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아무도 모른다

마지막회.

by 열정아줌마

최 부장이 떠나고 나는 한참을 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장학재단 설립하기로 프로젝트 이름을 바꿔야 하나?’ 어느새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애써 나는 적임자가 아니라고 부정했을 뿐이다. ‘내가 감히’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사람들이 비웃을까봐 두려웠다. 망설이고 고민해봐도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어차피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기도, 내 남자 찾기도 틀려먹었다. 갈 곳 잃은 아이들의 어머니, 아니 이모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만드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꿈꿔왔던 작고 평범한 소망을 내려놓고 부재중 전화를 눌렀다. 신호가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기다렸다는 듯 동수는 전화를 받았다.

“통화 가능해?”

“당연하지, 네 전화 기다리다가 목 빠질 뻔했다. 우리 만나자.”

“그래, 만나자. 저녁에 시간 돼? 6시 반쯤?”

“응, 가능해. 어디서 볼래?”

“처음 만났던 거기.”

“알았어. 이따 보자.”

최 부장의 말을 되새기며 나는 누구에게 내 고민을 나눌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보니, 한 번도 내 고민을 누군가와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 지수와 나눈 이야기들도 서로의 내면의 고민이나 미래의 구체적인 인생에 대한 것들은 아니었다. 현재 닥친 일들, 늘 하루만 사는 사람처럼 허덕거리며 버텨왔을 뿐이다. 10년 뒤를 내다보며 계획을 잡는 일 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재수없어. 박동수.'

곰곰이 생각하다가, 불현듯 할마카세의 따뜻한 음식들이 떠 올랐다. 계란말이와 골뱅이.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찌개. 그것들을 먹다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퇴근하자마자 이제 주소 없이도 갈 수 있는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동수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오면 바로 먹을 수 있게 미리 와서 주문해 놓고 있었나 보다. 지난 일 년간 잊고 살았던 이십 년의 시간보다 더 많은 이야기와 추억들이 생겼다.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늘어 갔고,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은 배려라는 최상의 인품으로 발전되어 갔다. 가끔 지나쳐서 오해가 있을 때도 있지만 말이다. 이번 일처럼.

“차 안 막혔어? 빨리 왔네?”

“지하철 탔거든?”

“아! 그랬구나.”

“야, 똥 마려운 강아지냐? 내 눈치 보지 마.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동수는 말없이 내 술잔에 소주를 부어 주었다. 말없이 마시다가 젓가락이 둘 다 같은 계란말이 조각에서 마주쳤다.

“너 먹어. 내가 이거 먹을게.”

나는 다른 계란말이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역시 맛있단 말이야. 나중에 할머니한테 비법 좀 물어볼까? 가르쳐 주시려나?’

“넌 이런 사람이야. 늘 남이 우선인.”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너밖에 없어. 재단 이사장 할 사람. 아무한테나 맡기고 싶지 않아.”

나는 다른 계란말이 하나를 더 입에 넣었다. 그리고, 소주 한 잔을 털어 넣고,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한다고!! 잘 못 되더라도 난 모른다. 나한테 책임지라고 하지 마.”

“안그래. 그리고, 너는 잘 할거야. 난 널 믿거든.”

“그 말이 더 무섭다. 아휴, 내가 이십 년 전으로 돌아가면 너랑 친구를 안 할 텐데. 타임머신 좀 구해 봐라.”

내가 뭐라 말하든 동수는 핸드폰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자식이 진짜 확!!!’


나는 소주를 마시고, 할머니가 끓여내 온 찌개(동태찌개였다)를 먹고, 골뱅이에 소면을 돌돌 말아 음미하고 있었다. 잠시 뒤, 가게로 지수와 민준이가 들어왔다.

“야, 너 하기로 했다며. 잘했어.”

지수는 들어오자마자 호들갑을 떤다.

“공무원님이 보시기에도 제가 재단 이사장이 될 상입니까?”

“지은님 밖에 없지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다들 한통속이었다. 내가 결정을 못 하고 방황하고 있는 동안 일은 제법 더 진전이 있었다. 한 배우는 전면에 나서지 않기로 했다. 그건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선행하는 척하는 연예인이 될 생각은 1도 없었다나 뭐라나. 어쨌든 자금은 한 배우의 기부로 대부분 운영이 될 것이고, 뜻있는 사람들의 후원도 받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7급 공무원 민준이가 인맥들을 동원해서 뜻 있는 사람들을 이미 섭외하고 꾸려 놓았다. 얼마 전 사회복지사가 되겠다며 회사를 관둔 친구까지도.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면 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안 할 수가 없네. 허가는 난 거야?”

“행정사에서 곧 서류 접수할 거야. 네 대답이 없어서 기다렸지. 우리 모두 조마조마하던 중이었어. 이사장 맡게 되면 회사는 그만둬야 하고. 또.........”

민준이는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해 준다. 소외된 청소년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학업이 계속될 수 있게 지원하는 사업이다. 일반적인 행정 업무는 전문가를 고용할 거니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아이들을 보살피고 보듬어 주는 일, 그게 나의 제일 중요한 일이란다. ‘젠장, 애도 안 낳아봤는데 그 마음을 어떻게 헤아리냐고.’ 나는 계속 술을 마셨다. 지수와 민준이는 심야 영화를 보러 간다며 먼저 자리를 떴고, 나는 같은 자리에서 계속 동태와 소주와의 궁합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랑 우리집에 좀 가자.”

“그만 말해도 돼. 알아들었어.”

“아니, 줄 게 있어. 오늘 꼭 받아 가야 해.”

“꼭 오늘이어야 해? 아직 계란말이 남았는데.”

“많이 마셨어. 일어나자.”

동수에 손에 이끌려 그의 집으로 들어섰다.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방향제 향 좋네.”

동수는 대답도 없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제 맘 대로야,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 서 지은!’ 나는 내 머리를 때리며 앞으로 닥칠 일들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제 되돌릴 수도 없다. 나는 결혼해서 애낳고 알콩달콩만 하면 되는데. 이게 뭐람. 그때 내 눈앞에 꽃다발 하나가 둥둥 떠오는 게 보였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 하기로 한 이상 열심히 할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나 한국 들어올 때부터 목표는 하나였어.”

“그래, 알아. 그거 이제 하잖아. 재단 내가 맡는다고. 그만 말해도 된다니까.”

“아니, 그거 말고.”

“뭐? 또 있어? 미치겠네. 또 뭘 해야 하는데? 아프리카라도 가야 하니?”


“아니, 너 말이야. 내 최종 목표야. 네 남편 되는 거.”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내 프로젝트가 들켰나? 혹시 술김에 내가 말한 적이라도 있나? 그런 일은 없었는데, 장난 그만하라며 웃어넘겨야 하는데, 웃어야 하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 이 녀석 좋아하고 있었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 그냥 친구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문득 다른 감정이 들면 절대 안 된다고 밀어내 버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는 줄도 모르고... 눈물인지 콧물인지 범벅인 채 멀뚱멀뚱 서 있는 내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는 동수를 보았다.

“잃어버리면 또 선물해 줄게. 매일 끼고 다녀.”

‘응, 매일 끼고 다닐게. 매일’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평범한 서른다섯의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약속한다. 나는 서른여섯이 되기 한 달 전에 평범한 결혼 생활을 꿈꾸는 예비 신부가 되었다. 평범해야 한다는 내 삶의 정의는 그렇지 못한 와중에 평범함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 평범함이라는 것도 어쩌면 내가 만든 프레임일 뿐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대한민국 여자다. 한녀라고 곡해하고 비하했던 건 나 자신이었다. 불안해하고 걱정한다고 미래는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 그냥 나답게 하루하루 열심히 살자. 그러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삶이 내 손에 쥐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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