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이상 평범하게 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잔다르크가 오를레앙을 향해 전진할 때 이렇게 비장한 마음이었을까? 나중에 그가 틀리고 그들이 맞다고 해도, 그래서, 모든 비난의 화살이 우리에게 돌아온다 해도, 나는 그를 도와야 한다고 결정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남의 일에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관여하리라 마음먹었다. 아니, 남의 일이 아니다. 나의 일이다. 회피하며 살아온 내 인생에 처음으로 내가 직접 나선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가해자가 따로 있고, 나와 동수 둘 다 피해자라면 이번 기회에 바로 돌려야만 한다. 낄낄거리며 이 상황을 즐기고 있을 놈들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평소의 나처럼 차분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냉철하게. 당장 내 기억부터 떠올려야 했다. 내가 증거고, 또 증인이다. 기억해 내지 않으면, 그들을 특정해 내지 않으면, 내 말은 신빙성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지수가 분명히 도망가는 아이들을 봤다고 말했음에도 동수가 뒤집어썼다. 단지, ADHD라는 이유만으로. 빌어먹을! 선생들은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부모와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게 틀림없었다. 그때는 김영란법이 없을 때니까.
하루가 지났다. 동수와의 동거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다시 말해 둘의 동거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동수는 제법 음식을 잘했고, 나보다 깔끔했다. 먹는 건 내가 다 했으니, 음식물 뒤처리도 거의 필요 없었다. 신혼부부가 이럴까? 잠시 미래의 남편을 그리워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그런 멜로망스한 상상이라니. 총만 안 들었지, 지금은 전시상황이 아닌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순간순간 다가오는 동수의 배려를 기다리게 되었다. 종일 멜로와 전쟁터를 오가던 나를 위해 구원병이 도착했다. 지수는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조용히 나를 찾았다. 나와 동수는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방에 있다가 지수인 걸 확인하고 거실로 나왔다.
“기자들 쫙 깔렸어. 동수야 오랜만, 일단 우리 인사는 나중에 하자.”
지수는 바깥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여기가 이 지수 집이 아니라 서 지은 집인 걸 이미 알고 있고, 한 시윤이 여기 있는 건 아직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서 지은 행방을 물으며, 당시 피해자였으니까 얘기를 듣고 싶다고 했단다. 집 앞까지 쫓아 오는 걸 경찰에 신고한다고 협박해서 돌려보냈다고 했다. 기자는 그때 사건을 혹시 알고 있냐고 끈질기게 물었고, 한 시윤은 절대 아니라고 얘기했는데 들어줄 리가 있겠냐며 손사래를 쳤다.
인터넷 기사는 이미 한 시윤 안티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 자기가 중학교 동창이었는데 이상한 아이였다, ADHD라서 문제가 많았다. 심지어 누굴 때리는 걸 직접 보기도 했다는 등등의 목격담들이 우후죽순으로 달렸고, 댓글들은 더 가관이었다. 나는 최 부장에게 전화로 자세한 내막을 얘기하고, 강한 어조로 덧붙여 말했다.
“부장님, 지금 당장 인터넷에 글 올리는 놈들이랑 댓글 다는 놈들 전부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주세요.”
“기자회견 후에 해도 되지 않을까?”
“아니요. 늦어요. 일단 진정시켜야 해요. 지금 거기 글 다는 사람들 열에 열은 이 일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냥 승냥이처럼 달려드는 거라고요. 댓글이 달리면 달릴수록 상황은 더 나빠질 거예요. 부탁드려요. 부장님.”
“그래, 서 대리 말대로 할게. 아, 그리고, 친한 기자한테 연락해서 알아냈는데 JR엔터 쪽에 서문 중학교 출신이 있더라고. 아마 시윤이가 거기에서 내민 손을 안 잡으니까 이런 일을 벌인 게 아닐까? 추측하던 중이야.”
“혹시 그 사람들 이름 아세요?”
“잠시만, 여깄네. 이철민, 강태호.”
나는 이름을 받아적으며 다시 말했다.
“알겠어요, 부장님. 아, 기자회견 하는 날, 한 시윤이 자기 집에서 출발할 거라고 살짝 흘려주세요. 지금 제 집에 있거든요. 여기도 기자들 깔렸어요. 나갈 때라도 편하게 나가야 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나저나 서 대리는 괜찮겠어?”
“괜찮아요. 제 배우 일이고, 제 일이기도 하니까요.”
“고마워, 서 대리. 부탁해.”
“네, 부장님. 지금 바로 고소장 접수해 주세요.”
핸드폰을 내려놓다가 떨어뜨리고 말았다. 손이 부르르 떨렸다. 무섭고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분노였다.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이 세상에 대한 화. 울분. 그리고, 안타까움. 어쩌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정작 가해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버렸을까?
“너희들 이철민이랑 강태호라고 알아?”
지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고. 일진 놀이하면서 나쁜 짓 많이 하고 다녔던 놈들로 기억하고 있었다.
“동수야, 넌 알아?”
“모를 수가 없지. 그 녀석들이니까. 너랑 나 팬 놈들. 패거리가 다섯인가 있었어. 늘 다 같이 모였고, 이철민, 강태호 그 녀석들이 주동이었어.”
“걔들이 JR엔터에 있나 봐. 동수 너, 그쪽 사람들 만난 적 있지?”
“지난주에 이사라는 사람이 촬영장으로 찾아왔더라고. 파격적인 대우 어쩌고 하는데 내가 대차게 거절했거든. 난 옮길 생각이 없으니까.”
“그런 중요한 일을 나한텐 왜 얘기 안 한 거야?”
“할 필요가 없었어. 고민할 것도 없는데 뭐 하러. 그리고, 그날 영화 관계자들하고 일정 잡느라 너 엄청 바쁘기도 했고.”
“앞, 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네. 그걸 역이용했네.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 자기들이 해놓고, 뒤집어씌운 것도 모자라서, 아, 열받아서 돌아 버리겠네. 미쳐버리겠다. 정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의 이름을 말하고 그들이 실제적인 가해자라고 말해도 되지만, 같은 식구라 거짓 증언으로 감싼다느니 돈으로 회유당했다느니 몰아세우면 우리 쪽에 더 불리해질 게 뻔했다. 가슴이 턱턱 막혔다.
“잠깐만, 안 민준, 민준이 우리 반이었지?”
지수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다는 듯 말했다.
“어, 안 민준 우리 반이었어. 걔는 나랑도 좀 친했는데. 갑자기 걔는 왜?”
동수가 뒤이어 그 아이를 기억해 냈다.
“아하, 이런 이런... 같은 반인 건 몰랐네. 나 걔랑 인스타 맞팔이거든. 한 번 떠볼게. 있어봐.”
지수는 핸드폰을 들고 그 민준이라는 아이에게 DM을 보냈다. 안 민준은 지수의 DM에 곧장 답장을 해왔다.
‘나도 기사 봤어. 동수는 그럴 애가 아니야. 나도 그때 사건 터지고, 동수가 가해자라길래 뭐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직접 본 게 아니니까 나설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그때 우리 반에 일진 애들, 선생님들도 함부로 못 하셨어. 아마 걔들이라고 밝혀졌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지수는 그의 DM을 천천히 읽었다. 종종 서로 안부 물으며 지내는 사이라고 말하는 지수 표정이 내 예리한 레이다 망에 그냥 지나갈 리가 없다.
“야, 너 걔랑 왜 친한 건데? 어?”
나는 사건의 본질은 잊은 채 얼굴까지 지수 코 앞에 갖다대며 캐묻기 시작했다.
“아니, 얼마 전에 일하다가 우연히 만났어. 걔도 공무원 됐더라고. 나보다 높긴 하지만. 자식, 공부 열심히 했더라.”
“오케이! 일단 친하다는 거잖아. 우리 민준이 도움 좀 받을 수 있을까?”
나는 다급해진 마음에 지수를 간절히 쳐다보았다.
“걔가 나서려고 하겠어? 에이, 괜히 나랑 사이만 이상해 질 거야.”
“너희 혹시 썸타냐?”
나는 범인 심문하듯 다시 집요하게 묻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직.”
“아직이라면 그런 비스무리한 관계로 가고 있다는 뜻이지?”
지수는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거짓말 못 하는 기지배. 딱 걸렸다.
“아니, 걔가 나더러 만나보지 않겠냐고 하더라고. 아직 대답도 안 했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날 판이네. 이거 참.”
“없는 사실을 말하라는 게 아니잖아. 지수야, 우리 말이라도 한 번 해보자. 댓글 하나만이라도 달아 달라고. 용기를 좀 내 달라고.”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수에게 매달려 보았다.
“지수야. 하지 마, 괜히 나섰다가 걔 신상 털리면 어떻게 해. 공무원이라며, 제3의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어.”
이번엔 동수가 나서서 말린다. 친했던 녀석이라더니 끌어들이고 싶지 않나 보다. 지 앞일은 생각 못 하고 인간적일 일이냐고 지금.
지수는 휴가를 냈고, 그렇게 셋은 집 안에 갇혀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나보단 둘이 낫고 둘보단 셋이 낫다고 누가 말했을까? 똑똑한 양반. 열다섯, 동방신기로 하나가 됐던 우리는 24평 대출금 가득한 내 집에서 예전보다 더 진한 우정을 쌓아가고 있었다.
기자회견은 내일로 다가왔다. 최 부장의 발 빠른 대처로 악의적인 댓글은 더 이상 달리지 않았다. 최 부장은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악플러 전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장을 접수했다. 마케팅 부서 직원들은 모든 검색창을 확인하며 악성 댓글이 달릴 때마다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답글을 달았다. 그랬더니, 서서히 인터넷은 진정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숨은 돌렸지만, 내일 기자회견장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대표는 자기만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하고, 한 시윤은 본인만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둘은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둘 다 하기로 정했다. 그리고, 그들의 기자회견이 끝나면 내가 질문을 받기로 했다. 당시 박동수에게 맞은 걸로 되어 있는 피해자. 박동수가 아니라 이철민과 강태호에게 맞았다고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나는 기억해 내지 못했다. 더 큰 화를 불러올지도 모르지만,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저지르고 보자. 가만히 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셋이 모이고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술 마실 여유도 없었다. 막상 내일이라 생각하니 긴장이 되어서였을까? 시원하고 청량한 맥주 한 모금이 너무나 절실했다.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 보니 한 캔이 두 캔이 되고, 두 캔이 세 캔이 되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더 또렷해졌다. 지수는 피곤했는지 작은 방에서 잠이 들었고, 동수는 거실에서 내일 회견 때 발표할 자료를 직접 쓰며 훑어 보고 있었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와 남은 맥주를 마시며 계속 그놈들의 이름을 되 내어 불렀다.
“이철민, 강태호. 이철민, 강태호. 이철민, 강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