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혼자가 된 나

by 열정아줌마

약통이 어지러이 널려 있다. 약은 계속 늘어가지만, 뭐 괜찮다. 그 덕분에 잠을 푹 잘 수 있으니까. 아침 햇살이 눈이 부셨다. 푹 잔 덕분인지, 개운하기까지 했다. 영지와 만난 이후, 나는 다른 곳으로 집을 옮겼다. 그리고, 전입 신고는 당연히 하지 않았다. 영지가 이야기해 준 범죄자의 은신 수법처럼. 현금만 사용했고, 철저히 모습을 감추고 살았다. 병원도 옮겼다. 그리고 비급여로 치료했다. 정신 병자로 살아가는 건 조금 귀찮은-약 타러 가는-거 빼고는 나쁘지 않았다. 식욕이 없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그래도 죽지 않을 만큼은 먹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죽고 싶은 사람이 죽지 않을 만큼 먹고 있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여하튼 나쁘지 않았다.


갑자기('갑자기'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예전 동네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 모자에 마스크까지 걸치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더 이상 갈 일이 없을 테니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보고 오자! 아마도 그런 생각이지 않았을까? 20년은 꽤나 긴 시간이니까. 버스를 오랜만에 탔다. 지폐 두 장을 넣고 거스름은 받지 않았다. 맨 뒷자리에서 지나가는 차들과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표정을 알 수가 없다. 저마다 앞만 보고 걷는다. 나처럼 옆을 좀 봐도 될 텐데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모두 아래쪽으로 고개를 숙이고만 있다. 이렇게 찬란한 하늘을 보지 못하다니, 불쌍한 사람들. 익숙한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깝게 느껴졌다.


동네는 한산했다. 개와 함께 산책을 나온 익숙한 얼굴들이 몇몇 눈에 띄었지만, 그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몸무게가 10킬로 이상 빠졌고, 체형도 변했다. 알아보는 사람이 신기할 지경이다. 나는 그렇게 어슬렁어슬렁 동네를 하염없이 걸었다. 예전에 딸과 함께 가던 시장과 남편과 저녁에 산책하던 길을 혼자 걸었다. 오랜만이었다. 걸어보는 것도. 다리가 아플 법도 한데,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동네를 다 눈에 담았다 싶어 되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때 익숙한 얼굴이 내 옆을 지나쳤다. 딸이었다. 몰라볼 뻔했다. 너무나 이쁜 아가씨가 좋은 향기를 내게 전하며 스쳤다. 나는 홀린 듯 그 뒤를 따랐다. 딸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데이트라도 하려나? 나는 조심스럽게 먼 자리에 가서 앉았다. 뭘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누군가 기다리는 척하다가 눈치가 보이면 일어나면 된다. 다행히 아르바이트생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잠시 후에 익숙한 얼굴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안 그래도 움츠린 몸을 한층 더 구겨 몸을 가려야 했다. 다행히 영지는 내 쪽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나는 모든 감각을 귀에 집중시키고 그녀들의 대화를 들으려고 노력했다.

“이모, 여기!”

“일찍 왔네?”

“응, 뭐 알아낸 거 없어?”

“아무것도. 너희 엄마 진짜 어디로 숨은 거니? 어릴 때부터 숨바꼭질하면 끝까지 안 들켰어. 너네 엄마.”

“그래도, 어디 흔적은 있을 거 아냐?”

“생활 반응이 전무야. 내가 너무 많이 알려줬나 봐. 살인범도 이것보다 찾기 쉽겠다. 몸도 안 좋은데 대체 어디 가서 숨었는지. 속 썩여 정말. 그나저나, 너 영국 가는 건 어떻게 돼 가는 거야? 왜 말이 없어?”

“엄마 어딨는지 알아야 마음 놓고 가지. 그래도 그동안은 이모가 챙겨봐 주니까 내가 마음이 놓였는데. 이젠 그것도 아니고. 어떻게 가.”

“엄마는 엄마고, 너는 네 길 가야지. 이모가 열심히 찾아서 케어할게. 걱정하지 말고, 넌 네 길대로 가면 되는 거야. 참, 지호는 올해 복학 안 한다던데, 다른 얘긴 못 들었어?”

“지호도 엄마 찾으면 복학한대. 혼자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니는 모양이야. 지가 뭘 안다고. 얼마 전에 걔도 만났대.”

“걔를 왜?”

“내 말이. 미친 거지.”

“지호는 왜 쓸데없는 짓을.”


'이게 다 무슨 말일까?'

나는 대화를 하나라도 놓칠까 봐 더욱 귀를 세워야 했다.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했나 보더라고. 하겠냐고? 그 미친 새끼가? 안 그래?”

“지호가 쓸데없는 짓을 했네. 그러면 너네 엄마 죄책감이 좀 줄어들까 봐 그랬나 보네. 엄마 잘못이 아닌데.”

“엄마한테 몇 번을 말했는데도 엄마는 우리 이야기 듣지 않았어.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서 나쁜 선생이라는 프레임을 스스로 씌우고 그 안에 아무도 들여놓지 않았어. 나도, 아빠도, 지호도. 이모까지. 그 자식이 엄마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밤에 잠도 안 와. 고작 중 2짜리가.”

딸의 분노가 느껴졌다. 영지는 말없이 주문한 커피만 마셨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들은 잠시 근황 얘기를 하다가 헤어졌다.


나는 지석이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겨진 몸을 펴고 무작정 그 아이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딸아이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고작 중 2짜리가, 고작 중 2짜리가…….’

지석이의 집이 이쪽이 맞았던가. 어느덧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사를 갔을지도 모른다.

'괜한 헛걸음인가? 아예 영지에게 대놓고 물어볼까?' 속에서 고민이 새어 나왔다. 그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내달리는 아이와 부딪혔다. 그 아이는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 없이 지나쳐갔다. ‘예의 없는 놈.’ 이럴 때는 영락없는 꼰대 선생의 기질이 튀어나온다. 크게 한 마디 혼쭐을 내주려다가 메아리처럼 귀에 꽂히는 이름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지석아! 미안. 늦었지?”

“뭐 맨날 늦으면서 새삼스럽게. 아직 근호가 안 왔어. 오면 같이 가자. 지석이라고 좀 부르지 마라고! 몇 번을 얘기하냐?”

“입에 안 익어서 그래. 조심할게. 근데, 너 그 얘긴 뭔 소리야? 그 선생님 아들이 찾아왔다는 거?”

“그러니까. 재수 없게, 나더러 사과하래. 자기 엄마한테. 언제 적 얘기를. 안 그래?”

“그래도 인마, 너 그때 좀 심했어. 진 선생님이 탄원서 안 써줬으면 7년은 썩었을 텐데. 네 부모님도 너 용서 안 했을 거고.”

“하긴, 그건 그래. 그날 거짓말 들켜가지고 아빠한테 엄청 맞고, 눈이 빡 돌았었어. 그건 나도 좀 미안하게 생각해. 근데, 죽을 만큼은 아니었어. 그리고, 안 죽었잖아? 그럼 된 거 아냐? 야, 그리고, 다른 애들 앞에선 이 얘기하지 마라. 아무도 몰라. 제발 부탁인데, 신우! 최신우! 입에 좀 익게 자주 좀 불러.”

“알았어. 최신우. 저기 신호등에 근호 아냐? 가자, 렛츠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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