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휘목 Sep 20. 2024

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16화

"어, 그게..."

라선은 모두의 시간과 노력이 자신의 고집 때문에 희생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그게... 죄송합니다."

사과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웨일의 목소리가 따갑게 들렸다.

"저 때문에..."

흔들리는 목소리로 라선이 답했다.

"TF 총책임자는 저고 이건 라선 씨만 한 게 아니에요. 본인만 이끈 프로젝트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그건 여기 있는 사람들 무시하는 거니까."

웨일이 따끔하게 주의 줬다. 뒤틀린 자의식이 부풀어 올랐다. 이 프로젝트의 리더는 내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 프로젝트의 결과는 모두   

"책임을 따지는 자리가 아니라, 어떻게 개선할지를 모색하는 자리예요."

토월이 딱딱하게 말했다.

"실제 사용자 평가가 예상 밖인 거. 한두 번 일도 아닌데, 유난도 유난."

세안나가 키보드 자판을 두드렸다. 

"단순한 해석으로는 사람들은 단지 비교나, 그래프 비교 기능에 큰 관심이 없다는 거죠? 이건 투자 목적 이용자와 실거주 목적 이용자의 공통된 니즈가 반영된 기능인데도요."

웨일이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공통된 니즈를 반영했다는 것 자체가 틀린 가설이란 뜻이네요."

토월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넛지가 약했거나."

여전히 자판을 두드리며, 세안나가 툭 던졌다. 

"지금 UX탓으로 돌리는 거예요?"

화가 옅게 덧칠된 목소리로 토월이 물었다.

"진정해요. 여기 최선 안 다한 사람 없으니까, '작업' 자체에 대한 비판은 하지 말아요."

웨일이 중재했다. 라선은 토월과 세안나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자신 탓으로만 느껴졌다. 이번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개들이 원하지 않는 기능인데, 억지로 넣을 필욘 없을 것 같아요. 그런 기능만 빼도 조금 더 가벼워질 거예요."

라선을 보며 세안나가 말했다.

"그렇지만, 확실히 알고리즘을 활용한 비교 기능은 우리 앱만이 지닌 장점이죠. 이걸 버리면 '백방'이나 '아필'랑 큰 차별점이 없어요."

MAU 300만 명을 자랑하는 백방은 업계 최고의 부동산 앱이었다. '아필'은 '부자고고'와 MAU가 비슷했지만 평점은 조금 더 높았다. 어느 앱도 제공할 수 없는 '유일함'이 있어야, 부자고고고로 사람들을 유입시킬 수 있다. 라선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유일함'이 쓸모없다니. 정말 그럴까. 라선은 아직 '비교 기능이 유용하다.'는 가설을 버리지 못했다. 마케터, 기획자, 개발자, 모두 지양할 태도였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고집. 그렇기에 한 번 더 주장할 수 없었다. 결과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결국 라선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피하고 싶다.

*MAU: 월간 앱 사용자 수



퇴근하고 저녁 공기를 마셨다. 술 마실 돈이 없어서 어둠에 익은 공기를 여러 번 마셨다. 가을로 계절이 넘어가고 있었고, 스산한 바람이 옷소매 사이로 들어왔다. 거 바람 한 번 얼큰하네. 바로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라선은 지하철을 타는 대신 걸어서 가기로 했다. 회사에서 집까지 도보로 두 시간 십 분이었다. 못 걸을 거리는 아니었다. 대학교 때 술을 마셨다가 지하철에서 잠에 빠져, 종점에 내린 적이 있었다. 4시간을 걸어 집까지 갔다. 시간은 많았고, 돈은 없었으니까. 그때 술 마실 돈으로 택시를 탈 수 있고, 택시 탈 돈으로 두 끼 먹을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라선의 위는 청정해역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바닥이 꺼지는 것 같았다. 걷다가 걷다가 걷다보니, 어느 새 성답정 클럽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거리는 젊음을 과시하는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들 걱정이라곤 한 점도 없어 보였다. 티 없이 맑은 흥분이 진하게 깔린 공기 냄새를 맡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초록색 네온사인이 빛나는 술집 입구에 오픈카를 탄 남자가 검은 티를 입은 여자에게 옆 좌석에 앉으라고 신호를 보냈다. 여자는 망설임 없이 옆 자리에 올라탔다. 화끈한 놀이터에서, 라선은 어색하게 뚫린 검은 구멍 같았다. 이런 곳인 줄 알았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서 갔을 텐데. 방향을 틀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남자 무리가 지나가면서 라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당장 달려가 멱살을 잡고 싶었다. 그럴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게, 그쪽에게도, 라선에게도 다행이었다. 파출소에 끌려가고 싶진 않으니까. 멍한 채로 걷고 있다, 누가 버린 술병에 걸려 넘어졌다. 머리를 바닥에 거의 찍기 직전 뒤에서 누가 뒤에서 뒷목을 잡고 올렸다.  


"개인용 비구름이라도 달고 다니지. 왜 혼자서 청승맞게 걷고 그래?"

새하얀 정장을 입은 민하가 라선의 옷을 털어주었다.

"누가 청승맞게 걸었어요!"

"넌 꼭 나한테만 화 잘 낸다. 다른 사람한테는 쭈구리면서."

"미안해요!"

라선은 화를 내며 사과했다. 엉터리 사과였다.

"진짜, 미안해요. 그냥 다 우습고 민망해서 그래요."

"언제는 안 그랬니. 항상 우습고 민망해. 너 중학교 2학년 체육 대회에서 반티 갈아입다 발 걸려서 바닥에 쓰러져 옷 반쯤 입고 굴렀던 거 기억 안 나?"

"그건 그냥 비참한 거잖아요!"

"웃자고 한 얘기야."

라선이 옆구리를 찔렀다. 민하는 꿈쩍도 하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 문득 라선은 다른 사람에게도 민하가 보이는지 궁금했다. 아무리 옷차림에 자유도가 높은 일대라고 해도, 새하얀 정장에 180cm가 넘는 여자는 눈에 안 띌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옆에 자신은 쪼랭이의 쪼랭이처럼 보이겠지. 둘은 골목 끝에 주차된 초록색 오픈카에 도착했다. 차체 반이 그냥 뜯어져 나간 것 같아 오픈카라기보다는 보트에 더 가까웠다.

"타."

차 문을 열며 민하가 말했다.  라선은 조수석에 앉았다. 

"꽉 잡아."

라선이 안전벨트를 하자마자 차가 튀어나갔다. 무슨 제로백이 3초라도 되나? 보트카는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땅 위를 달렸다. 날아가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반쯤 떠있었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처럼 맞바람이 세차게 얼굴을 밀었다. 차는 고속도로로 올라갔다. 보트카는 최고 속도로 이리저리 차선을 빠르게 옮기며, 도로를 질주했다.

"속도 좀 줄여요."

"속이 올라온다고?"

"속도를 줄이라고요!"

"배멀미 있어?"

민하는 귀가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외이도염으로 귓속이 꽉 막혀 있거나. 공교롭게도 속도 올라오고 있었다. 잘못 던진 다트도 어딘가엔 꽂히긴 꽂힌다더니.

"이렇게 달리는데 누가 안 울렁거려요? 당장 토할 것 같아요."

"승선할 때 안내했잖아. 꽉 잡으라고."

"그게 무슨 안내예요!  날아간다고는 안 했잖아요."

"자동차니까, 날아가지. 당연한 거 아냐."

"뭐가 당연해요! 그런 기능이 있으면, 그런 기능이 있다고 얘길 했었어야죠. 그리고 세상에 누가 '자동차니까 날아가지'라고 생각해요?"

말을 하면서 토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순간, 차가 대교 위에서 정지했다.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처럼 라선의 머리카락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천천히 부유하며 가라앉았다. 그때 라선이 짝하고 자기 머리 양옆을 때렸다.

"이젠 속 편해?"

민하가 속 편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뭐라고 했죠?"

라선은 전혀 듣지 않고, 다른 질문을 했다.

"토할 것 같다고."

"아니, 그거 말고....아! '그런 기능이 있으면 그런 기능이 있다고 얘길 했었어야죠!'", "올라 타기 전에"

민하는 영문을 몰랐다.

라선은 깨달았다. 올라타기 전에 필요한 것.

"온보딩을 놓쳤어요. 뱃머리를 돌려요!"

"어디로, 집에 안 가?"

"회사로 데려다주세요."

라선이 부탁했다. 민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간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보트카는 방향을 바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최대 속도로. 라선의 불평, 고래고래, 악은 없었다.



온보딩


생각지도 못했다. 내부는 모두 바꿨으면서 정작 사용자에게 처음 앱 사용법을 가이드하는 온보딩 UX는 건들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처음 부동산을 알아보기 시작한 사람들은, 임장을 단 한 번도 가지 않은 사람들은, 아파트와 아파트를 왜 비교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동안 사용성 테스트를 했던 대상은 대부분 기초적인 부동산 지식을 가지고 있는 '동료'들이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수치에 대해서만 곤란해할 것이다. 라는 발상 자체가 이미 초보자 그룹이 지닌 지식을 너무 높게 본 것이다. 더 낮은 곳에서부터 온보딩을 시작해야 했다. 따로 떨어진 매뉴얼은 위키처럼 사용하긴 편하지만,  위키를 살펴보는 사람들은 최소한의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이다.

 앱 시작에서 핵심 기능의 사용법은 물론 왜 그 기능들을 사용해야 하는지 알려줘야 했다. 그러면서도 정보량이 과하지 않아야 한다. 회사로 돌아온 라선은 PC를 켜고 온보딩 흐름을 스케치하고, 문구를 작성했다. 앱의 첫 화면에서 띄워질 한 문구를. 라선을 머리를 뽑아다가, 책상에 위에 굴렸다. 얼굴의 반이 닳아 없어졌다. 하품이 낙하산처럼 펼쳐졌다. 의식이 힘겹게 정신의 밑바닥에 착륙했고, 흙먼지가 날리면서 먼지에 덮여 있던, 글귀가 드러났다. 

 '비교가 쉬워진다, 부동산도 쇼핑처럼"


 작업을 마친 라선은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잠에 들었다. 꿈속에서 땅을 뚫고 아파트가 이곳저곳에서 솟아났다. 전속력으로 피해서 달리던 라선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아파트 옥상에 을 건너뛰며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떨어지면, 다시는 못 올라온다. 이를 악물고 라선은 파쿠르 선수처럼 지붕에서 난간, 난간에서 창틀로 뛰었다. 

발끝으로 간신히 멈춰 섰다. 아래를 보니, 비행기에서 아래를 보는 것 같았다. 비행기를 타본 적 없었다. 아찔했다. 다른 디딜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옆을 돌아보았을 때, 점박이 고양이가 코앞으로 뛰어들었다. 그대로 라선은 추락했다. 끝인가, 이런 게 날개 없이 태어난 자들의 비참한 말로 일까. 왕후장상 하유종(王侯將相何有種)이라지만, 정녕 부자의 씨는 따로 있단 말인가. 사극의 주인공처럼 비장하게 눈을 감으며, 라선은 최후를 맞을 각오를 했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라선은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끼며 깨어났다.

"꺄아아악!"

아침 8시 50분이었고, 이르게 출근한 사람들이 일제히 라선을 바라보았다. 있었어? 하고 놀라며. 

10분 뒤 리코가 출근했고, 반쯤 잠든 라선을 지나가며 말했다. 

"잠시 차 마실래요?"

라선은 눈을 비비고 일어나, 리코를 따라 라운지로 갔다. 민트티 백을 차가운 물에 넣고 리코가 가운데 놓인 탁자에 앉았다. 라선은 계피 스파클링 병을 따 자리에 앉았다. 진한 향이 올라왔다. 

"수습 종료 전 면담하려고 불렀어요."

아차...


[다음 화에 계속]




이전 15화 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15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