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수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동수가 아껴둔 위스키를 다 마시고, 새로운 위스키를 주문했다. 맥주나 먹던 위장에 위스키가 들어가니 난리법석이다. 그래도 비싼 술이 좋긴 좋다. 취하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지난 얘기들을 하다 보니 루카스도 퇴근하고 싶었나 보다. 슬슬 접시를 치우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그냥 뒀다간 집에 가긴 틀렸다 싶었으리라.
“이제 가자. 루카스도 집에 가야지.”
나는 동수를 채근하며 일어섰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내일 일정도 없는데 2차 가야지.”
“지금 시간에 문 연 데가 어딨어. 벌써 새벽 3시야.”
“문 연데 있어, 따라 와.”
나도 아쉬웠다. 지난 이십 년을 서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얘기하는 게 재미가 있었다. 나는 별 이슈가 없었지만, 동수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스페인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건 쉽지 않았고, 거기서도 차별은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운동을 선택했고, 스페인어며 영어를 미친 듯이 공부했다고 했다.
바르셀로나 대학 졸업을 얼마 앞둔 때였다고 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조깅하다가, 어떤 남자와 부딪혔다고, 자기도 모르게 한국말도 괜찮으시냐 묻고 그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데, 그 남자는 괜찮다는 말대신 한국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며 명함을 내밀었단다. 이런게 운명이라는 건가? 그가 최부장이었다. 처음에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두려워서 몇 번을 거절했지만, 최 부장이 예정된 귀국까지 늦춰가며 끈질기게 설득했고, 그 정성에 넘어갔다고 했다. ‘최 부장님 은근히 이런 매력이 있단 말이야. 딸이랑만 좀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 텐데.’ 얼마 전에도 만취해서 한 시간 가까이 외동딸 뒷담화를 했던 양반이다.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하는 딸바보면서 말이다. 술에 취해 내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동수의 뒤를 따랐다. 도착한 곳은 동수네 집이었다.
“야, 너희 집이잖아. 여기서 무슨 술을 마시냐?”
“왜 우리집에서 몇 번 마셨잖아.”
“그땐 지수도 있었고 지수 남친도 있었고,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너랑 나랑 둘만 있으면 오해받아.”
“내가 얘기했지? 너랑은 아무 스캔들 안 난다고. 들어와.”
틀린 말을 안 하니 따를 수밖에. 여기까지 와놓고 홱 돌아서 가는 것도 모양 빠지는 일이다. 일 때문에 자주 들어오긴 했지만, 다시 봐도 잘해 놓고 산다 싶다. 톱스타니까 한강 뷰 집도 있고, 건물도 있는 거겠지. 조그만 내 아파트. 불공평하단 생각이 들다가도, 유명인으로 사는 삶도 결코 좋아 보이진 않았다. 나는 억만금을 준대도 못한다고 이미 결론낸지 오래다. 역시 나는 평범한 게 좋다.
“동수야, 맥주 있어?”
“어, 있어. 맥주 마시게?”
“응,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안 어울리게 위스키는 무슨, 맛봤으니까 됐어.”
“자, 이거 입어.”
동수가 내민 옷은 내 2XL 트레이닝복이었다.
“이거 네가 들고 갔었어?”
“세탁해서 주려고 그랬지. 네 거니까 네가 입고 가면 되겠다.”
“그래. 나 살쪘을 때 입던 거다. 내 입으로 들으니까 이제 속이 시원하냐? 그리고, 이제는 안 맞다고!”
“그럼, 이거 내가 입는다? 그리고, 넌 살쪄도 괜찮아. 중학교 때도 뚱뚱했어.”
“아니야, 뚱뚱이 아니라 통통.”
“떡볶이 2인분 순식간에 해치우는 거 보고 크게 될 아이다, 생각했지.”
“이 녀석 보게. 남의 치부를 건드시겠다?”
“하하하, 농담이야. 잘 먹는 거 부러웠어. 나는 입이 짧았잖아. 지금도 하루 종일 굶을 수도 있어. 어쩌면 그 덕에 이 생활 버티고 있는지도 몰라.”
그의 하루를 다시금 돌아보았다. 늘 다른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인생. 무엇때문에 저렇게까지 열심히 사나? 의문을 가졌던 적도 있었다. 작품도 골라가며 해도 될 만큼 자리를 잡았는데 일에 미친 사람처럼 들어오는 일은 마다하지 않았다. 여유라고는 없는 삶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의 집도 그의 건물도 다 부질없어 보였다. 비록 대출이 있어도 작지만 소중한 내 집, 그 와중에 30평대로 옮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욕심은 한계가 없는 모양이다.
“매니저님, 이거 한번 봐주실래요?”
“뭔데, 이러실까? 나 한 번씩 너 존대할 때 오싹한 거 알아?”
“오싹 까지야.”
“또 무슨 사고를 쳤길래 그러나 싶어서 말이죠. 배우님.”
“그런 거 아니야. 한 번 봐.”
사업계획서처럼 보였다. 본 건물과 부속 건물. 부지가 대략 몇 평이고 어쩌고 너무 많아서 한 번에 보기가 힘들었다.
“잠깐 이게 다 뭐야? 너 사업하려고? 연예인 폭망 1순위가 사업이야. 미쳤나봐.”
“잘 읽어 봐. 그렇게 성질이 급해서야....”
사업이 아니라고? 나는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었다.
<집밖 청소년 지원 사업> 본 건물은 청소년 쉼터로 사용하고 부속 건물은 도서관 및 교육장소로 활용한다. 어쩌고, 저쩌고. 소외된 청소년을 위한 장학재단을 설립한다. 재단의 이름은 한서 장학재단으로 명명하며, 어쩌고, 저쩌고........
“장학재단 설립? 이거 네가 한다고? 그 일 때문에 그래? 이제 다 밝혀졌잖아. 또 사람들 입방아에 오를 거야. 착한 척 한다고.”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건 내가 장담해. 이 일은 내가 열심히 일하는 궁극적인 목적이야. 네 도움이 필요해.”
“이런 쪽으로 아는게 없는데 내가 뭘 도와. 그리고, 이런 거 하려면 엄청 복잡할 텐데, 사람도 많이 필요하고.”
“그건 걱정은 하지 마. 민준이가 뜻있는 사람들 모아본댔어.”
좋은 일을 한다는 데 말릴 건 아니지만, 매니저인 내가 모르는 일을 벌이고 있었다니... 갑자기 술맛이 떨어졌다. 미리 말했어도 될 일인데 싶어 서운함이 몰려왔다. 가방을 챙겨서 집에 가려고 일어섰다. 깜짝 놀란 동수는 내 앞을 가로막고 왜 그러냐고 물었다. 서운함은 순식간에 폭풍우가 되었다.
“나 너 매니저 맞니? 이렇게까지 일이 진행될 동안 내가 전혀 몰랐다는 게 말이 돼? 대충 봐도 부지 계약도 이미 끝났고, 삼분의 일은 진행된 거 같은데...... 잠자는 시간 빼고는 거의 붙어 있었어. 나 내일부터 너 매니저 안 해. 그렇게 알아.”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그 사건 이후로 서로 많은 걸 공유했다. 그래서 더 배신감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일로 만난 사이, 그 이상은 아니었구나 싶어 속이 상했다.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서는데 동수가 막아섰다.
“너 꼼꼼하게 안 봤지?”
“무슨 소리야. 꼼꼼하게 봤거든.”
“그럼 재단 이사장이 누구야?”
“너겠지? 말이라고 해.”
“이거 봐,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제대로 안 봤잖아. 다시 봐.”
동수는 서류를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 어디에도 한 시윤, 박동수는 없었다. 그리고, 장학재단 이사장은 서 지은. 내 이름이었다.
“이거 맡아 운영해 줄 사람, 너밖에 없어. 십 년 전부터 생각했어. 최 부장님 만나러 사무실 왔다가 우연히 너를 보자마자. 그때부터 이 꿈을 키워왔어. 내가 힘들 때 너는 모른척하지 않았잖아. 그런 사람이 제격일 거 같았어. 그래서 악착같이 일해서 돈부터 모아야겠다 생각했어. 일단 어느 정도 귀찮은 것들 처리하고 너한테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말 안 한거야. 그리고, 이미 최 부장님께도 말씀드렸고... 아까운 인재를 보내야 한다고 많이 속상해하셨지만, 그런 이유라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겠대.”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딸 때문에 전화했을 때 내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었다. ‘이 양반이 술 많이 드셨네.’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속상하다가 이내 얼떨떨했다.
"내가 이런 걸 어떻게 해. 난 못해. 자격 없어.”
“너밖에 없어. 서지은.”
나는 대답 없이 동수의 집을 나왔다. 내 남자 찾기 프로젝트는 엉망진창이고, 난데없이 장학재단이라니, 인생이 이렇게 꼬여도 되는 건가? 지수한테 전화하고 싶지만 한참 자고 있을 시간이다. 조금 있으면 버스가 다니겠지... 정류장까지 무작정 걸었다. 술이 깨면서 환상인지 현실인지 더 모호해졌다. 지금까지 겪은 모든 게 어쩌면 모두 꿈이었던 건 아닐까? 평범함을 쫓아 여기까지 왔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이 어쩌면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망상까지 들었다.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살펴보았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연락처엔 고작 백여 명의 전화번호, 그것도 필요 없는 전화번호를 삭제하면 서른 명이 될까 말까 했는데 지금 연락처엔 천 개가 넘는 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아침이 밝아오면서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내 인생도 저 가로등처럼 서서히 꺼져 버릴 것 같았다. 평범한 남편, 평범한 가정, 평범한 엄마, 내가 바라던 것들과 자꾸 멀어지고 있다.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나는 한 시윤의 매니저를 그만두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잘렸다. 마케팅 부서로 돌아왔고, 원래의 평범한 삶을 다시 찾았다. 속시원하면서 허전했다. 잠시 맛본 그들의 삶은 매력적이었다. 물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들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깨달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기다렸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 사이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이철민과 강태호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허위 사실을 사이버상에서 유포해서 가중처리되었다고 했다. 나머지 아이들은 이 사건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판단으로 수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악질 악플러들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3년의 형을 받았다. 나의 민사재판은 여전히 진행중이고 말이다.
사람들은 다시 나를 찾아왔고, 쉬는 시간이면 그들의 고민이나 걱정을 들어주고 위로해 주었다. 예전엔 그럴 때마다 느끼는 불편한 쾌감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다른 감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겉으로만 공감했던 지난날보다 더 열심히 듣고 더 진지하게 의견을 건넸다. 그러고 나면 나또한 누군가에게 어루만져진 듯한 느낌이 들면서 허한 마음이 조금 채워지는 거 같았다. 남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줄 뿐인데도 말이다.
추워서인지 옥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벤취에 혼자 앉아 나른한 오후의 태양을 만끽하고 있었다. 벌써 12월이다. 내 서른다섯도 이제 곧 끝난다. 한 살 더 먹는 것 보다 서른다섯이 의미 없이 지나가는 게 더 서글펐다.
“왜? 무슨 고민 있어?”
“깜짝이야! 부장님 축지법 쓰세요? 기척이라도 좀 내고 오시든가. 간 떨어질 뻔 했네.“
어느새 왔는지 최부장이 옆에 앉아 있었다.
“네가 넋이 나가 있어서 그런거지~ 사람이 옆에 앉는지도 모르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내가 아무리 눈치는 없어도 지금 네 얼굴이 ‘나 고민 있어요.’ 하는 건 알겠는데 뭘.”
'딸내미 눈치나 좀 살피시지.' 하마터면 입밖으로 내뱉을 뻔 했다.
"나의 서른다섯이 이렇게 지나가는 게 억울해 죽을 거 같아서 그래요. 됐어요?”
최 부장은 껄껄 웃었다.
“서대리, 나는 오십이 넘었어. 마흔 넘어봐라, 숫자 세는 것도 의미없어. 서른다섯이면 좋을 땐데, 그게 뭔 걱정이야.”
“부장님은 결혼도 하셨고, 이쁜 사모님에 토끼같은 따님도 있고, 심지어 강남에 아파트도 있잖아요!”
“결혼해서 집 있고 애 있음, 다 가진 거야?”
“없는 사람의 마음을 몰라서 그래요. 부장님은.”
“내가 지금 서른다섯이면 이러고 안 있어. 이제 나이 먹어서 뭔가 도전하거나 시작하는 게 두려워, 어렵다고. 얼마나 좋은 나이야? 철들어서 알 거 다 알고, 무엇보다 아직 젊고! 뭐든 다시 하기 딱 좋은 나이지. 시윤이는 너만 기다리고 있던데 재단 일은 왜 안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
“아무나 하나요. 그런 일을. 전 성질도 급하고, 이타적인 사람도 아니에요. 착한 척하고 살고 있을 뿐이에요. 다들 저한테 속은 거라고요. 자격미달이에요.”
“하하하, 서 대리야, 아니, 지은아. 사람들이 바보냐? 너는 네가 가진 힘이 뭔지 아직 모르나보다.”
“제가 무슨 힘이 있어요. 남친도 없고, 빽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요.”
“너 말이야. 너! 백만 불짜리 귀! 열린 마음, 그리고, 용기!”
“아이고∼!!!! 또 포장하신다. 부장님 덕분에 기분이 좀 좋아졌어요. 자자, 내려가시죠.”
나는 더 말해봐야 낯 부끄러운 소리밖에 못 들을 거 같아서 황급히 대화를 종료하고 싶었다. 하지만, 최 부장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농담 아니야. 사람들이 너를 왜 찾는다고 생각해? 말할 데가 없어서? 너한테 말하고 나면 치유가 되거든, 마음이 풀린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너는 남들이 안 가진 힘을 가졌어. 널 좀 다르게 봐. 고소장 접수하라고 당차게 말하던 서지은. 그것도 너잖아. 이렇게 쭈그러져 있는 건 안 어울려. 이런 얘기 백날 해봤자 니 귀에 들어갈리는 없겠지만.... 아참, 시윤이가 자기 전화 씹는다고 나더러 전해달래, 전화 좀 해달라고. 웬만하면 동창인데 통화는 좀 하고 지내라. 먼저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