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방과 후에 스탠드에 앉아 있었다. 지수와 함께 동방신기 노래를 흥얼거리며 동수를 기다리고 있는데, 오지를 않는다. 수업 끝난 지가 한참인데, 같이 춤 연습하기로 해놓고 어디로 샌 거야 투덜거리고 있는데 공중에서 ‘퍽퍽’하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농구대 밑, 체육 창고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서 소리가 나는 건 분명했다. 나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철민. 또라이 개새끼 자식. 또 동수를 괴롭히고 있었다.
“야! 일진 놀이는 다른 데서 해. 왜 학교에서 애를 때리고 지랄이야?”
“서 지은! 겁대가리 없이 함부로 까불지 마. 끼리끼리 논다더니. 너도 ADHD냐?”
“그래, 그렇다 어쩔래? 그게 어때서? 제정신으로 친구 괴롭히는 너희들보다 나아. 이 나쁜 놈들아.”
“이게 돌았나. 너 우리가 누군지 몰라?”
“알지, 우리 학교 일진. 부모 믿고 설치는 최악의 또라이들. 나쁜 짓이란 나쁜 짓만 골라 하고 다니는 거 우리 학교에서 모르는 애들 있냐?”
“이 년도 분별이 안 되나 보네. 가만히 있으면 맞지는 않을 건데. 왜 나서서 지랄이야. 어?”
먼저 내 뺨을 때린 건 강태호였다. 그리고, 그 뒤로 원성빈, 이강수. 그리고, 옆 반인 김지호가 보였다. 동수는 앞으로 나서며 내가 맞는 걸 막아 보려 했지만, 왜소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 다섯이 덤비는 데 당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자식들에게 돌아가며 계속 맞았고, 이철민의 발길질에 기절해 버렸다.
벌떡 일어났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X발새끼....욕이 절로 나왔다. 혹시나 잊을까 봐 생각난 이름들을 재빨리 핸드폰에 남겼다. 밤 11시다. 밖으로 나오니 지수와 동수는 조용히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댓글이 달렸어.”
“또? 잠잠해지나 싶었더니 악플러, 이 정신병자들 진짜 어떻게 해야 하냐.”
“그게 아니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동수를 기억한대. 그리고, 일진들이 있었다는 것도. 동수는 산만하긴 했지만, 다른 아이를 때릴 애는 아니라고.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비슷한 종류의 글을 달았어.”
지수는 놀랍다는 듯 계속 핸드폰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을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려 슬며시 웃었다.
“나 다 기억났어. 그날.”
“너 괜찮아?!!!!!!”
기억을 해낸 것보다 내 상태를 둘은 더 걱정했다. 나는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이다. 열다섯의 나는 놀라서 까무러쳤는지 몰라도 이제 그 정도로 놀라기엔 서른 다섯의 나이가 무색하다.
“이철민, 강태호, 원성빈, 이강수, 김지호. 맞지? 동수야?”
“어, 맞아. 죽어도 못 잊어. 그 이름들.”
“이철민 개새끼 가만 안 둬 내가. 그 자식한테 맞고 기절했잖아. 아오, 열받아”
“아, 그리고, 지은이 너 자는 동안 내가 민준이에게 물어봤거든. 그때 일진이었던 애들 지금 뭐 하는지 아냐고? 이철민이랑 강태호가 JR엔터에서 일하는 건 알고 있대. 인스타에 하도 연예인들이랑 찍은 사진 올려서 모를 수가 없다고. 그리고, 나머지 애들은 평범한 회사원이래.”
“지수야, 너 그 친구랑 잘해봐. 괜찮은 녀석 같아.”
나는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소장 초안을 작성했다. 이십 년이 지나버렸다. 그들은 미성년자였다. 설령 아니었다 하더라도 공소시효는 이미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내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피해보상은 받아야 했다. 회사 고문 변호사님께 메일을 남겼다. 돈이 들더라도 나는 이 사건을 공론화시킬 것이다. 틀린 건 틀렸다고, 그리고, 옳은 건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에 내가 방점 하나라도 남길 수 있다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 좋은 건 기본 상식들이 늘어간다는 것이고, 쉽게 동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잃을 게 없어서 겁도 없었다. 나는 더 이상 평범한 서 지은이 될 수 없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침 일찍 변호사와 긴 통화를 했다. 오며 가며 깍듯이 인사해 둔 덕에 나에 대한 인상이 좋은 거 같았다. 이건 우리 회사의 일이 아니며, 개인의 사건임을 분명히 밝혔는데도 흔쾌히 맡아주시겠다고 했다. 메일 확인했다며, 개인의 문제를 넘어 회사의 문제이기도 하다며 개의치 말라는 말에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것 같았다. 고소장 접수할 때 자기만 가면 되니까 나올 필요도 없고, 그들을 대면할 필요도 없다고 하셨다. 감사하다며 전화를 끊고 기자회견장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동수도 건장한 서른다섯의 한 시윤의 모습으로 회견장에 설 것이다. 스포트라이트와 기자들 인터뷰에 이골이 났을 텐데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내가 다 설명할게. 너는 사실만 말하고 빠져. 내가 피해자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래."
동수는 짧게 대답하고 나설 채비를 했다. 고맙게도 최 부장님이 우리를 데리러 와 주셨고, 지수도 함께 가기로 했다.
“서 대리, 내가 더 알아봤는데 JR엔터에서 기자에게 먼저 기사를 제공한 사람이 있었더라고. 개인신상에 관한 문제라 이름은 알려 줄 수가 없대. 서 대리가 고소하라고 한 덕에 빨리 경찰 조사가 시작되어서 다행이야. 아, 그리고, 변호사 연락 받았어. 비용 걱정 말고 진행해. 회사에서 다 지원해 줄 테니까. 서 대리니까 특별히! 다른 직원들한텐 말하지 말고. 너도나도 부탁하면 골치 아파.”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최 부장 얘기는 만사를 제쳐두고 들어 주리라. 착한 양반. 세상은 따뜻한 면도 반드시 있다. 당연히 생각해서 모르고 넘어가거나 때론 그늘에 가려져 있어서 문제지만 말이다.
기자회견장은 북새통이었다. 인기 최절정을 달리고 있는 스타의 학폭사건이다. 심지어, 영화 상영을 일주일 앞두고 있다. 사건이 터지고 영화 홍보 행사도 모두 중단되어 버렸다. 한 시윤이 가해자라는 낙인을 지워내지 못하면, 한 배우도 회사도 그와 진행했던 모든 일에 손해배상금을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전 직원의 안위가 걸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조심스러웠다. 어찌 보면 개인의 일이 누군가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해를 입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떨지말자! 나는 할 수 있다.' 속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대표님이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한 시윤 배우와 관련된 기사 내용은 다 허위이며, 매니저들의 증언에 대해서도 반박할 수 있다. 그들은 이미 무고죄와 명예훼손죄로 고소가 진행 중이며 관련 증거 자료는 경찰에 제출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허위로 한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부분에 대해 회사는 선처하지 않을 것이며 더욱 더 강경하게 대응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평소의 대표님답지 않게 강한 어조와 강단에 내가 이 회사의 직원이라는 사실이 새삼 뿌듯하고 뭉클했다. 사람이 사람을 믿어준다는 것. 그것만큼 희망적인 일은 없는 것 같았다.
대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자들의 시선과 카메라는 일제히 한 시윤을 향했다. 회사에서 법적 대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기사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 시윤은 어떠한 입장도 내지 않았기에 모두의 시선이 그의 입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 시윤은 밤새 적은 종이를 보지도 않고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학창 시절에 ADHD를 앓았습니다. 치료를 받고 좋아졌음에도 그 꼬리표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몇몇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저는 그때 작고 왜소했습니다. 그들은 떼로 몰려다녔고, 저는 그 친구들에게 늘 화풀이 대상이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그 아이들에게 맞고 있었는데 친하게 지내던 같은 반 친구가 절 가로막고 그 아이들에게 큰 소리를 내더군요. 저는 무서워서 대꾸도 못하고 맞고만 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와 내 친구를 무자비하게 때렸고, 친구는 며칠간 혼수상태에 빠져 그날의 기억을 잃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친구를 때린 가해 학생으로 지목되었고, 그 누구도 제 얘기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기자 한 명이 물었다. 질문은 따로 시간을 준다고 분명히 말했음에도 튀는 놈들이 꼭 있다.
“그럼, 이민을 선택한 건 도망으로 봐도 됩니까?”
“기자님, 그런 억측은 자제 부탁드립니다. 저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부모님은 대한민국에서는 제가 ADHD를 앓았다는 꼬리표를 떼기 힘들다고 생각하셨습니다. ADHD는 흔한 질환임에도 저는 차별을 받아야 했습니다. 친구가 의식을 찾았지만, 당시의 기억을 잃었다는 소식에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십 년 동안 숨어 지내며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바꾸고 다시 세상에 나왔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지만, 저도 그 친구도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번 영화에서 악역을 맡아 연기를 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피해자들에게 진정한 사과도 없이 후회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었습니다. 악인 연기는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켜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건 후회가 아니라 스스로와 하는 타협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후회한다는 말 한마디로 끝내는 건 모순입니다. 영화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합니다. 하지만, 그걸 덮는 사람과 반복하는 사람, 그리고 진심으로 후회하고 반성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제발,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고, 힘없는 자는 늘 당해야 하는 일은 이제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이 자리에 오기까지 힘들었는데, 그때도 용감했던 친구가 다시금 저에게 용기를 일으켜주었습니다.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때 힘이 없어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도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저는 열다섯 힘없는 중학생이 아닙니다. 더 이상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당시 서문 중학교 2학년이었던 이철민 외 4명을 고소하겠습니다. 이 나라에 법이 존재함을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기자회견은 종료되었다. 실명까지 거론되자 기자들의 타자 소리가 회견장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대표는 질문을 받지 않는 걸로 마무리지었다. 마이크는 공지 없이 꺼졌고 당연히 내가 말할 시간도 없어져 버렸다. 열다섯때 지키지 못한 우리들의 진실을 서른다섯이 된 동수는 지켜내었다. 그리고, 나도 지켜주었다. 동수는 나에게 진실을 밝힐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기사는 실시간으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철민에게 당했다는 피해자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당시 서문 중학교 선생들이 얼마나 돈을 밝혔는지에 대한 이야기들도 댓글에 달렸다. 그리고, 안민준! 안민준은 허위 사실을 유포해서 누군가의 명예를 악의적으로 오도했을 경우 엄벌로 다스려 달라는 국민 청원서를 올렸다. 당시 자신도 서문 중학교 2학년이었다고 말하면서, 이**외 몇몇 일진들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괴롭혔는지 상세히 열거하였다. 그리고, 한 시윤의 명예를 실추시킨 자들을 강력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해 달라는 말을 마지막까지 강조했다.
지수는 용감한 썸남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원탁의 기사들은 회사로 이동했고, 가는 내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표님은 인터넷 기사를 보고 계셨고, 최 부장은 운전에만 집중했다. 한 시윤과 나도 아무 말 없이 지나가는 풍경만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