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힘은 무서웠다. 그간의 상황은 대표님과 한 시윤의 더블플레이 한 방으로 역전이 되었다. 이제 이철민 일당들에 대한 신상이 인터넷상에 퍼져 나갔다. 이철민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병원까지 공개되었고, 그들이 JR엔터에서 근무한다는 사실까지 다 밝혀졌다. 한 시윤을 빼가기에 실패한 이들이 그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뒤를 캐던 중 그의 본명을 알아냈고, 그를 괴롭힌 주범이었던 그들이 한 배우의 유명세를 역이용해 매장해 버리려는 암수를 뒀다는 기사가 실시간 1위에 올랐다. 자신의 죄를 모르는 파렴치한들이라는 현란한 비판까지 더해지며 그야말로 신상 털기 경쟁이라도 붙은 것 같았다. 경찰이 필요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섬뜩하기도 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구나. 정의가 바로 잡히는 건 반가운 일이었지만 제2, 제3의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 또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 것이다. 사실을 바로 잡은 데에 감사를 느낌과 동시에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이십 년간 우리를 짓눌러왔던 과거는 이제 추억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영화는 사전 홍보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상영관에 올랐다. 무대 인사도 잠시 보류되었다. 한바탕 홍역을 치른 뒤였기에 실제로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아무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만약 흥행에 실패하게 된다면 한 시윤은 스스로 그 책임을 질 마음을 먹고 있었다. 사실이 밝혀진 마당에 도의적인 책임 따위를 운운하는 동수의 마음을 나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영화 흥행을 좌우하는 게 배우의 스캔들만은 아니지 않나? 물론,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배우의 연기력이나, 감독의 역량이나 기술, 모든 게 총망라되어 집약체로 나오는 결과물인데 하여튼, 물렁하기는 자식! 그와 반대로 지극히 현실적인 나는 속으로 노이즈마케팅 결과라도 나왔으면 하고 내심 바랬다. 내부적으로 상영을 좀 더 연기하는 게 어떻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감독은 주저할 것 없다는 강한 의지로 계획을 밀어붙였다.
대중은 한 시윤의 손을 들어주었다. 특히, 마지막 엔딩씬에 대한 극찬이 이어졌다. 시윤이가 쓰러지던 날, 감독은 각본을 수정했다. 후회한다고는 하나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희대의 악인이다. 그런 그를 이상적인 프레임에 끼워 후회하며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건 아무래도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한 짓에 대해 하늘의 벌을 받는 것으로, 그윽히 과거를 회상하며 노을을 바라보다 갑자기 쓰러지며 죽는다는 설정으로 각본을 수정했다. 진정한 피해자에 대한 사과도, 보상도 없는 후회는 하늘도 노하게 만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 신비롭게 연출되었다. 시사회도 하지 않았기에 감독과 몇몇 관계자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도대체 몇 수를 내다본 걸까? 그냥 감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름 돋는 일이다. 배우와 협의하지 않고 내용을 바꾼 거라 감독도 내심 조바심이 났던 모양이었다. 내내 한 배우의 눈치를 살피는 감독을 보니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의 감은 옳았다. 시윤이 쓰러지며 만든 영상은 바다 끝에 걸린 어스름한 노을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고, 한 인간의 피 묻은 과거를 청산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쓸쓸한 최후의 배경이 되었다. 영화사에서 무대 인사 일정을 의논하고 나오며 한 시윤은 사전 협의 없이 내용을 바꿨다며 씩씩거렸다.
“감독 앞에서는 한 마디도 못하더니, 결과적으로 좋은 게 좋은 거야. 뭐 그렇게까지 열을 내냐?”
“그래도 나한테 말을 해줬어야지, 내가 얼마나 그 장면 때문에 힘들었는지 알잖아?”
“지나간 일이고, 그 덕에 결과가 좋으니 됐어. 쓰러지긴 했잖아. 너.”
없었던 일이 아니라 받아들여졌다. 나쁜 의도가 아니었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정도 범주 안에서 인생이 변화되는 건 얼마든지 용납할 수 있는 일이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최 부장에게 연락이 왔다. 둘 다 오라니 또 무슨 일이지? 자라인지 솥뚜껑인지 이제 호출만 오면 겁부터 났다. 도착하니 회의실에 사람들이 제법 앉아 있었다. 새로운 일이라도 들어왔나? 그렇게 생각하기엔 분위기가 무겁다. 최 부장은 우리 둘에게 자리를 정해주며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자리에 앉자 건너편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 너는.”
내가 먼저 알아보았다. 내 앞에 이철민, 옆에 강태호가 있었다. 이십 년이 지났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사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동석해 있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최 부장님, 무슨 일인지 설명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몸으로 반응할 동안 동수는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사과하러 왔대. 일단 너희 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불렀어. 원하지 않으면 그냥 가도 돼. 뒤는 내가 알아서 할게.”
최 부장은 분을 참느라 애쓰는 거 같았다. 하긴, 그동안 마음고생한 게 다 이 인간들 때문이니 그도 화가 나는 게 당연지사였다.
“저는 사과 필요 없습니다. 서 지은 너는 어때?”
나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애초에 사과받을 생각도 없었다. 동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기자회견 당시 말했던 것처럼 법대로 처리할 겁니다. 다시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전해 주세요, 부장님.”
한 시윤은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그러자, JR엔터의 이사라는 사람이 급하게 말을 꺼냈다.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희도 정말 몰랐습니다. 이 바닥 잘 아시지 않습니까? 긴 말 하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합의라도 좀 해주십시오. 한 배우님!”
“합의라...... 그전에 하나만 물읍시다. 이사님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셨습니까?”
“네. 그럼요. 저는 몰랐어요. 이 친구들 말만 믿었죠. 이렇게 한 배우님에게 뒤집어씌웠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아니요, 그거 말고. 어떤 이유든 한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런 개수작을 부렸던 사실 말입니다. 진실을 알았던 몰랐던 이사님도 동조하신 거 아닙니까?”
이사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법부터 배우셔야겠습니다. 저희 대표님과 부장님께 한 수 배우고 가시지요. 저는 이만.”
한 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나왔다.
“그래도 걔들 사과는 받지 그랬어.”
“걔들이 진심으로 사과할 거 같아? 그 아이들은 상대에게 수그리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자랐어. 다시 우리 찾아오는 일도 없을 거야.”
한 시윤의 말이 옳았다. 이사라는 사람은 강태호의 삼촌이었고, 합의라도 했다는 기사를 내보내면 여론이 잠잠해지는 동시에 감형까지도 계산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사람이니 그들도 사람일 줄 알았다는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 마음이 나처럼, 우리 평범한 이들의 그것처럼 선하다면 세상은 좀 달라질까?
첫 영화 무대 인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1년이 넘도록 한 시윤의 매니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사건 이후, 한 시윤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드러나며 매니저를 하겠다고 지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하지만, 한 시윤은 별의별 이유를 다 대며 한사코 다른 매니저를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한 배우님, 이제 저 말고 다른 매니저 찾으시죠?”
“서 매니저님 같은 분이 없는 걸 어떻게 해요. 일을 너무 잘하니까 어쩔 수가 없잖아요.”
“야, 이 자식아. 너 지금 장난하냐?”
“어머나, 배우한테 협박을! 회사에 바로 말해야겠다.”
“어, 제발. 말해주라. 나 좀 잘리게.”
“왜 이러세요, 매니저님. 일단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고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까요? 루카스가 맛있는 거 해준대.”
나를 언제 이렇게 다 파악했지? 먹는 거 앞에서 무너지면 안 되는데 말과 다르게 내 발은 이미 2층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 뒤로도 종종 왔기에 나는 루카스와 간단히 '올라' 정도로 인사까지 나누게 되었다. 물론,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지만 말이다. 늘 반갑게 맞아주는 좋은 분이다.
“루카스 씨는 항상 밝아. 옷차림도 나이보다 캐주얼하고.”
“루카스를 도대체 몇 살로 보는 거야?”
“마흔은 넘어 보이는데?”
“하하하, 루카스 들으면 기절하겠네. 이제 서른이야. 외국 애들이 좀 나이 들어 보이는 거 같기도 해. 머리도 빨리 빠지고.”
“어쩔.... 진짜 충격이다. 최근에 들은 말 중에 제일.”
“못 말려, 넌 맥주 마실 거지?”
“아니오. 대배우님, 오늘 위스키 한 번 쏘시죠?”
“왠일이야? 매일 맥주만 찾더니. 나 마시던 거 보관해 둔 거 있는데 그거부터 마셔볼래? 비싼 거야.”
“비싸다고? 그래. 그거 먹자.”
‘속물근성. 아무 때나 좀 나오지 말자. 응?’
“근데, 너 내가 준 선물은 안 하고 다닐 거야?”
“뭐 말이야? 네가 나한테 무슨 선물을 줬다는 거야?”
“얘 봐, 작년 네 생일 때 너희 집 현관에 놓고 온 거 말이야.”
“아~~~~~~ 귀걸이. 너무 쪼그매서. 지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수는 벌떡 일어나며 그걸 지수를 주면 어떡하냐고 난리다.
“아니, 지수 줄려고 하다가 내가 갖고 있다고. 조그만 거 하나 줘놓고 웬 소란이야.”
“야! 그거 다이아야! 나도 큰 맘 먹고 산 거거든?”
“다이아라고? 이게?”
나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귀걸이를 꺼냈다. 그리고 안 보고도 척척 귀에 걸었다.
“뭐야, 너. 들고 다녔어?”
“응, 들고 다니기 좋잖아. 작아서 잃어버릴까 봐 겁나서 하고 다닐 수가 있어야지. 남자한테 이런 거 받아본 적이 없거든. 뭐, 너도 남자는 남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