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채는 곧 자존심!

여보 이제 받아들여~

by 열정아줌마

계단을 앞서 내려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딸아이가 소곤소곤 한 마디 한다.


"엄마, 아빠 머리에서 빛이 나요"

"응?"


자세히 보니 안 그래도 없는 가운데 머리가 아예 둥그런 원으로 자리 잡아 버렸다.

머리만 보면 영락없는 60대다. 이걸 어떻게 전달해주지. 생각보다 우리 남편은 소심해서 요런 적나라한 사실을 전달할 때 세심하게 배려해줘야 한다.


며칠이 지난 후에 손거울 하나를 슬쩍 내밀었다.


"여보, 요즘 스트레스가 많은가 보다. 내 눈엔 좀 빠진 거 같은데 게안은가 함 봐봐."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유전이니까"


"빠지면 어떻노 게안타" 나는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한마디 툭 던지고 빠졌다. 아니다다를까 슬쩍 내민 손거울로 열심히 뒤통수를 이리 봤다 저리 봤다 한다.


"우와, 여보야 우짜노. 머리가 너무 많이 빠졌는데? 이 정도일 줄 몰랐다. 머리를 심어볼까?"

"머리 심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란다. 일단 다른 방법을 좀 생각해보자"


다른 방법이랄게 뭐 있나. 검은콩을 일단 들이밀어본다. 이거라도 먹고 어떻게든 노화를 늦추는 수밖에. 머리 심는 것도 보통 어려운 게 아니라는데 자연스레 늙어가야지 뭘 심고 그런단말이고.


다음날 아침, 하루 만에 쓩 날아온다는 로*배송으로 택배가 왔다.

"여보, 내 흑채 샀다. 이거 좀 뿌려줘 봐"

"흑채? 박명수가 맨날 흑채 흑채 하더니 실물 영접하네 드디어"

"일단 함 해보자. 몰랐음 몰라도 이렇게 뻥 뚫려서는 못 다니겠다."


'오야오야 함 해보입시다. 이걸로 가려만 진다면야 뭐가 걱정이겠노'


정성껏 톡톡톡 뭉치지 않게 발라준다. 이 순간 동상이몽.

'이걸 아침마다 내가 해줘야 하는 거지?'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고 아마도 남편은 흑채 사용으로 변신할 민머리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을 것이다.


정성껏 뿌려준 결과는 예상외로 훌륭하다. 물론 가까이서 내려다보면 머리카락이 없이 색칠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스윽 지나치면 크게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흑채의 능력치는 대단했다.


"우와, 신기하다. 이게 되네"


손거울로 연신 머리를 비쳐보며 남편이 감탄해 마지않는다. 이리저리 보면서 마치 스무 살 청년이 얼굴에 자신감을 장착하고 거울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리 보고 저리 본다.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흑채 하나로 저렇게까지 신날 일인지. 하긴 보톡스 맞은 친구들이 저랬던 거 같기도 하다. 카톡 프로필에 사진 찍어 올리는 거랑 비슷한 맥락이겠지? 나도 이참에 보톡스를 맞아볼까? 외모의 업그레이드가 자신감에 큰 영향을 미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말이다.


요즘 이사 준비에 한창인지라 서랍장에 케케묵은 짐들을 정리하던 중에 18년 전 결혼사진이 툭 튀어나왔다. 아이들은 난리다. 자기들의 기억엔 없는 아빠 엄마의 모습이니 신기한가 보다. 엄마의 앞머리도 신기하고 아빠의 날씬함도 낯설기만 하다. 보다 보니 이때만 해도 머리카락이 엄청 풍성했구나 싶다. 18년간 우리 먹여 살리느라 스트레스 많이 받았나 보다 짠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입 밖으로 내었다가는 며칠 또 에헴할테니 애써 짠한 마음을 감춰보기로 한다.


그렇게 아침마다 나는 남편의 빈 곳에 흑채를 열심히 뿌려주고 있다.

이걸로 당신의 자신감이 조금이라도 살아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해줄게. 세월이 지나 결국은 흑채로도 감당이 안될 정도로 머리는 줄어들고 시술로도 감출 수 없는 주름살이 얼굴 전체를 덮게 되겠지만 나이 들어 감에 대해 우리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 그때까지 내가 흑채 열심히 뿌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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