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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 내 팀 구성이 끝나고 한 달 뒤, 수상한 미소를 짓는 이상한 여학생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기존에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실패해서, 웨일의 팀으로 새로 투입되었다고 여학생은 말했다. 외국인 유학생인 줄 알았는데,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했다. 여학생이 태국계 한국인이란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웨일은 여학생이 불운하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프로젝트도 곧 망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불운한 여학생이 리코였다.
당시 팀은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영어 강의들을 모아 커리큘럼으로 제공하는 앱을 개발하고 있었다.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수익 모델이었다. 유료냐, 아니면 무료에 인앱 결제냐로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웨일은 유료파였고, 반대 측에는 성격은 무르지만 고집은 센 남학생이 있었다. 그때 리코가 새로운 제안을 꺼냈다. '차라리 유료에 인앱결제는 어떨까요?'. 그 말에 남학생이 그럼 누가 앱을 사용하겠냐며 핀잔을 주었다. 리코는 언쟁을 벌이는 대신에 1인 개발자가 수익을 올리는 가장 효과적인 수익 모델이 '유료 인앱결제' 모델이라는 근거 자료를 가지고 왔다. 물론 그 자료 하나로 남학생을 설득하진 못했다. 웨일도 유료까지만 찬성이었다. 유료에 인앱결제는 무리, 지나친 요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코는 각 요금 플랜을 이용하는 사용자 층의 유형을 분석해서, 왜 유료 인앱결제가 더 효과적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남학생은 끝내 '무료 인앱결제' 모델을 포기했다. 웨일도 실패할 경우 무료로 서비스하다 유로로 전환하는 것보다는 유료 인앱 결제에서 유료로 전환하는 것이 더 매력적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론적으로 리코의 주장은 옳았고, 유료 인앱 결제 모델은 실제로 학생 프로젝트라고 하기엔 '그럴듯한' 수익을 냈다. 교육 자료로 활용했던 유튜브 채널들에서 저작물 무단 사용으로 신고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꾸준히 개발해 진짜 '그럴 듯한' 회사를 세웠을지도 몰랐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남학생은 함께 쌓아 올린 탑이 무너져 내린 것으로, 풀이 죽어 있었다. 리코는 남학생을 데리고 학식을 사주었다. 언제나 각자 계산하던 리코가 밥을 사주었을 때 남학생은 거의 울먹였다. 웨일은 볼썽사나운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허니맨은 그때만큼 고집이 세지도, 볼썽사납지도 않았다.
졸업 후에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창업 동아리 '빅액터스' 로고가 붙여진 USB를 늘 챙기고 다녔다. 임원에 눈에 들어 미래기획단으로 발령받았을 때, 리코로부터 연락이 왔다. 웨일은 의도치 않은 파도에 떠밀려 이 자리로 왔다. 자신의 회사로 온 리코가 월척을 낚았다고 자랑했다. 고래를 담으려면 어항을 더 키워야겠네. 언제부터 옆에 있었는지, 고집 센 남학생, 허니맨이 팔을 벌려 웨일을 맞았다.
최근 들어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퇴사하지 말 걸...
TF 2차 미팅에서 라선이 디자인 시스템 구축에 관련해 설명했다. 의도는 알겠으나, 두 작업을 병행하는 것이 옳은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디자인팀과 개발팀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졌고, 알력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전체 프로세스가 순조롭게 흘러갔다.
리코가 라선이 데리고 왔을 때만 해도,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세안나를 처음부터 먼저 자극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60명 규모 조직에서 사소한 분쟁도 분위기를 뒤숭숭하게 만든다. 허니맨도 이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다 같이 쓰는 츠렌을 혼자서 쓰지 못하겠다고 했을 때, 자아가 너무 큰게 아닐까 우려스러웠다. 허니맨 말로는 리코가 오케이 했다고 하지만, 이미 츠렌을 지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기 이름을 쓰게 해달라고 떼쓰는 고까운 별종으로 보인 것이 사실이다. 웨일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초급 사용자 매뉴얼 제작을 맡겼는데, 리뉴얼을 주제로 이끌고 온 것도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용은 합리적이었고, 근거도 탄탄했다. 주장할 만했다. 리코처럼. 기획팀이면서 이러한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에 조금 반성하게 되었다. 조직 안에서 외부의 시각을 가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외부인이었기에 가능했던 작업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안나에게 농담을 건네고, 토월의 불만을 잠재웠다. 외부인이 해내기엔 어려운 일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유형이었다. 기획팀으로 라선을 보내는 건 어떻겠냐는 허니맨의 제안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일반 문서를 작성시키는 일을 시키려고 뽑은 인원이 아니다. '테크니컬 라이팅'이라는 전문 능력을 지녔기에 뽑은 인력이었다. 소속만 기획팀에 두고 개발팀과 협력하는 포지션이 될 텐데, 그게 무슨 의미있나 싶었다. 라선을 개발팀에 넣자는 리코의 제안은 그러한 면에서 옳았고, 허니맨이 리코의 제안을 제지한 것 또한 라선에 대한 내부인원의 반감을 죽이기 위한 방편이라는 면에서는 옳았다. 능력은 있는데, 어디에도 둘 데가 마땅치 않다. 리뉴얼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TF 구성원으로 남겨 두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실제로도, 웨일의 판단은 최선이었다. 두 달이 지난 시점에 디자인 시스템의 기본 작업이 마무리되었고, 디자인팀과 개발팀은 UX 개선에 박차를 가했다. 동시에 라선은 매뉴얼 작성을 위해 부서 간 용어를 통일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기획팀과 마케팅팀은 리뉴얼 시점에 맞춰 프로모션 콘텐츠를 기획했다. 바뀐 앱을 테스트하고, 작동이 잘 되는지 확인했다. 한 주, 한 주가 다르게 앱이 목표했던 모습에 가까워져 갔다. 디자인 시스템이 체계를 완전히 갖추었고, 개발자와 디자이너 사이의 소통이 보다 원활해졌다. 작업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세안나는 동시에 연결된 기능이 로드되는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한 최적화에 집중했다. 프로젝트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민첩하고, 기민하게 골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웨일은 각 팀이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게 중간중간 완급을 조절했다. 특히 라선은 독립되어 혼자서 모든 일정을 스스로 세우고, 확인하고, 결정해야 했기에, 더욱 신경 써서 결과물을 챙겨줘야 했다.
개발 단계에 맞춰 리코에게 중간보고를 했다. 리코는 간섭하지 않았다. 믿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팀원들의 선택을. 웨일이 갖추지 못한 여유였다. 덕분에 웨일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 더욱 확고해진다. 무게가 더해진다. 리코는 사람을 다룰 줄 알았고, 크게 볼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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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바람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라선은 긴장했다. 오늘은 리뉴얼 버전의 실제 사용성 테스트가 있는 날이었다. 개발팀에 넘기기 전마다 UX 사용성 테스트를 시행했지만 '기능'이 동작하는 실제 앱으로 이루어지는 테스트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사를 위해 앱을 이용해 본 적 있는 그룹과 처음 사용하는 그룹으로 나누어 선발했다. 두 그룹 모두 공통적으로 실거주가 부동산 구매의 목적이았다. 이들이 새롭게 구현된 앱에 만족해야 한다. 다시 말해 라선이 세웠던 가설이 옳았는지 검증되는 테스트인 것이다. 반드시 유의미한 결과가 나와야 했다.
라선은 테스트용 앱의 모든 기능을 살펴보았다. 적어도 라선이 느끼기엔, 모든 기능의 깊이가 낮아지고 가벼워졌다. 지도앱에서 출발지와 도착지를 검색하듯 두 아파트를 선택해 한 번에 비교해 볼 수 있었다. 매매가 변동 추이, 전세가 변동 추이, 전세가율 변동 추이 등 추세 그래프를 따로따로 볼 수도 있었고, 원하는 항목을 선택해 동시에 보며 흐름을 파악할 수도 있었다. 가장 큰 변화라고 느낄 부분이었다. 사용자에게도 그렇게 보여야 한다. 그리고 편리하게 느껴져야 한다.
"초조해 할 필요 없어요. 잘 나오겠지."
출근하고부터 손에서 폰을 못 떼고 있는 라선을 보고 세안나가 말했다.
"그러면 좋을 텐데 말이죠."
"안 좋게 나올 수가 있을까. 그렇게 고생했는데."
"고생했다고, 결과가 좋으리란 보장은 없죠."
말을 하면서, 라선은 자신이 은근히 결과가 아마도 좋게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잘 본 모의고사를 채점하기 직전의 기분이었다. 채점에 들어가면 떨리지만 하나씩 동그라미 쳐가며, 답을 맞혔다는 희열이 에어캡을 누른 것처럼 터진다. 옅은 흥분감이 아래에서부터 올라왔다.
"그건 옳은 말. 현명하네요. 큰 기대하지 말아요. 그럼."
세안나는 돌아서 자기 자리로 갔다.
큰 기대하지 말자. 라선도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가라앉지 않았다. 인정받을 기회였고, 인정받아야만 한다.
11시 정각이 되자 실험자들이 하나 둘 회의실에 도착했다. 라선은 앱이 설치된 기기를 나누어 주었다. 어떤 사람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어떤 사람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기기를 만졌다. 앱을 만지는 사람들의 손동작은 모두 녹화했다. 사람들은 흥미롭게 앱을 이용했다. 궁금한 지역의 집값을 알아보고, 살기 좋은 단지를 탐색하는 등 과제를 주었다. 사람들은 차례로 과제를 풀며 앱을 사용했다. 가설이 맞다면, 사용자들은 자유롭게 이런저런 기능을 활용해 구매 가능성이 있는 후보지들을 찾아낼 것이다. 두 시간이 지나갔고, 테스트가 종료되었다. 앱 내부 사용 기록은 1차적으로 개발팀에서 분석해 정리한 후, TF 전체가 함께 해석할 예정이었다. 그동안 라선은 손동작을 촬영한 영상을 하나씩 살폈다. 전반적인 모션에는 어색함이 없었다. 화면도 부드럽게 넘어갔다. 전반적인 사용 환경이 개선되었다는 것이 보였다.
한 사람의 영상을 모두 보았을 때쯤, 개발팀에서 간단히 정제한 데이터를 공유해 주었다. 라선은 먼저 개별 의견을 읽었다. 지도 위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필터가 간단하게 정리되어 좋다는 의견이 있었다. 아이콘이 다소 투박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사소했다. 라선을 계속해서 다른 항목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불안했다. 동그라미가 쳐져야 할 곳에 빗금이 쳐지고 있었다. 빗금이 쳐져선 안 될 부분이었다.
이번 리뉴얼의 핵심이었던 비교 기능과 그래프 선택 기능들을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것이었다. 라선은 말을 잃었다. 웨일이 TF 구성원을 모두 소집했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밝지 않았다. 모두 모이고 나서, 각자 자리에 앉아 노트북과 패드로 결과를 보았다. 라선은 힐끔힐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았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웨일이었다. 웨일은 말없이 노트북을 뚫어지게 봤다. 먼저 말을 해야 하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웨일이 입을 열었다.
"그럼 라선부터 말씀해보시죠. 이 결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