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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휘목 Oct 26. 2024

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20화

[특별 성과금 지급 안내]


허니맨이 올린 게시글의 제목이었다.

 뜬금없는, 그러나 반길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리뉴얼 이후 3개월 동안 매출은 두 배 증가했다. 다들 내년 월급은 꽤 오르려나 하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과금이라는 의외의 폭죽이 터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임금 상승분을 성과금으로 퉁치려는 계획이 아닐까 의심했다. 아무리 실적이 올랐다고 해도, 단기간 바로 지급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는 게 주장의 근거였다. 그러나 그 일부를 제외하고는 칵테일파티 효과처럼 듣고 싶은 말만 들렸다. 실제로도 칵테일파티처럼 들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성과금으로 무엇을 할지 이야기했다. 어떤 사람은 명품 가방을 살까 고민했고, 어떤 사람은 새로 오픈했다는 오마카세 집을 알아봤다. 유럽 여행 경비로 쓴다는 사람도 있었고, 새 골프 장비를 장만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사용처를 결정했다. 라선은 마땅히 떠오르는 사용처가 없었다. 아버지의 사망 보험금을 제외하고, 그걸 감히 목돈이라고 부를 순 없으니까, 이번 성과금은 라선이 노력으로 얻은 경제적 보상 중에 가장 큰 규모의 금액이었다. 소규모의 부를 체험했다. 한 번에 큰돈이 들어온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이 정도만 받아도 이렇게 기쁜데, 십억, 아니 백억이 한 번에 들어오면 기쁨이 온몸을 찌릿하게 관통할 것이다. 일확천금이 현대인들의 소망이 된 것은 논리적 추론의 결과였다. 성과금으로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타인의 소비에 휩쓸린 라선은 평소 월급과 다르게 돈을 '쓰고' 싶어졌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제지할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옷이었다. 옷 잘 입기로 유명한 토월을 볼 때, 듣 생각이었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차려입은 테가 났다. 특히 연한 푸른색의 셔츠는 갖고 싶어 손이 간질거릴 정도로 탐났다. 회사에 라선이 입고 다니는 옷은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슬랙스 바지 각각 두 벌씩이었다. 출근 준비에 무엇을 입을 고민할 필요 없기에 편리했다. 그러나 가끔은, 아주 가끔은 꾸미고 싶을 때가 있다.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퇴근하고 나서, 라선은 백화점으로 갔다. 깨끗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과 벽, 고대 신전을 연상케 하는 공들여 다듬어진 이음새를 볼 때마다, 라선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한테도 눈치를 보는 것 같은 자신이 싫어서 백화점을 찾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니, 없었다.

  토월이 즐겨 입는 브랜드는 명품은 아니지만 꽤 비싼 브랜드였다. 다시 말해 평소에는 쳐다보지 않는 것이었다. 라선은 머뭇거리다 매장으로 들어갔다. 깔끔한 니트를 입은 직원이 다가와 친절히 인사를 건넸다. 의류 판매에서 제1 원칙은 '옷을 입게 하는 것'이고, 제2 원칙은 '옷을 입은 모습이 천상의 그림이라도 되듯, 찬사를 쏟아붓는 것'이다. 직원은 정확히 두 가지 원칙을 지켰다. 하늘빛 오픈 칼라 셔츠를 입혔고, 이렇게 잘 받는 분은 드문데, 손님 지금 되게 잘 어울리세요. 안에 하얀 티셔츠 입어도 예쁠 것 같아요. 라는 칭찬이 흘러나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라선은 바라보았다. 직원의 칭찬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전보다는 나아 보였다. 적어도 그렇게 느껴졌다. 옷이 마음에 든 라선은 가격을 확인했다.

'₩ 327,500'

가격을 확인한 라선은 살 수 없었다. 예상한 가격보다 훨씬 더 비쌌다. 과연 이 가격을 주고 산 옷이 내게 이 가격만큼의, 아니 그 이상의 가치를 줄 수 있냐 되묻게 되는 가격이었다. 턱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라선의 의식이 머릿속에서 한 번 굴렀다. 라선은 옷을 벗어 직원에 주고, 조금 더 둘러보는 척을 하다 매장을 나왔다. 라선은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찾아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진열된 상품들이 자신을 구매해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합리적인 소비라는 게 가능할까. 에스컬레이터 옆에서 향수 매장 직원이 시향을 권했다. 머리에 안개가 끼이는 것 같았다. 라선은 사양하고 바깥으로 나가, 투명한 바람을 마셨다. 생수처럼 공기도 페트병에 담아 파는 날이 오면, 탁한 공기만 마시고 살 것이다. 아직 그런 세상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무엇을 사야 할지 고민했다. 그냥 사지 않는 것이 답일까.

"무엇이 필요한지를 먼저 고민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하늘에서 고양이 벼락이 떨어졌다. 타아와는 안 그래도 무거운 어깨 위에 앉았다. 따뜻한 물주머니를 올려둔 것 같았다. 기분 좋은 감각은 아니었다. 라선은 타아와의 조언을 곱씹었다. 욕망의 출처가 타인이었기에, 잊고 있었던 소비의 기준이었다.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 이것도 쉬운 질문은 아니었다. 도착할 때까지 답을 찾지 못했고, 노트북을 켰다. OS를 로딩하는 화면 뜬 구슬이 천천히 돌고 있었다. 10년 동안 쓴 노트북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1년 동안 알바를 해서 모은 돈으로 산 것이었다. 노트북을 사기 전까지 라선은 책으로만 공부해서 칠 수 있는 과목을 수강했었다. 필수 교양이었던 프로그래밍 과목은 2학년으로 미루었다. 태어나서 산 물건 중에 가장 비쌌다. 그만큼 애착이 있었다. 워낙 깨끗하게 쓴 터라 흠집도 없고, 잔고장도 없었다. 늘어난 태엽처럼 속도가 느려진 것이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었다. 로딩이 끝났고, 까만 바탕화면이 떴다. 완전히 켜지는 데 50초가 걸렸다. 주 7일 노트북을 사용하니, 일주일에 350초, 한 달에 1,400초, 1년에는 16,800초 약 4시간 40분이었다. 책 한 권을 읽고, 블로그에 올리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부팅 속도를 10분의 1 줄이기 위해, 새 노트북을 사는 건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까. 무슨 노트북을? 가격 비교 사이트를 서핑하던 라선은 비싸기로 악명 높은 NAP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삼백이 넘는 NAP은 단 한 번도, 후보군에도 들어오지 못했던 기종이었다. NAP를 넘보게 된 건, 순전히 갑자기 굴러들어 온 성과금의 영향이 컸다. 겉핥기 식으로 다른 제품을 몇 번 보고 나서, 결국 NAP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색상과 옵션을 재확인하고, 구매 버튼을 누르려고 했을 때, 라선은 머뭇거렸다. 이것도 설마 사치일까. 한 번 '사치'라는 단어에 걸리니까 차마 결제할 수 없었다. 백화점에서 입은 옷을 떠올렸다. 무엇이 다를까.


라선은 결제창을 넘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끙끙 앓다가 노트북을 껐다. 이게 올바른 선택인지 확인받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어깨 위 다소곳이 앉은 고양이는 무엇도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그걸 왜 저한테 확인받으려고 해요?"

NAP을 새로 구매하는 게 옳은 선택인지 물어보자, 세안나가 툭 받아쳤다.

"그야 저보다는 전문가니까..."

뒷걸음치는 라선이 답했다.

"아파트도 전문가 말 듣고 사는 거 아니잖아요. 무엇을 사든, 본인이 확신이 서지 않으면 안 사는 게 좋아요."

또 타인에게 결정을 미뤘다는 사실을 깨닫고 라선은 민망해졌다. 세안나가 키보드를 손가락으로 몇 번 두들겼다 라선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조언이 필요하다면, 전 개발자고 개발 환경 구축이 편해서 NAP만 썼어요. 업무 생산성을 향상했고, 손발이 편해졌죠. 그래서 만족해요. 소비가 아니라 투자였거든요."

조금은 부드러운 톤으로 세안나가 덧붙였다.

소비가 아니라 투자. 멋진 전환이었다. 그러나 미숙한 소비자, 라선에게는 자기 합리화의 근거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누구보다 자신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라선은 처음으로 돌아가 '필요'에 집중했다. 부팅 속도가 빠르고, 인터넷 창을 수십 개 켜둔 채로 문서 작업이 가능한 노트북은 '필요'했다. LLM를 로컬로 돌릴 노트북은 필요하지 않았다.

새 노트북까지는 합리적이고, NAP까지는 무리다. 경계선을 긋자 마음이 편해졌다. 다시 제품 사양을 꼼꼼히 따진 라선은 '합리적인' 가격대의 '합리적인' 노트북을 사는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 자기 합리화와 합리적인 선택은 한 끗 차이었다. 자기 합리화에 취한 경영자가 내린 합리적인 결정보다 위험한 게 없다는 농담은, 평범한 직원, 개인의 삶에도 유효했다.

그런 면에서 리코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자기애로 똘똘 뭉쳐진 사람으로 보이지만, 선택은 언제나 날카로웠다. 감정에 충만하지만, 이성만 남은 것도 같았다. 돈이 많으니까, NAP를 살까 말까 고민도 하지 않겠지. 라선은 새삼 리코가 부러워졌다. 다부진 동작에 넘쳐흐르는 여유, 날 때부터 잘 사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무기였다. 아마도 리코도 괜찮은 집에서 나고 자랐을 것이다.

 지지리 못 사는 집에서 태어났기에, 지지리 못 사는 동네에서 또 다른 지지리 못 사는 동네로 자주 옮겨 살았다. 세 달 정도 머문,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한 동네에는 무료로 운영되는 태권도장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부모 없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내던져진 아이들이 가득했다. 그 아이들 중 누구도, 지금의 리코가 지닌 여유를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이다. 라선은 그 무리에 남았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라선의 인생은 가난이라는 '무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간절함이 부족했는지, 아직도 그 무리 언저리를 떠돌고 있었다. 가난한 사고에 수감되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또, 또, 또, 개미지옥에 빠져들어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월급의 앞자리가 바뀌었고, 성과금까지 받았다. 나쁘지 않다. 자리도 잡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차근차근 쌓아나가면, 더디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노년에 요양 병원에 피붙이 하나 없는 채로, 생의 결말을 맺는다고 해도, 결말까지 갈 수 있는 여력이 있어야 했다. 라선은 그 여력을 축적하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 노트북이 도착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박스를 개봉했다. 푸른 헤어 라인이 돋보이는 제품이었다. 신상 제품이 주는 새 기쁨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신선했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구매는 앞으로 한동안 없을 것 같았다. 혹시나 모를 반품이나, 교환을 대비해 받았던 상자는 원래 상태로 잘 닫고는 옷장 안에 두었다. 본격적으로 전원을 켜고, 기본적인 프로그램을 깔았다. 빨랐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성능에 라선은 감탄했다. 웹 브라우저 설치를 마치고, 경제 주간지 한국 이코노미의 웹사이트에 들어갔다. 한국 이코노미를 시작 사이트로 설정하려고 했을 때, 뜻밖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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