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지킬 수 없는 처지에 놓여 버렸다. 조용히 살았더라면 잊고 살 수 있었을까? 하지만, 풀지 못한 억울함은 계속 그를 짓누르고 괴롭혔을 게 분명하다. 넘어야 할 왜곡의 산! 제발, 내 기억이 되돌아와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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