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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휘목 Nov 09. 2024

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22화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막은 것은 리코였다. 

"조금 늦어서 못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네요."

예의 상냥한 눈빛으로 리코가 인사를 건넸다. 지하철을 타려던 라선은 지하철에서 내린 리코를 따라 승강장으로 뒷걸음쳤다. 

"저를 보러요?"

"네 라선을요. 시간 괜찮으면, 어디 카페 가서 이야기할까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리코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뼛속까지 리더인가. 리코는 라선을 베이커리 카페로 데려갔다. 밥과 차를 동시에 해결하는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리코는 치즈 케이크와 치즈 셰이크를 시켰고, 라선은 계피빵과 계피 셰이크를 주문했다. 모두 합쳐서 29,000원이었고, 키오스크로 먼저 계산해야 했다. 라선이 자신의 것을 따로 계산하려고 하자, 리코가 일괄로 함께 결제했다. 

"용건이 있어서 찾아온 건 저니까, 제가 대접해야죠. 잘 지냈어요?"

"당연히 잘 못 지냈죠. 회사 넘어가고, 많이 바뀌었거든요."

라선은 속내를 감추지 않고 말했다. 지쳐 있었고, 다신 보지 않을 사람이라는 생각에 필터 없이 튀어나왔다. 

"새로 온 분이 잘 이끌지 못하고 계시나요?"

진심으로 걱정하듯 리코가 물었다. 정말 모른다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잘 이끄는 건 모르겠고, 퇴사자가 꽤 있어요. 자의로든 타의로든. 그리고 저도, 오늘 나가라고 들었어요."

"잘 됐네요!"

"네?"

라선은 귀를 의심했다. 잘 됐다고?

"리코! 심한 거 아니에요? 무책임하게 회사 팔아넘기고, 혼자서 돈 챙기고 떠났으면서. 지금 그 회사에서 오늘 잘린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예요!"

흥분한 라선이 소리쳤다. 리코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라선이 넥스테이트에 계속 잘 다니고 있으면, 데려오기 힘들잖아요. 그러니 해고당해서 다행이라는 뜻이었어요."

이건 또 무슨...

"우린 퀵펜슬을 인수할 거예요."

"우린?"

"유소랑 다일이요."

"유소랑 다일이요?"

"아, 웨일과 허니맨요."

라선은 처음으로 웨일과 허니맨의 본명을 들었다.

"근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

"라선을 기획팀장으로 모시려고요."

"저를요?"

"네, 지분도 같이 드릴게요."

너무 좋은 조건은 의심부터 해야 한다. 연대 보증 같은 걸 서서, 막대한 빚을 얻는다든지, 위험 요소는 무수히 많았다.

"웨일이 사장을 맡을 거예요. 저는 투자만 하고, 허니맨은 전처럼 인사를 담당할 예정이에요. 허니맨이랑은 아직 협의한 적은 없지만, 부탁하면 해주겠죠."

씨익 리코가 웃었다.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전부 진심 같았고, 전부 장난처럼 들렸다.

"제가 가장 믿을 만한 사람 중에 퀵펜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라선 뿐이에요. 이해도가 높으니까, 업무 수행도 빠르게 할 수 있겠죠.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리코가 퀵펜슬을 인수하면, 당연히 구조조정이 들어갈 것이다. 자신이 들어갈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한 사람을 내보낼 수도 있었다. 심리적 거부감이 뱃속에서 팽창했다.

"어때요. 좀 끌리시나요?"

포크로 케이크를 집어 먹으며 리코가 말했다.

"달콤한 유혹이길 바라요."

치즈의 당도가 만족스러웠는지 리코가 눈을 감고 음미하며 덧붙였다. 두 가지 의심이 들었다. 첫 번째 의심은 '왜 퀵펜슬을 인수하는지'였고, 두 번째 의심은 '왜 자신을 영입하려는지'였다. 라선이 나올 때, 퀵펜슬은 침몰하는 배였다. 퀵펜슬 인수는 엑시트에서 번 돈을 그대로 버리겠다는 뜻인데, 아무리 지금 퀵펜슬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해도 굳이 돈 낭비를 하려는 저의를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고용하는 이유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건, 그야말로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유였다.

"뭘 하려고 퀵펜슬을 인수해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다시 회사를 차리는 게 낫지 않나요? 거긴 이미 파산 직전이라 들었어요."

"퀵펜슬이 가진 특허가 필요해요. '인공 지능 기반 자동 컨텍스트 및 메타데이터 추가를 이용한 의미론적 메모 작성 시스템'"

그런 게 있었다고? 퀵펜슬이 보유한 특허라고 보기엔 너무도 전문적인 제목의 특허였다. 

"라선 말대로 파산 직전이라 꽤 저렴하게 나왔더라고요. 특허 매입 가격으로만 봐도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어요. 이미 인수 계약은 끝냈어요."

리코의 계산은 구체적이었고, 실행까지 마쳤다. 영입 제안은 농담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답 드리면 될까요?"

"이번 주말까지가 이상적이겠네요."

계피빵을 하나 씹고, 계피셰이크 한 모금해 입안에서 섞어 먹었다. 맛이 메롱이었다. 업무 미팅에 가까운 식사 겸 티타임을 마치고 라선은 리코와 헤어졌다. 리코의 결단력과 확신의 찬 모습이 진한 자국처럼 머리에 남았다. 

 라선은 퀵펜슬에 기획팀장이 되어 돌아간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거부감 사이로 모종의 우월감이 비집고 나왔다. 라선의 귀환은 신 차장에게는 복수에 가까운 충격을 줄 것이다. 자신이 해고 한 직원이 상사로 왔다. 코미디 영화 홍보 문구 같았다. 해고를 통보받은 날, 채용 제안을 받았다. 이것 또한 코미디 영화 홍보 문구 같았다. 정작 주인공이자, 관람객인 라선은 이 모든 상황이 전혀 웃기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것의 효과는 하루 만에 사라졌다. 인사팀에 새로 들어온 막내가 권고사직서를 내밀고, 작성 요청했다. 신입을 시킨 건 모욕을 주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라선은 고맙다고 말하고, 책상 위에 종이를 올려두었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두 번째 직장에서도 이전과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운명의 샌드백이 된 듯했다. 리코의 제안도 마찬가지였다. 리코의 말을 그대로 믿고 따라갔다가, 팽을 당할지도 몰랐다. 그래, 내가 제일 만만하지? 라선은 세상에 물었다. 세상은 답이 없었다. 도시락을 같이 먹던 동료들이 모두 사라졌고, 라선은 소박한 점심을 혼자 먹었다. 오직 생존을 위해서 사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맞는 말이었다. 라선은 오로지 아침에 깨어나고, 밤에는 잠드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살고 있었다. 헛헛했다. 선택을 해야 하는데, 모든 선택이 미래의 자신을 괴롭힐 거라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

 토월과 세안나는 여전히 관리자 직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백방에서 내려온 사람들도 두 사람을 무시하지 못했다. 세안나에게는 계속 남아주는 조건으로 연봉을 올려주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남이 잘 되면 진심으로 축하해 줄 줄 알아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 않았다. 건강에 가장 위험한 것 중에 하나가 가까운 사람의 지나친 성공이라는 농담에 마냥 웃을 수 없었다. 라선은 타인의 행복과 성공에 큰 아픔을 느끼곤 했다. 성인이 되면서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생각했을 때, 어김없이 비교 근성이 튀어나왔다. 위축되고, 구석으로 몰릴수록 비교의 칼날은 더 예리해졌다. 비교의 칼은 손잡이도 칼이었다. 라선은 자신도 무능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리코에게 입사 제안을 받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쉽게 해고당하는 사람'이라는 시선을 떼어내고 싶었다. 해고 통보를 받았다는 소식을 못 들은 것은 아닐 텐데, 세안나는 그것과 관련해서는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역시 남이다. 세상에는 '나'말고는 모두 '남'이었다. 그 사실을 매번 잊었다가, 매번 다시 깨닫는다. 

권고 사직서를 제출하지 못하고, 퇴근했다. 

입사 제안 수락 마감 기한까지 한 칸 앞으로 갔다.


가족이 있었다면, 친구가 있었다면, 뭐라도 이야기 나누지 않았을까. 라선은 없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 미래도 없네. 없는 것 목록에 없는 걸 더 추가해 나갔다. 라선은 없는 것 부자였다. 한 방면에서라도 부자라 다행이네. 농담조차 아닌 혼잣말에 웃음이 부서지듯 쪼개져 나왔다.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 못 보던 전기자전거가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피해서 가려던 순간 보냉백을 멘 자전거 주인이 나타났다. 자전거 주인은 라선을 보고 살짝 놀라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규인이었다.

"잘 지냈어요, 규인 씨?"

"그럭저럭이죠. 라선 씨는 넥스테이트 다니고 계신다면서요. 건너 건너 들었어요. 부럽네요. 초율도 그렇고."

"아뇨, 마냥 좋지는 않아요."

해고당했다고 말을 하려다 말았다. 굳이 알릴 필요가 없는 정보였다.

"그래도 퀵펜슬보단 훨씬 낫죠. 이번에 회사가 인수된다고 하는데, 잘릴까 봐 걱정이네요. 집사람이 애도 뱄는데."

규인이 별일을 별일 아닌 듯 말했다. 위태로운 미래를 안전하게 말하기 위한 태도였다. 악조건 속에서 오래 견딘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정서였다.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힘에 부쳐서, 루팡 잇츠도 뛰고 있는데..."

말을 흐리며 규인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테두리만 남은 표정이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네요."

규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한숨이 배이지 않은 말이 없었다. 저명한 생물학자가 한국에서 아이를 낳는 건, 수학 계산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잘못된 결정이라고 했다. 규인은 잘못된 결정을 내렸고,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체가 지닌 번식욕의 결과가 수학적인 측면에서 잘못된 결과라면, 그건 과연 규인의 잘못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신생아특례 대출 수단으로써만, 아이 낳는 행위만 합리적인 행위였다. 부유하지 않은 존재들은 사회적으로도, 생물학적으로도 거세된 채 살아가야 했다. 햄스터도 자신이 영양부족으로 죽을 것 같다고 판단되면, 새끼를 잡아먹는다. 인간은 새끼를 잡아먹지 못하기 때문에, 낳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경제적인 영양 부족 상태에 놓인 규인은, 자연 세계에서 자식도 물어뜯게 만드는 위기로 몰리고 있는 듯했다. 가난으로 수렴하는 세대를 태어나게 한 것이다.

 퀵펜슬로 돌아가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라선의 가슴 밑바닥에서 질긴 소영웅심이 일렁였다. 최소한 규인은 괜찮은 인력이라고 변호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퀵펜슬에 누군가를 남겨야 한다면, 규인이 남는 것이 마땅했다. 리코를 따라갔다 팽을 당하더라도, 작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라선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내일 비소식 얘기를 하고, 서로의 안부를 기원하며 헤어졌다. 보냉백을 멘 채, 자전거를 탄 규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쨌거나 버티고 있는, 강한 사람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책상에 앉은 라선은 스타트업 팽 당한 후기를 찾아보았다. 직장인 플랫폼 리사인드에서 이런저런 사례들이 올라와 있었다. 원년 멤버, 초기 멤버가 팽 당하는 사례로 흔했고, 지분을 주겠다고 이직 제안을 한 뒤, 실제로는 6개월 만에 해고시킨 경우도 있었다. 지분 얘기도 입사 뒤에는 말이 없었다고 했다. 받는 것이 지분인지 스톡 옵션인지 꼼꼼히 확인하라는 조언도 보였다. 지분을 나누는 방식도 중요했다. 지분 증여 시에는 받는 사람이 세금을 납부해야 하고, 양도 시에는 양도한 측이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납부할 세금과 지불 가능한 현금을 고려해,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리코가 어떤 방식으로 나눠줄지는 얘기해 봐야겠지만, 그전에 확인해야 할 것들은 모두 살펴보고 만나야 한다. 

지분 받는 거 한 번 되게 복잡하네.

밤늦게 법과 기사를 뒤적이다 라선은 곯아떨어져 잠들었다. 반쯤 졸린 상태로 출근하자마자, 인사팀으로 가 라선은 권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인수 이후 라선에게 맡긴 업무가 없었기에, 인수인계할 거리도 없었다. 그동안 구상했던 웹사이트 개선 방향은 외장하드에 옮겨 담았다. 개인 프로젝트에 가까웠기 때문에 회사 기밀 유출은 아니었다. 인사팀은 월 말까지 근무한 것으로 해줄 테니,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라선은 퇴근할 때까지 짐 정리를 했다. 작별 인사할 사람들은 이미 대부분 먼저 퇴사하고 난 뒤였다. 토월과 세안나를 제외하고. 토월은 라선에게 책상 위에 있던 장식용 카드 세 장을 주었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만든 마법 카드 시리즈라고 했다. 카드 뒷면은 녹색에 한국 전통 문양이 있었고, 앞면에는 민화가 그려져 있었다. 하나는 구름을 타고 있는 백룡, 다른 하나는 산등성이 위로 형광빛 태양이 떠있는 풍경, 마지막 한 장은 다람쥐를 머리 위에 올려두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흑묘였다. 각각의 카드에는 뜻이 있다고 하는데, 궁금하지 않았다. 운명을 점치기엔 삶이 빠듯했다. 고맙다고 토월에게 말하고, 라선은 세안나에게 갔다. 세안나는 언제나처럼 헤드폰을 끼고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라선은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헤드폰을 벗고, 세안나가 라선을 올려다봤다.

 "저 이제 회사 나가요."

 "아, 축하해요."

 뭐라고? 라선은 화가 난 표정으로 세안나를 쏘아보았다. 동정과 위로를 바란 건 아니지만, 조롱받길 원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이제껏 쌓였던 신뢰의 탑이 무너졌고, 라선은 화를 장전하고, 세안나를 정조준 했다.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세안나가 말했다.

 "퀵펜슬에서 만나요."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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