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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셨죠. 대표님?"
초율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네 이 대표님은 10분 뒤에 오시는 거죠?"
"사전에 먼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예전부터 말씀드린 대로 저희 측에서는 백방에 넥스테이트를 매각하는데 열려 있습니다. 그건 넥스테이트 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백방 측에서 결정을 미루시면, 저희로서도 인수의사가 있는 다른 기업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고려해서 이번 협상에 참여해주셨으면 하고 부탁드립니다."
제강은 이전부터 부자고고를 매수할지 고민이었다. 치고 올라오는 경쟁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 그 기업을 통째로 먹어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문제는 넥스테이트가 그만한 가치가 있느냐였다. 아필과 같은 단순히 기본적인 뼈대만 따라한 앱이라면 백방이 언제나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부자고고도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리뉴얼을 통해서 부자고고는 백방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걸 입증했다. 현재 백방의 비즈니스 모델로는 더 이상 회사를 키우기 어려웠다. 부동산 부분에서 지속적으로 기술을 개발해 시장을 앞서 나가는 것에는, 현 상황에서 한계가 있다. 새로운 인력을 뽑아 투자를 하는 것보다, 이미 독보적인 기술을 지닌 기업을 사는 것이 경제적이었다.
넥스테이트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엔젤윙즈는 부자고고의 월간 이용자 수가 100만 명을 넘었을 때부터 계속해서 접촉해 왔다. 초율이 압박을 준 것처럼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었다. 백방이 세계 1위 스트리밍 서비스인 히트플릭스 인수 기회를 놓친 블랙씨어터가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시장은 빠르게 변했고, 백방의 속도는 느려지고 있었다.
"저희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습니다. 다만 솔직한 말씀으로는, 지금 넥스테이트 측에서 제시한 금액이 다소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부분 아마 이 대표님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제가 조정을 도와드릴 테니, 백 대표님도 여유를 가지고 이야기 나누시면 될 듯합니다."
적지 않은 투자금을 부은 만큼, 엔젤윙즈는 넥스테이트의 매각을 누구보다도 원할 것이다. 초율이 적극적으로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네 물론이죠."
정확히 10분 뒤 회의실 문이 열렸고, 이 대표가 밝게 웃으며 들어왔다. 음흉한 속을 숨기고 있는 듯한, 이 대표의 눈빛은 언제 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간단하게 인사했고, 초율이 바로 회의를 진행했다.
"이번 리뉴얼 덕에 인기가 대단하던데요. 축하드려요."
제강이 빈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아요. 백방과 비교하면 갈 길이 한참 멀죠."
이 대표가 눈웃음 짓고는 말을 이었다.
"검토는 좀 해보셨나요?"
제강은 안경테를 만졌다.
"했죠. 재무상태가 여전히 탄탄하던데요. 저희도 인수 의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금액으로 어려워요. 조금 과하게 부르신 게 아닐까요."
"어떤 용감한 사람이 인수합병에서 호가로 장난칠까요. 전 겁이 많아서 데이터 기반으로만 추정한 자산 가치를 불렀습니다. 백 대표님도 잘 알다시피, 데이터는 사람보다 솔직하잖아요. 부동산에서든, 사업에서든."
눈을 마주 보고 이 대표가 말했다.
"이 대표님이 제시한 금액의 근거는 엔젤윙즈에서도 충분히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매각 금액을 계속해서 올려왔던 것이고요. 그렇지만 이번 금액은 다소 높은 감이 없지 않은 게 사실이에요."
초율이 제강을 대신해 말했다.
"낮출 의향은 없으신가요?"
제강이 이 대표에게 제안했다.
"얼마를 생각하고 계시죠?"
이 대표가 되물었다.
"20억은 빼줘야 할 듯합니다."
단호하게 제강이 말했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우리도 마지노선이란 게 있다고. 초율이 이 대표를 바라보았다. 이 대표가 환하게 웃었다.
“정 그러시다면, 팔지 않겠습니다.”
이 대표를 보고 있던 초율의 눈이 커졌다, 제강은 당황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사달라고 부탁하던 회사였다.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다? 살 수는 있지만 이 정도 금액으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백방은 저물고 있고, 넥스테이트는 뜨고 있습니다. 이번에 그걸 확실히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백방이 지금 넥스테이트보다 나은 건 자금력뿐입니다. 나중에는 그 마저도 뒤처질 수도 있죠.”
어디서 홈쇼핑 멘트를...
“조금 더 고민해 보시고, 답을 주셔도 됩니다. 다만 너무 늦지 않게요.”
이 대표가 선심 쓰듯 말했다.
“혹시 NK 측에서도 연락이 왔나요?”
제강이 멍청한 소리인 줄 알면서 물었다.
“아직까지는 없네요. 소문만 있고.”
"그럼...곧 다시 연락드리죠."
제강이 망설이다 말했다.
회의가 끝났고, 초율과 이 대표와 인사를 나눈 뒤, 사무실로 돌아왔다. 제강은 펜을 만지작거리며 셈했다. 아니 점쳤다. 백방의 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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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너무 강하게 나간 거 아니에요?"
초율이 백방 사옥을 나가며 이 대표에게 말했다.
”그랬나요. 그렇지만, 사실인 걸요. 이 가격에 사지 않으면, 매각할 이유가 없어요. 엔젤윙즈도 제 값 받고 팔고 싶잖아요?“
이 대표의 자신감은 감칠맛이 났다. 그걸 믿고 투자했다. 이른 엑시트를 원한다는 점에서도 서로의 니즈가 맞았다.
"라선 언니는 잘하고 있나요?"
초율이 라선의 안부를 물었다.
"멋진 사람을 소개해줘서 고마워요. 이번 리뉴얼도 라선 씨의 공이 커요."
"정말요? 그건 몰랐네요."
"퀵펜슬은 인재들의 무덤인가 봐요."
농담처럼 이 대표가 말했다.
"이젠 진짜 무덤이 되어가고 있죠."
"그렇게 처참한가요?"
"말도 마세요."
초율은 손사래를 쳤다. 둘은 대로를 건너는 횡단보도에서 헤어졌다. 화창한 날씨였고, 초율은 현장에서 퇴근해 데이트를 할 예정이었다. 자신이 인재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직장을 옮기고 나서,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생각의 기반에는 세 배를 뛰어넘은 월급과 착실하게 몸집을 불리고 있는 투자 수익이 탄탄하게 자리 잡혀 있었다. 순풍을 타고, 항해 중이었다. 죽는 순간까지 더 돈을 벌고 싶었고, 부자인 채로 죽고 싶었다. 이 대표도 같은 말을 했었다. 자신의 꿈은 부자로 죽는 거라고. 솔직함이 이 대표의 매력이자, 강점이었다. 백제강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 참, 언니는 꼭 잘 챙겨주세요."
리코는 대답 대신 손인사를 하고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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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율과 헤어지고 나서 리코는 택시를 타고 45분을 이동해 이북동에 있는 허름한 태권도장을 찾았다. 도장 안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매트에 바르게 앉아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다리를 벌린 채로 허리를 좌우 발을 향해 번갈아 굽혔다. 스트레칭을 마친 남자는 일어나, 허공에 대고 발차기를 했다. 묵직한 발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변하지 않는 솜씨였다. 사범은 여전했다.
"쌩쌩하시네요."
리코가 인사했다.
"너도 얼굴 좋아 보인다."
"일이 잘 풀리고 있거든요."
"반가운 소식이네."
"사범님은 좋은 소식 없어요?"
"있지. 이제 여기 문 닫아."
리코는 조금 놀랐지만, 티 내지 않았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덴 이유가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자신을 놀리던 양아치를 때려눕히고, 미친듯이 발로 찼던 것처럼.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집안 사정이 나빠졌고, 국제학교에서 일반 학교로 전학하게 되었었다. 자기소개를 마치고 난 다음 쉬는 시간에 리코는 '물리적 폭력'을 담은 진짜 차별을 당했다. 맞는 건, 그런대로 참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매일 폭우처럼 쏟아지는 차별 속에서 들린 '너네 아빠, 얼마 주고 엄마 사 왔냐'라는 말은 참을 수 없었다. 맞기만 하던 만만이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사람을 팬 날, 리코는 분노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 사건 하나로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했다. 따돌림은 집요하고, 끈기 있게, 리코를 물고 늘어졌고, 의식을 갉아먹었다. 부모는 돈을 벌기 위해 바빴고,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사범을 만났다. 부모는 리코를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사범이 막 도장을 개관했다. 등록비와 강습비는 무료였다. 개관 특별 행사가 아니라 그냥 무료였다. 부모는 리코를 도장에 맡겼다. 전면 무료인 도장을 두고 사람들은 국회의원 아들이라느니, 사이비 교주라느니,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으로 수군거렸다. 리코는 나중에서야 사범이 돈을 필요가 없을 만큼 부자였기에, 무료로 도장을 운영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북한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보다 더 뒤에 알게 되었다.
도장에는 가난한 아이들로 가득했다. 평균 생활 수준이 동네이기도 하거니와, 무료라면 질이 낮다는 편견에 괜찮은 집에 사는 아이들은 등록하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리코는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했다. 국제 학교에서는 천성이 밝아 교내에서 친구가 아닌 아이가 없는 아이였다. 사범은 벽에 담쟁이처럼 붙어 있는 리코를 유심히 보다, 어느 날 따로 불렀다.
"단예는 관찰력이 좋아서, 조금만 집중하면 금방 실력이 늘 거야."
의미 없는 말이었다. 리코는 태권도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곳은 그냥 학교와 집 사이의 시간을 메워 주는 임시 정거장 같은 곳이었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사범이 리코의 어깨를 꽉 잡아주었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리코의 속에서 작고 미세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사범이 리코를 때렸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아이들이 멀리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았다.
리코는 가까스로 몸을 추슬렸고, 사범은 다시 강습을 시작했다. 리코는 서늘하게 가슴을 베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사범의 동작을 따라했다. 그렇게 시작한 태권도가 리코의 장기가 되었고, 방패막이가 되었고, 무기가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쯤 친구 한 둘을 사귀었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학생회장도 되었다. 밝은 모습을 완전히 되찾았고, 속이 꽉 찬 자신감을 얻었다.
사범이 엄청난 부자란 사실을 안 날, 리코가 물었다.
"부자라서 가장 좋았던 게 뭐예요."
사범은 잠시 생각하고 대답했다.
"죄책감이 들 때, 돈으로 씻어낼 수 있다는 거."
리코는 가방에서 티셔츠와 반바지를 꺼내며 말했다.
"몸 좀 풀고 싶어서 왔어요. 도복 좀 빌려주세요."
"요즘도 하니?"
"매일 하죠. 집에서. 벽에 미트 달아뒀다고 얘기 안 했었나요?"
"띄엄띄엄 오는데, 기억할 리 없지."
"어르신이 관심이 없으신 거죠."
리코가 환하게 웃었다. 탈의실로 들어가 도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리코는 머리를 질끈 묶어 올렸다.
어떠한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여유는 잃을 것이 없을 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잃어도 상관없을 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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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코가 매트 위에서 돌개차기를 하고 있을 때, 허니맨은 지시대로 회사 게시판에 '특별 공지'를 올리고 있었다.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고 발을 찼다. 짝.
침을 삼키고 '등록' 버튼을 클릭했다. 딸각.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