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在
장성한 청년 둘이 내 앞을 지나갔다. 이 이야기를 듣지 못했더라면 나는 그 아이가 지석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서만은 아니었다. 그 아이는 내가 알던 지석이가 아니었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가련하고 불쌍한 아이, 적어도 그 아이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 기억이 어디에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걸까?'
수많은 물음표가 나를 덮쳐 왔다. 나는 바쁜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아닌, 예전에 내가 살던 집. 거실 불이 꺼진 걸 보니 지은이는 곧장 집으로 간 건 아닌가 보다. 남편을 마주치면 어쩌나 조바심도 들었다. 내 기억이 어디서부터 틀어져 버렸는지 이제 똑바로 쳐다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조심스럽게 도어록 비번을 눌렀다. 번호는 그대로였다.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집. 적막한 집 안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나에게 가장 소중했던 공간. 내가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열심히 퇴근해 오던 공간. 내가 없는 곳의 냄새는 내가 알던 곳의 냄새가 아니었다. 화분은 다 사라졌고, 사물은 다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남의 집에 온 손님처럼 조심스럽게 서재로 쓰던 방으로 향했다.
내 물건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마치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먼지 하나 없이 모든 것이 제 자리에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서랍을 열어서 남편이 정리해 둔 그날의 사건 파일을 펼쳤다. 남편이 나에게 알리고자 했던 진실은 지난 5년간 서랍장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주인 잃은 그날의 기억은 이제야 왔냐는 듯, 선명하고 날 선 채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많은 부분이 달랐다. 파일을 한 장 두 장 넘길 때마다 잊고 있던 '분노'라는 감정이 똬리 트는 것이 느껴졌다. 적어도 지석이는 지속적인 가정폭력을 당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오토바이 절도죄가 있었다. 부모의 돈에 손을 대서 부모와 마찰이 심했다. 그리고, 내 눈에도 익숙한 날짜의 기록! 학교에 가정폭력을 당했다고 거짓 신고를 해 학교 측의 연락을 받은 부친이 등교하는 아이에게 폭력을 가했으며 그 사실에 격분한 아이가 담임에게 칼을 휘둘러 그를 중상에 빠뜨렸다는 신문 기사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피해자 진영숙은 아이는 죄가 없다고 탄원서를 써댔고, 그 덕에 아이는 훈방 조치로 아무런 죗값도 받지 않았다. 판결이 나기 전 망상 증상이 심해진 진영숙은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남편이 하루하루의 일들을 빼곡히 기록해 둔 백과사전 두께만큼의 사건 파일은 지난 시간, 나의 오해를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5년 전에, 나만의 세계 속에 잠식되지 않고, 가족의 손을 잡았더라면……. 남편의 수고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보다가 나는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이제라도 내가 미안하다고 하면 받아줄까? 이 못난 나를 이해해 줄까?’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고, 집 안은 암흑천지가 되었다.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나의 집에서 나는 오롯이 혼자라는 걸 실감해야 했다. 나는 밤을 새웠다는 사실도 잊은 채, 끝내 아무도 찾지 않은 집을 나섰다. 피곤하지도 배고프지도 않았다. 어제를 놓지 못한 달이 나 같아서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빨갛게 대지를 물들이던 태양도 이내 본모습을 감추고 물질들은 저마다의 색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 한가운데 아무 색도 없이 서 있는 내가 존재할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걸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내 기억은 이미 5년 전 어디에 멈춰 있었고, 거기서 더 성장하지 못했다. 그 사실만 또렷이 알 수 있었다.
달을 보내고 해를 뒤로 하며 나의 집,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집에 도착했다. 인기척이 없기는 여기도 마찬가지다. 하루를 비웠으니, 안 그래도 조용한 집이 더 조용할 것이다. 먼지조차도 움직일 가치가 없는 집. 하지만, 달랐다. 뭔가 기운이 흩어짐이 느껴졌다.
'그럴 만도 하지. 종일 걷고, 종일 굶고, 종일 한숨도 자지 못했으니까.'
나는 냉장고를 열다가 이내 포기하고,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나를 발견했다.
또 다른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평온해 보였다. 깊은 잠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두어 걸음 물러나 화장실로 향했다. 내가 또 있다! 잠시 혼란스러움을 몰아내고, 나는 나에게 다시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은 본 적 없이 하얗고 예뻤다. 곱게 단장이라도 한 냥 옷도 이쁘게 차려입었다. 그러고 보니 속옷도 세트로 입었다. 늘 짝 안 맞는 속옷을 입던 내가 왜?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 침대 아래 떨어진 하얀 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약통이 떨어지던 그때의 내 모습이 보였다. 몸과 영혼은 둘로 나뉘었고, 나는 그 길로 길을 나섰다. 집 앞에서 지수와 영지가 얘기하는 것을 엿들었고, 지호가 그 아이를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집 앞에서 우연처럼 그 아이가 친구가 하는 말을 들었다. 남편의 노력과 가족들의 수고를, 그제야,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나서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였다. 움직임을 느낀 것은. 사람의 기척이 아니었다. 실루엣도 없었다. 단지, 존재했다. 그리고, 들렸다.
‘이제 알았는가?’
“뭘 말이죠?”
‘당신이 한 짓.’
“죽은 건가요?”
‘보면 모르겠나?’
“전 어떻게 되나요?”
‘아직 몰라. 당신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으니까. 어디로 갈지 이제 신의 손에 달렸어.’
“바로 데려가시는 거 아닌가요?”
‘어디로?’
“지옥이겠죠. 아마도.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그럴지도. 시간이 걸릴 거야. 다시 데리러 올 때까지.’
“저는 여기 이러고 있나요?”
‘알아서 하시든지. 다시 찾을 때까지 하고 싶은 걸 해.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존재는 잠시 더 머물며 뭔가 다른 말을 하려는 것 같았으나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어떻게 하라는 걸까? 아직 어디로 갈지 모른다니, 죽으면 다 끝나는 거 아닌가? 이미 죽어버렸는데?'
이미 내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리고, 곧 부패하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다. 내가 그 사실을 알릴 수도 없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내가 나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야, 가능할지도 몰라.’
나는 영지를 찾아가기로 했다. 영지라면 이 상황을 다 처리해 줄 것이다. 나의 마지막을 그 아이에게 보인다는 것이 끔찍하긴 하지만, 그 편이 가장 나을 것 같았다. 죽으니 편한 건 굳이 대중교통을 타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곳을 갈 수 있다. 생각만 했는데 나는 이미 영지가 일하는 사무실에 와있었다. 출입에 제한을 받지도 않았고, 중앙 계단에 놓인 거울에도 내 모습은 비치지 않았다. 출입증 없이 출입하는 유일한 사람. 아니 영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