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여지없는 꼰대입니다

나는 아이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by 열정아줌마
꼰대는 본래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으나, 근래에는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하는 직장 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변형된 속어이다.


"엄마, 저 엄마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이가 이렇게 말을 꺼내면 난 겁이 난다. 자라 닮은 솥뚜껑 본 사람처럼 여러 가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는데 일단 내가 예상하기 힘든 얘기거나 내가 허락하지 않을 무언가에 대한 답변을 듣기 위한 제스처임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말투에 특유의 뉘앙스가 있음을 본인은 아직 모르는 거 같지만 말이다.


"... 머?"

최대한 짧고 시크하게, 아니 말 같지도 않은 말이면 꺼내지도 마란 내 나름의 표현이다.

"저 취미생활 갖고 싶어요"

"........"

들어는 봐야 되니까 일단 침묵으로 일관한다.

"저 사실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게 있는데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해보고 싶어요"


내가 뭔가 싸하다 싶었다. 이 아이는 호기심도 강하고 하고 싶은 거에 대한 바운더리가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넓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취미생활이 하고 싶은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얘기해봐라"

경상도 아줌마. 무뚝뚝하기가 마른 장작보다 더 메마르다.

"저 사실 하고 싶은 운동이 있는데 체력도 키우고 또 취미생활도 되고 좋을 거 같아서요.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거예요"


얘기가 넘 기니 요약하자면 이렇다. 예전부터 너무나 하고 싶었던 운동이 있고 지금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가는 과도기적인 시점에 뭔가 자기 자신의 멘털 회복을 위해 창의적이고 새로운 무언가 하고 싶다. (어쩌고 저쩌고 구구절절..) 그래서 그게 뭐냐고 대체??


"엄마, 피겨래요"

보다 못한 둘째가 거든다.

"머라고????"

할말하않... 딱 어울리는 말이다. 피겨? 내가 아는 그 피겨? 은쟁반 위에서 김연아 선수가 박수갈채를 받던 그 피겨???? 아이고 아부지요..


나는 보통의 엄마들과는 다른 엄마가 되고 싶었다.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지식한 어른도 아닌 그때그때 변화무쌍한 멘토가 될 수 있는 엄마. 물론 중간 과정에 누구보다 열혈 학부모에 학원 뺑뺑이를 어마 무시하게 했던 과거의 나는 나도 잊어버리고 싶다. 그런 과정을 겪고 이상적인 엄마가 되고 싶었다. 어찌 되었든 아이의 입장에서 누구보다 아이가 원하는 게 먼저라는 기본을 다잡고 새로이 시작한 엄마로서의 나는 최대한 쿨하게 이 아이의 피겨에 대한 갈망을 꺾을 이유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어떤 말로도 아이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고, 막무가내 고집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고약한 내 성질머리가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다. 한동안 하지 않았던 아이에 대한 어마 무시한 폭격을 시작했다.


"이 녀석아, 뻔하다. 하다 포기할 거고 그럴걸 왜 하노 내 눈에 훤하다. 너는 아직 어리니 아무것도 모르고 단지 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하겠지. 해봐라 그게 쉽나"


물론, 내 나이 정도가 된 사람들은 굳이 가보지 않아도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미리 짐작되고 예상되는 게 사실이다. 이걸로 성공해야겠다 미친 듯이 매진해도 50프로 이루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지 않은가. 그런데 단순히 취미생활로 피겨를 하겠다니! 홈트 10분에도 기진맥진하는 아이가(한동안 운동과 담쌓아 체력이 엉망이다)

눈에 보듯 보이는데 '오구오구 내 새끼 하고 싶은 게 생겼쪄?'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피겨 학원을 알아봤다는 아이 말에 일단 일일 코스로 피겨 체험을 해보고 나서 다시 생각하자고 얘기하는 걸로 결론을 지었다. 결론을 지었다기 보단 난 여전히 화가 난 상태고 아이는 내 눈치를 보면서 자기 의견을 관철하겠다는 냉전의 시작이었다. 이미 용돈으로 피겨화까지 사뒀다는데 더 이상 말릴 명분도 없었다.


'해볼 테면 해보라지'

엄마의 조언은 깡그리 무시하는 아이의 태도가 사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가 그래 봤자 내 말이 맞을 거다'

꼰대의 마음으로 아이의 결심을 무시했다.


아이가 빙상장으로 간지 세 시간이 다 되어 갈 때였다.

카톡이 온다.

'엄마, 저 안 할게요. 죄송해요'


그제야, 나는 내가 얼마나 나쁜 엄마였는지 알았다. 기회는 줄 수 있는 거였다. 꼰대처럼 다 아는 듯 어차피 하루 가면 안 갈 거야 하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아 이거는 아니었구나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경험과 연륜 따위를 말하며 아이의 기대감과 호기심과 욕망을 차디찬 말들도 뭉개버렸다. 꼰대가 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너무나 꼰대 같은 말들로 아이의 가슴에 상처를 줬다.


"엄마, 저 피겨화 당근 마켓에서 좀 팔아주세요."

아이고, 이 녀석아..


나는 아이와의 냉전에서 패자다. 아이는 본인이 하고 싶었던 일을 어쨌든 도전은 해봤다. 아직은 어리고 미숙하니 내 시선에서 바라볼 땐 뻔하디 뻔한 결과에 목메는 게 한심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본인의 시점에선 최선을 다해 무언가에 도전해 본 결과였을 것이다. 나는 아이가 그렇게 성장하는 과정조차도 꼰대의 시점에서 미리 아니라는 결론을 내버렸던 건 아닐까.


"내가 잘 팔아줄게. 일단 올려보자"

꼰대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도 할 줄 모른다. 그냥 아이의 잘못된 선택이었던 걸로 오늘 밤은 지나가버리겠지.

조만간 나도 용기 내어 미안했다고 말할 참이다. 얼마든지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었으니까. 나도 아직은 갈 길이 먼 초보 엄마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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