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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휘목 Nov 02. 2024

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21화-


''백방 넥스테이트 인수 결정, "빅데이터 기반으로 프롭테크의 새 지평 열 것"'

이 기사가 발표되고 난 다음 날 아침부터 회사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성과금의 목적을 의심했던 사람들은 비로소 진실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리코는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허니맨이 리코를 대신해 오후에 타운홀 미팅이 있을 예정이라고 알렸다. 사람들은 회사 지분을 가진 허니맨과 웨일도 한 패라고 여겼다. 토월은 M&A 소식에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다. 대체 둘에게 얼마나 떨어지기에, 입 싹 다물고 돌아서느냐는 비난을 퍼부었다. 비슷한 배신감을 다른 사람들도 공유하고 있었다. 설명이 필요했다.


 오후 2시 마침내 리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홀 앞 무대 위에 선 리코는 평소보다 더 간소한 차림이었다. 옆 사람이 당장에라도 할 말이 있는지, 옴짝달싹거렸다. 라선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리코는 마이크를 잡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덕분에 부자고고가 대중들의 인기를 얻었고, 넥스테이트가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도약했습니다. 운 좋게도, 저희의 성장에 주목한 백방에서 인수 의사를 표했고, 여러 조건을 깊게 검토한 후 매각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백방의 자금력을 발판으로 넥스테이트는 이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체 올라설 것입니다. 부자고고 역시 앞으로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박수칠만 한 일이었다. 하지만 박수 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회사의 입장에 서 있지 않았다. 모두 '내가 잘리는 건 아니겠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인수 절차는 다음 주부터 시작될 예정입니다. 인수합병 이후 저는 CEO에서 물러나고자 합니다. 앞으로는 저 대신 백방에서 선임한 능력 있는 분께서 경영을 맡아주실 것입니다. 고용 승계를 조건으로 걸어두었으니, 너무 염려치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역량 있는 직원들을 감히 함부로 내보내진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리코는 전체 직원 '몇 프로'가 고용 승계를 보장받는지, 역량 있는 직원의 기준이 무엇인지, 어떤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에 대해 추가 질문이 이어졌지만, 대답은 여전히 모호했다. 노동조합의 부재가 위기에 놓인 개별 노동자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사람들은 깨닫고 있었다. 역량 있는 직원은 '필수 인력'을 뜻하는 것일 테다.

타운홀 미팅이 끝나고, 사무실은 더 뒤숭숭해졌다. 경영상으로 하자가 있어서 매각된 것은 아니니, 구조조정이야 하겠냐는 일말의 희망을 스스로에게 비추는 사람도 있었다. 경영진만 교체되고 나머지는 그대로 간다, 혹은 대기업 혜택을 받아 더 좋은 처우를 받는다. 이상적이었다. 현실에서 그런 사례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대체 가능한 존재들은 인수 회사의 인력으로 바뀔 것이다. 그 편이 관리하기 편하니까.

 라선은 백방 기술 블로그를 들어갔다. 이전에 테크니컬 라이터 네트워크 밋업에서 백방 테크니컬 라이터를 만난 적 있었다. 현재 올라간 글을 작성한 사람 중 그 사람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적으로 추측하자면, '직접 글 쓰는 대신 글쓰기 코칭으로 업무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였고, 현실적으로 추측하자면, '일자리를 잃었을 것이다'였다. 등록해둔 명함 정보가 있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블로그에 게시된 글은 누가 코칭해줬다고 보기에는 너무 날것이었다. 그때 만난 테크니컬 라이터는, 매우 높은 확률로, 지금 백방에 없을 것이다. 있던 사람마저 내쫓았다. 새로운 테크니컬 라이터를 들일 리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가장 먼저 해고할 잉여 인력 취급을 받을 것이다.


 "어디로든 굴 파고 튈 준비를 해란 뜻이네."

 세안나가 비꼬듯 말했다. 세안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함부로 내보낼 인력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재 부자고고의 기술력은 온전히 백방으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연봉을 더 올려서라도 잡아야 할 인재였다. 전문성은 회사 내부에서만 통하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도 통해야 진짜 전문성이다. 세안나는 전문가였다. 토월도 마찬가지였다. 디자이너 처우 개선을, 지속적으로, 극단적으로, 요구하면서도 잘리지 않았던 것은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직 내 뛰어난 사람은 충분히 많았다. 자신의 고유한 영역이 있었고, 성과를 냈다. 라선은 그런 능력이 있다고 자신하지 못했다.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운 좋게 하나를 건졌다. '리뉴얼'. 그러나 '리뉴얼'은, 웨일이 회의에서 말했던 대로, 라선만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라선이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같은 문제 제기가 나왔을 것이고,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것이다. 라선은 대체 불가능한 토큰이 아니었다.


새 노트북이 선사했던 행복감은 이젠 낡은 것으로 변해 있었다.


인수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CEO와 기획팀, 인사팀이 한 번에 바뀌었다. 자신의 차례가 오기 전, 먼저 떠나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회사에 남은 사람은 갈 곳이 없거나, 잘일 이유가 없는 사람, 두 부류로 나눠졌다. 라선은 전자였다.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한밤 중에 깨어났다. 어두운 방안이 꿈처럼 보였다. 갑작스러운 복통이 느껴져, 화장실로 가 구토했다. 사는 거 한 번 제대로 빡세네. 스스로를 조소했다. 꾀부리지 말자, 미래에서 걱정을 빌려오지 말자. 어차피 일어날 미래라면 그때 가서 고통받을 테니, 지금은 버티자. 최대한의 나를 보여줘야 한다.

 출근한 라선은 밝게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서 평가하고 있을지 몰랐다. 부자고고를 운영하는 데 있어, 절대로 누락되서는 안 되는 인원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부자고고의 리뉴얼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마지막으로 내려온 업무는 웹 개선 방향을 잡아보라는 것이었다. 앱을 리뉴얼하며 조금 개선하긴 했어도, 웹은 아직 손 볼 구석이 많았다. 확장할 수 있는 구석도 보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사람들을 모아 회의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라선은 혼자서 구조도를 정리하며 준비했다. 


점심시간 라운지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을 때, 소배와 반호도 도시락을 들고 와 같이 먹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셋이서 도시락을 함께 먹기도 했다. 각자의 삶에 무신경한 터라 식사를 하면서도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다. 식사 속도가 느린 라선은 천천히 밥을 씹었다. 밥은 다 먹은 소배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새로 들어온 디자이너는 어떠세요?"

반호에게 한 질문이었다. 디자인팀 한 명이 자발적으로 퇴사했고, 백방에서 내려온 디자이너가 그 자리를 채웠다.

"사람 좋으세요. 일도 잘하시고. 개발팀은 어때요. 프런트엔드 한 분 오셨다던데."

젓가락으로 진미를 집으며, 반호가 답했다.

"네, 좋으신 분이죠. 일도 잘하시고..."

소배는 말을 아꼈다. 같은 포지션의 인력이 들어왔다는 건, 곧 내보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두 분만 하겠어요. 디자인 시스템 구축하는 거 쉽지 않잖아요. 그걸 해냈잖아요."

옆에서 듣고 있던 라선이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문제죠. 시스템이 있으니, 누가 하더라도 상관없죠. 라선이 잘 정리해 준 덕에 쉽게 적응할 거예요. 새로 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소배가 대답했고, 반호가 끄덕였다. 밥을 다 먹은 두 사람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라선은 남아서 식사를 마저 끝냈다. 소배와 반호는 차례로 면담을 받았고, 그 다음 주에 회사를 나갔다. 자의든, 타의든, 둘은 떠났다. 아직 면담을 받지 못한 건, 인사팀이 자신이 존재하는 걸 모르고 있어서가 아닐까 라선은 생각했다. 새로 부임한 CEO는 츠렌을 사용하는 조직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새로 영입한 직원들은 모두 본명을 사용하게 했고, 츠렌으로 서로를 부르던 사람들은 츠렌으로 부르다가, 본명을 섞어 부르기 시작했다. 오직 츠렌으로만 불리는 사람은 세안나가 유일했다. 츠렌으로 불렀을 때 유지할 수 있는 거리감은 업무에 도움이 되었다. 친하지는 않지만, 친근함은 느낄 수 있는 적당한 거리감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이전의 조직문화를 그리워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라선도 츠렌을 좋아하게 되었다. 비록 자신은 본명을 쓰면서도.

주변 환경 바뀌어 가면서, 라선은 홀로 남겨지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드러나는 것을 느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인사팀이 라선을 불렀다. 

뿔테를 쓴 인사팀장은 온화한 표정으로 커피를 내주었다. 긴장한 라선은 계피를 마시고 싶었다. 위로 음료가 필요했다.

"라선 씨가 현재 담당하고 있는 업무가 뭐죠?"

"현재 웹사이트 개선 방안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보니까 테크니컬 라이터로 채용되었는데, 지금 하는 일이랑 크게 관계가 있나요?"

"정보 구조도를 짜고, 내부 텍스트를 다듬는다는 점에서,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네 그 정도까지면 됐어요. 그냥 예의상 물어본 거예요."

침착하자.

"이전에 백방에도 테크니컬 라이터 분이 계셨어요. 잘은 모르지만, 대충은 알아요."

밋업에서 뵈었던 그 분일 테다.

"크게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지 않으시긴 했지만, 성실하셨겠겠죠."

인사팀장은 담담하게 말했다.

"단도진입적으로 말씀드리면, 부자고고를 운영하는데, 테크니컬 라이터가 필요할 것 같진 않습니다."

"다른 업무도 할 수 있습니다. 남는 자리가 있는 부서에 배치해 주시면 야근을 해서라도 맡은 업무를 다하겠습니다."

간절한 목소리로 라선이 말했다.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어떻게든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산다.

"테크니컬 라이터가 필요한 때가 오면, 그때 다시 뵙도록 하죠. 비자발적 퇴사로 사유를 적어드릴 테니. 실업급여 잘 챙기셔서 좋은 곳으로 가시길 바랍니다."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퀵펜슬에서 나올 때와 조금도 다른 게 없었다. 아니, 다른 게 하나 있었다. 넥스테이트는 계속 다니고 싶은 회사였다. 인수 이후에 분위가 바뀌고 있어도, 디자인 시스템도 구축하고 리뉴얼 작업도 하면서, 애정이란 게 생겼다. 그런 곳에서 쫓겨난다. 무릎을 꿇고 빌기라도 해야 할까. 그러면 달라질까. 라선은 망설이나 의자를 뒤로 밀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부탁드립니다. 계속 일하게 해 주십시오. 뭐라도 하겠습니다."

라선은 흐느끼지도 않았다. 당황한 인사팀장은 어쩔 줄 몰라 다른 직원 불러다 라선을 달래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인사팀장이 가고 나서도, 무릎을 꿇고 있던 라선은 곧 퇴근 시간이라는 말에 천천히 일어나 자리로 돌아갔다. 그 사이에 이야기가 돌았는지, 사람들이 눈치를 보았다. 라선은 6시를 꽉 채우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직 서명도 하지 않았고, 구두로만 해고를 통보했다. 정신이 닳아 해져서, 걷을 때마다 휘청거렸다. 발에 힘을 주는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하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앞사람과 부딪쳤다. 라선은 연신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뭐가 죄송한지 모르지만, 다 죄송했다. 태어난 것도, 살아 숨 쉬는 것도. 스크린도어에 머리를 한 번 찍고, 또 한 번 찍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찍으려 했을 때, 문이 열렸고 그대로 박치기를 하고 말았다. 이건 상해죄인가, 그럼 얼마를 물어야 하지? 이라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뒷골을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라선의 머리는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다. 대신 잊을 뻔 얼굴이 한 손으로 라선의 머리를 막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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