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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뉴얼 작업에 몰입하느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아직 수습 기간이란 사실을. 전환일은 다음 주였다.
"업무는 어때요. 조금 할 만한가요?"
"네, 동료 분들이 도와줘서 프로젝트를 잘 진행하고 있습니다."
"리뉴얼 사용성 테스트에 대해서 어제 들었어요. 생각보다 나빴다면서요."
리코는 감정 없이 말했다. 그래서 더 서늘했다.
"네, 그래서 어제 회사에 남아 밤새 방법을 찾았습니다."
마치 해답을 찾기 위해서 일부러 회사에 남은 것처럼 대답했다. 실제로는 우연히 깨달은 바를 잊지 않기 위해 회사로 돌아온 것이었지만. 결과는 같으니까. 아무렴 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들키지 않을 것이다.
"좋은 소식이네요. 조금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혹시..."
리코가 잠시 멈추고 뜸 들였다. 라선은 침을 삼켰다. 퀵펜슬에서 신 차장과 나눴던 마지막 면담이 뒷머리를 타고 눈앞으로 와 재생되었다. 이런 게 트라우마구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업무가 너무 벅찬 게 아닌가 하고요."
"아뇨,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라선이 손까지 흔들며 부정을 표현했다.
"그럼 다행이네요. 허니맨이 걱정해서 물어봤어요. 포지션을 잘못 잡아준 것 아닌가, 계속 고민하더라고요."
인사담당자가 인력 미스매치를 신경 쓰는 건 당연했다. 라선도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진 않다고 생각했다. 이번 리뉴얼이 성공하면 잘한 선택이 될 것이고, 실패하면 잘못된 선택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설 자리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원래 자리가 없었으니.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요. 많이 안 좋으면 지금 가도 돼요."
"괜찮아요. 어젯밤에 작업한 거 리뉴얼 TF에 공유하고 업무 진행하겠습니다."
라선이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무리는 말아요."
리코가 웃으며 민트티를 한 모금하고는 컵을 들고 일어났다. 라선 계피 스파클링을 병나발을 하고 들이켰다. 속이 부글거렸다. 몸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를 시험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점심 전까지는 전달 가능한 형태의 흐름도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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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사 53분에 리뉴얼 TF 그룹방에 온보딩 개선 안 파일이 올라왔다. 게시자는 라선이었다. 파일을 열어본 토월은 그동안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기능 내부에서 편의성은 갖추어졌지만, 기능으로 이끄는 넛지는 없었다. 라선의 수정 제안은 타당했다. 웨일이 오후 3시에 TF 전체 회의를 하자고 말했다. 토월은 반호와 함께 라선이 보낸 초안을 두고 보완해야 할 점을 논의했다. 화면을 넘기는 방식이 슬라이딩이 나은지, 버튼 클릭이 나을지 고민했고, 일러스트로 표현할지 실제 화면으로 표현할지, 아니면 텍스트 중심이 나을지 검토했다. 온보딩 화면은 짧지만 강렬해야 한다. '비교'가 핵심이다. 다른 건 다 잊어도, 이 앱에서 비교 기능은 꼭 한 번 써봐야겠다는 흥미가 들게 해야 한다. 토월은 부자고고의 브랜드 스타일에 맞추어 시안의 방향성을 잡아나갔다. 반호가 빠르게 간단한 시안을 만들어 사전에 TF 그룹방에 공유했다. 시안을 본 소배가 확인했다는 체크를 달았다. 개발팀에서 디자인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을지, 살펴보고 올 것이다. 다들 식사도 거르고 일에 집중했다. 전운마저 감도는 듯했다. 추가 의견 사항을 마지막으로 검토하고 토월과 반호는 3시에 회의실로 향했다. 세안나와 소배도 일어나 회의실로 움직였다. 들어가니, 라선이 유리 칠판에 도식을 그리고 있었고, 웨일은 책상에 앉아 준비해 온 자료를 자리마다 올려두고 있었다. TF가 모두 모이자, 라선이 온보딩 개선안에 대해서 브리핑했다. 방향성에는 모두 공감하고 있었기에, 이견은 없었다. 중요한 건 어떻게 보여줄지였다.
토월은 스크린에 노트북을 연결해 시안을 띄웠다. 반호가 한 장씩 넘기면 각 시안의 장단점을 이야기했고, 토월이 디자인팀의 최종 의견은 텍스트 중심 안을 1안이라고 얘기했다. 라선이 쓴 문구를 돋보이게 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심플하게 재단한 홈화면과도 자연스럽게 잇기 위해서라도, 그 편이 나았다. 쓸데없는 기능 투어를 줄이고, 핵심만. 이번 리뉴얼의 본질을 첫 화면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다들 토월의 의견에 동의했다. 회의는 다섯 시 반이 되어서야 끝났다. 많은 부분이 결정되었고, 남은 부분은 개발팀이 구현하고 나서 다시 보기로 했다. 합의가 빨리 이뤄진 덕에 당초 예상했던 타임라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고, 웨일이 나가며 말했다. 2차 실제 사용자 사용성 테스트는 늦어도 다음 주 말에는 진행하는 것으로 WBS에 올라왔다.
회의도, 작업도 효율이 좋아졌다. 자리로 돌아온 토월은 미루고 있었던 평가표를 작성했다. 평가표 작성은 이번 주 목요일 퇴근 전까지였다. 토월은 세안나가 작성을 끝냈는지 궁금해졌다. 가능한 세안나와 상반된 평가를 내리고 싶었다. 그렇게 해도 평가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진짜 토월이 평가하고 싶은 사람은 세안나였다. 삼진 아웃제가 있었다면, 가장 먼저 세안나에게 공을 던졌을 테다. 세안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실력일 테다. 그건 토월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직에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는 것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어 수단이었다. 아직 라선에게선 그런 면을 기대하기 힘들어 보였다. 아마 웨일도 같은 생각이지 않을까. 도움은 되지만, 특출 나지는 않은.
소배의 탁월한 실력으로 온보딩 UX는 정확히 의도한 대로 구현되고 있었다. 세안나는 보다 간결하게 작동시킬 수 있는지를 지속해서 확인했다. 프런트엔드가 주전공은 아니었지만, 코드 가독성은 리뷰할 수 있었다. 1차 리뷰를 마치고 세안나는 메일함으로 들어갔다. 허니맨이 보낸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이전에 보낸 메일과 같은 제목의 리마인더였다. 이전 메일을 세안나가 열어 보지도 않아, 다시 전송할 것일 테다. 메일 제목은 '[리마인더] [피플팀] 수습 전환 대상 평가서 작성 요청[마감 9/6]'이었다. 클릭해 메일을 열고, 평가서를 받은 세안나는 채점 항목을 보지도 않고, 평균 점수인 3으로 모두 채웠다. 평가 의견에는 '성실하고, 개선의 의지가 상당함.'이라고 적었다. 다른 팀장들에게 책임을 넘기는, 비겁한 방법이었다. 타인을 평가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평가받고 싶지 않는 만큼. 메일은 회신한 뒤 세안나는 다시 개발 중이던 알고리즘을 손보기 시작했다. 인간보다 알고리듬이 우수하다고 믿었다. 인간은 신뢰하기엔, 지나치게 가변적이었다. 우연의 결과물이 그리 나쁘지 않기를 기도하는 일에는 취미가 없었다.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언제든 사람은 사라질 수 있다.
업무가 끝나고, 웨일은 허니맨과 함께 지하철로 걸어갔다.
"리뉴얼 작업은 잘 되어가고 있어?"
허니맨이 물었다.
"그럴지도."
"뭐야, 이 엄청나게 애매한 대답은?"
심히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허니맨이 말했다.
"얼마나 잘 되어가느냐의 문제라는 뜻이었어. 잘 되어가고 있는 건 분명해. WBS 좀 봐. 전사에 공유되어 있잖아."
웨일이 핀잔을 주었다.
"TF는 더 깊게 아니까, 뭐가 다른 게 이슈가 있나 싶어서 물어본 거야."
"그나저나 평가는 잘 되어가고 있어?
"응, 오늘 토월이랑 세안나가 제출했어."
"나만 제출하면 되네."
"아니, 아직 리코도 안 줬어."
"리코야 마지막 패를 쥐고 싶겠지."
"그렇다고 막 던지지 마. 리코야말로 아무 생각 안 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세안나가 한 줄로 그었어."
허니맨이 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웨일 넌 신경 써줘야 해."
간절한 눈빛으로 허니맨이 애원했다.
"바라는 게 있나 봐?"
뜻밖에 질문에 당황했는지 허니맨이 헛기침을 했다.
"종려나무 가지를 바라는 자격 있는 자들을 물리치면 안 되지."
두 사람의 모교 표어였다.
"자유는 진리로도 벨 수 없고."
웨일이 가장 좋아하는 또 다른 표어였다. 정문에 첫 번째 표어가 있었고, 후문에 두 번째 표어가 있었다.
"아냐, 난 바라는 거 없어. 그냥 회사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길 희망할 뿐이야."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잘 준비하고 있거든."
역에 도착했고, 둘은 헤어졌다.
혼자서 집까지 가는 남은 거리 동안 웨일은 생각했다. 자신의 삶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지금 받는 급여로 서울에 집을 마련할 수 있을까. 기획팀장과 피플팀장은 임원 대우를 해줘서, 벌이 자체는 대기업을 다닐 때보다 후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부동산 앱을 만들면서, 정작 자신이 살 집은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어설픈 조크 같은 상황이었다. 하루는 매일같이 반으로 접혔고, 시간은 앞으로만 흘렀다. 지하철 창에 비친 모습에서, 대학생이었던 자신이, 앞으로 늙어갈 자신이 겹쳐서 보였다. 아찔한 속도였다. 정신 차리자. 웨일은 양뺨을 짝하고 가볍게 때렸다. 고3 때 잠을 깨울 때 하던 버릇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땐 한 문제만 틀려도 세상을 잃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하나라도 맞추길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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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한 허니맨은 버블티를 마시면서 WBS를 보았다. 오늘 2차 실제 사용자 사용성 테스트가 예정되어 있었다. 리뉴얼 작업 착실히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웨일이 말했듯이, 종려나무 가지를 바라는, 자격 있는 자들은 물리치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자격 검증'이 필요하다. TF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기에,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허니맨은 외부에서 보는 자신의 시선이 반으로 쪼개진 시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되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있을 사람들이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평가하거나, 손을 놓고 있으니.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웨일이었는데, 그마저도 확실치 않다는 걸 지난 대화에서 확인했다. 라선이 유능한 인재인가. 허니맨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공유하는 기획서를 보아도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기본기가 탄탄한 것 이상을, 리코는 바라고 있었다. 신입이라면 몰라도, 경력직은 그래야 한다. 합리적인 기준이다. 웨일과 리코 모두 이번 리뉴얼 작업의 결과를 보고 최종 결정을 내릴 모양이었다.
이전의 테스트가 무참하게 실패한 탓인지 라선은 아침부터 초조해 보였다. 적당한 긴장감 이상의 불안으로 번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잠시 후 테스트 참가자들이 도착해 회의실로 들어갔다. 두 시간이 지나고 테스트가 끝났다. 참여자가 돌아가고 나서, 개발팀이 분석을 시작했다. 허니맨은 라선의 상태를 볼 겸, 괜히 근처를 어슬렁 거렸다.
그때 라선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소배에게로 갔다.
라선은 소배를 향해 팔을 들어 올렸다.
짝!
두 사람은 하이파이브 쳤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