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계획일 뿐이다

by 열정아줌마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난항이다. 올해 안에 남자를 만나 1년간 연애를 실컷 한다. 서른여섯 안에 결혼하고 늦어도 마흔 전에 아이를 낳고... 이 순서대로 가야 하는데 이미 서른넷 하고도 3개월이 지났고, 꽃 피는 봄이 찾아왔는데도 내 인생의 꽃은 도대체 언제 피려나 기척도 없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 손은 키보드 위에 올려만 둔 채 머릿속은 온통 내 남자 찾기 프로젝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기척에 돌아보니 최 부장이 내 책상 옆에 서 있다.

“깜짝이야. 부장님, 무슨 일이세요?”

“땅 꺼지겠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사람이 와도 몰라? 너 지금 시간 있어? 잠시 면담 좀.”

“왜요? 무슨 일인데요?”

최 부장은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듯 손짓으로 나를 이끌었다. 최 부장과는 꽤 친하다. 아니 전 직원들과 두루 친한 나는 항상 그들의 은밀한 사생활까지도 듣게 되는 일종의 대나무숲 같은 존재다. 나의 필살기라고나 할까? 귀는 열고 입은 닫는다. 하지만, 이렇게 심각한 표정은 이례적인 일이라 사뭇 걱정스럽다. ‘사춘기 딸이 또 속을 썩이나?’ 혼자 고민하며 옥상까지 한달음에 쫓아 올라갔다.

“부장님, 왜요?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심각해요?”

공손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최 부장의 눈을 응시하며 물었다.

“서 대리한테 부탁할 게 하나 있어서.”

‘그럼 그렇지. 이번엔 좀 어려운 부탁인가 보네.’

“뭔데요?”

“한 시윤 있잖아.”

“한 시윤 배우님요? 왜요? 스캔들이라도 났어요?”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하루 이틀이어야 말이지. 우리 회사 골칫덩어리이자 판매 1위 한 시윤. 나도 벌써 여기 밥 10년 찬데 그 정도는 껌이지.’

“혹시나 했는데, 어떻게 해요? 언론에 보도문 내야 해요?”

“아니, 그건 대충 무마됐어. 본인이 아니라고 인스타에 직접 올렸더라고. 그 문제가 아니라…. 너 보직 변경 좀 하자.”

“갑자기요? 부장님,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알려 주시면 시정해서 더 잘해보겠습니다.”

나는 왠지 모를 불안함에 최 부장 바짓가랑이라도 붙들어야 하나 고민에 휩싸였다.

“아니야, 서 대리. 서 대리만큼 성실한 사람이 어딨어서. 그런 게 아니라, 서 대리가 매니저 부서로 옮겨서 한 시윤 전담 매니저를 좀 해줘야겠어. 그 자식 매니저를 아무도 안 하려고 하잖아. 내가 오늘 하루 종일 알아보고 다녀도 마땅한 사람이 없어. 그렇다고 새로 사람을 뽑기도 그렇고. 뽑는다고 얼마나 가겠니.”

“네?? 마케팅만 해 온 제가 갑자기 매니저가 되는 것도 한 배우님께 좋을 건 없을 거 같은데요. 폐만 될 거 같은데.”

“무슨 소리, 너 운전 잘하고, 성실하고, 영민하고, 싹싹하고, 아직 결혼 안 해서 애도 없고, 이거 성희롱 아니다. 오해하지 마. 배우 스케줄이 너도 알다시피 밤낮이 없잖아. 회사 10년 차니 누구보다 이 바닥 사정 잘 알 거고. 그렇다고, 한 시윤 다른 데 보내기엔 우리 회사 손해가 너무 커. 수당은 정확하게 챙겨줄게, 인센티브까지. 너만 한 사람이 없다. 서 대리. 부탁 좀 하자.”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오도카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서 대리, 그렇게 하기로 한 거야. 1년만 고생해 주라. 그전에 다른 매니저 찾아볼게. 부탁해!!”

후다닥 뛰어 내려가는 최 부장을 보면서 나는 얼음이 되어 버렸다. 그때 후배 하나가 다가와 땡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엘사 공주가 됐을지도 모른다.

“선배, 한 시윤 매니저 맡기로 했다면서요? 고생길이 훤하네. 어쩐대요?”

이 회사는 소문 하나는 기막히게 빠르다. 그러니 조심하고 살 수밖에.

“지금 불난 데 기름 붓니? 김 주임, 네가 맡으면 안 될까?”

“에이, 나는 매일 싸울걸요? 남자들한테는 찬바람 쌩쌩이예요. 소문 들어서 선배도 알잖아요. 선배처럼 착한 사람이 해야 해요. 선배 말고는 할 사람 없어요. 우리 회사 내에는.”

‘나 안 착하다고 이놈아!’

거절 못 하는 이 지랄 같은 성격 때문에 나는 우리 회사 최고 골칫덩어리 한 시윤의 매니저가 되어야 했다. 아니, 되고 말았다. 평범한 내 남자 찾기 대회는 이대로 물거품이 되어 간다. ‘안녕, 내 남편아. 내 미래야….’


회사라는 곳은 참으로 조직적이고 빠르다. 나는 오케이라는 단어 한 마디 내뱉은 적이 없는데 인사 발령은 초고속으로 이루어졌고, 최 부장의 제의를 받은 당일, 나는 매니저 부서로 보직 변경되었다. 심지어 한 시윤 전담 매니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배우의 일거수일투족 따라다녀야 하고, 예의주시해서 불미스러운 일은 사전에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집순이 스타일인 내가 외향적인 일을 해야만 한다. 시작도 전에 겁부터 났다.

조만간 사표를 내야 할까 보다. 마음속에서 이미 회사가 떠나가고 있다. ‘10년이고 나발이고 갑자기 매니저라니 내가 가당키나 하냐고. 아, 대출. 젠장. 집을 괜히 사 가지고.’ 과거의 나 자신을 탓하며 사표는 다시 간 밑, 췌장 옆 어딘가에다가 조용히 밀어 넣었다. 매니저들과 꽤 친하게 지내는 나는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제 그걸 서른넷이나 먹은 내가 해야 한다. 내 마음 따윈 개의치 않고 최 부장은 일사천리로 한 시윤과 나의 업무상 미팅 자리를 주선했다.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테니 서로 친해지라는 의미라며 주소를 카톡으로 보내준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다고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는 나와 한 시윤 그리고, 최 부장 셋의 술자리를 만들었다. 최 부장이 술을 마시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하, 첫 단추부터 엉뚱한 데서 끼워지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최 부장이 알려 준 주소지를 택시 기사님께 말하고 뒷좌석에 등을 기대앉으며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고급 일식당이겠지. 가는 내내 내 돈 주고 절대 못 가는 곳이고, 이왕 가는 거 실컷 먹어야지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속물근성에 들뜬 나머지 첫 단추는 그냥 급하게 끼워 넣어 버렸다. 나는 어나더 레벨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고급 세단 또는 스포츠카를 타고 와서 입구에서부터 풍기는 부내를 맡으며 지정석으로 안내를 받는다. 고급술과 오마카세로 차려지는 음식들을 대접받고, 그들이 불러주는 대리기사에게 몸을 맡기고 한강이 보이는 집으로 돌아가겠지.

한참 그들만의 세상을 상상하며 고급 음식에 입맛을 다시고 있던 나는 택시 기사가 내려준 곳에서 한참을 서성거려야만 했다. 후미진 골목이다. 심지어 인기척도 없다. 주소가 맞나 싶어 구글 지도를 펴봤는데 주소는 정확했다. 카오스 속에서 헤매고 있는데 때마침 최 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착했어?”

“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해요?”

“너 서 있는 데서 골목으로 조금 올라와. 그럼, 오른쪽에 간판 없는 식당 하나 보일 거야.”

‘요즘 한 테이블만 받는 식당들이 있다더니? 최 부장 센스 보소!’ 잔뜩 기대하고 들어간 곳은 테이블 두서너 개가 대충 놓인 노포였다. 30년은 지났으려나?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시작부터 불길하다. ‘고급. 일식. 오마카세. 그럼 그렇지. 내 인생에 무슨.’ 들어가니 최 부장 혼자 소주잔을 털어 넣고 있었다.

“잘 찾아왔네. 이리 와서 앉아.”

한 번 닦고 앉아야 할 것 같은 낡은 의자다. 깔끔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이런 곳은 익숙하지 않다. 대충 엉덩이를 걸치고 앉는데 한 시윤이 들어왔다.

“부장님, 일찍 오셨네요. 저도 서둘렀는데.”

“어서 와.”

두 사람은 앉자마자 빈 잔에 술을 채우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뭐지? 나 투명 인간이야?’ 잠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던 나는 존재감이라도 알려야지 싶어 헛기침을 했다.

“아, 맞다. 우리 서 대리. 소개한다는 게 시윤이랑 사석에서 오랜만이라, 서 대리 미안해. 둘 다 처음 보지?”

“네, 처음 봐요.”

“아뇨, 알고 있어요.”

나와 한 시윤은 동시에 대답했다. ‘나는 처음인데 너는 나를 어떻게 안다는 거니?’ 어안이 벙벙한 채 나는 한 시윤을 바라봤다. 히죽히죽 웃는데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시윤이가 서 대리를 알아? 마케팅팀에 갈 일이 없었을 텐데. 매니저들은 알지만.”

“저도 배우님 매니저는 잘 알아요. 한 배우님은 처음 뵙는데…(도대체 네가 나를 어떻게 안다는 거야?)”

“아, 모를 수도 있겠네요. 하여튼 저는 예전부터 알아요.”

‘이 새끼가 갈수록 알아듣기 힘들게. 안 그래도 부서 바뀌어 열받고, 오마카세 아니라 열받고, 지금 분화하기 일보직전인데, 저 기분 나쁜 면상이 대체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슬슬 터지려는데 최 부장이 살짝 내 스팀을 봤는지 잽싸게 말을 이었다.

“아니, 오래전부터 안다니, 나 모르는 비밀이라도 있는 거야?”

“비밀은 무슨. 중학교 동창이에요. 얘는 모르나 보네. 하긴 이름도 바꾸고 얼굴도 살짝 손봤으니까 못 알아볼 수도 있죠. 나는 대번에 알겠던데.”

‘기억해 내 서 지은! 쟤가 말하는 게 사실인지!’ 기억해 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안갯속으로 빨려드는 기분이었다. 존재감조차 없이 다닌 학교인데 나를 알아보다니 그럴 리가 없다.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던 그때 할머니가 내주시는 안주들이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지기 시작했다. 메뉴판도 없다. ‘아, 할마카세. 여기가 그런 곳인가 보네.’ 나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좀 전에 한 시윤이 한 말 따윈 이미 지나간 과거일 뿐. 내 앞에 놓인 음식들은 현재였다. 사회성을 장착하고 먼저 한 잔씩 따른 다음 잘 부탁드린다는 말과 함께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계란말이를 시작으로 안주 폭격을 시작했다. 고급 오마카세 따윈 잊은 지 오래다. 투박한 음식들이 주는 묘한 정감이 변화무쌍했던 나의 하루에 큰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다. 입에 음식을 한껏 넣다가 싸한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둘 다 팔짱을 낀 채 넋 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맛있냐?”

최 부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하며 젓가락을 든다.

“마시써요.”

잠시 정신을 놓았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입에 있는 걸 다 삼키지도 못하고 우물거리며 대답하는데 한 시윤이 큰 소리로 깔깔거린다.

“넌 어쩌면 하나도 안 바뀌었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나는 입안에 가득 찬 음식들을 급히 식도로 밀어 넣고 물었다.

“그나저나 저를 어떻게 안다는 거예요?”

“동갑인데 말 놓지? 동창이고 말이야. 너 서문 중학교 다녔잖아. 아니야?”

“맞는데, 그러니까 네가 누구냐고요?”

“나? 박동수! 이래도 기억 안 나?”

“잠시만, 박 똥물! 아, 죄송, 아니 미안. 아니, 한 배우님이 박동수라고요?”

그 녀석은 나랑 중학교 1, 2학년 내내 같은 반을 하다가 2학년 겨울 방학 시작과 동시에 갑자기 이민을 가버렸다. 작별 인사를 할 틈도 없었고 연락이 끊긴 건 당연지사다. 그런데 이십 년 만에 한 시윤이라는 잘 나가는 배우로 내 앞에 앉아 있다. 이 비현실감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최 부장이 나에게 소주 한 잔을 따라주며 다행이라는 듯 숨을 고른다.

“사실 나 걱정했거든. 부탁은 했는데 우리 서대리가 착하기만 해서 시윤이 감당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 그런데 동창이라니 한시름 놨네. 시윤이 너도 동창이니까 좀 살살하고, 서 대리까지 못 버티면 너 진짜. 1인 회사 차려야 해. 알았냐?”

“제가 뭘 어쨌다고 그러십니까? 걔네가 잘못했어요. 아시잖아요.”

“어찌 됐든 자자, 다 같이 한잔하자고. 여기 음식은 진짜 죽여줘. 네 덕분에 나 여기 한 달에 두세 번은 오잖아. 좋은 데 알려줘서 고맙다, 시윤아.”

“별말씀을요. 자 드시죠~”

의미 없는 짠과 의미 없는 우물거림. 그렇게 두 시간 가까이 최 부장과 한 시윤은 서로 사적인 이야기까지 주고받았고, 나는 혼자 소주잔을 연신 비워냈다. 정신은 집으로 먼저 보내고, 육체만 남아 그들의 이야기에 반복적으로 끄덕거리고 있었다.

“슬슬 가볼까? 서 대리는 이번 주까지 쉬고 다음 주부터 바로 시윤이 스케줄 따라 움직이면 돼. 일정은 내가 김 주임 시켜서 서 대리에게 보고하게 처리할 테니까. 서 대리는 시윤이 마크만 잘하면 돼. 알았지?”

“아예, 그럼요. 확실히 하겠습니다!”

대출금만 아니었어도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박동수 이 녀석이랑 다시 엮이다니 이건 꿈일 거야. 꿈. 꿈이어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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