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포동 한현로 이중 빌딩 3층 공유 오피스 회의실에 리코와 웨일, 허니맨이 모였다. 리코는 싱글벙글했고, 웨일은 무표정이었고, 허니맨은 죽을 맛이라는 얼굴이었다.
"진심이야?"
허니맨이 리코에게 말했다.
"아무리 헐값이라도, 장난으로 기업 인수하는 사람이 어딨어. 진심이니까 샀지."
리코가 티 없이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소 뭐라고 말 좀 해 봐, 넌 할 거야?"
허니맨이 웨일에게 물었다. 웨일은 리코가 나눠준 사업계획서와 계약서를 살펴보고 있었다. 웨일은 의문이 들었다. 왜 리코가 직접 하지 않고, 자신을 사장으로 세우려는지. 사실상 리코의 기업인데, 자신이 사장 자리에 앉아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냥 바지 사장으로 앉히려는 것은 아닌지. 이 지분율이라면 리코가 주주로서 하는 제안은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업무 상 지시는 따를 수 있지만, 견제는 받고 싶지 않다. 리코가 경영권에 얼마나 깊게 간섭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사업 자체는 흥미로웠지만, 굳이 나서서 할 필요가 있을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라선도 데려왔어."
허니맨은 라선의 수습 전환 때 리코의 평가를 기억했다. 망해도 챙길 것, 매각 후에도 챙길 것. 어쨌든 챙길 것.
"세안나도 합류할 거야."
웨일과 허니맨은 같은 배를 타지도 않았는데, 리코는 '합류'라고 표현했다.
"둘을 무슨 포지션으로?"
웨일이 리코에게 물었다.
"각각 기획팀장이랑, 개발리더으로."
"한 번에 대표랑, 팀장급 3명이 바뀌면 감당이 될까. 줄퇴사하는 거 아냐?"
허니맨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라선을 넣은 거야, 구면이면 어느 정도 어르고 달래줄 수 있을 테니."
별일 아니라는 듯이 리코가 대답했다.
"그게 안 되면?"
추가로 웨일이 물었다.
"어쩔 수 없지, 해임해야지."
가볍게 리코가 말했다. 허니맨이 리코를 째려보았다. 리코가 심각한 얘기를 너무 쉽게 말할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하면 역효과가 날 걸. '저것 봐, 결국 쟤도 버려지잖아.'하고 불안해하다가 떠나겠지. 안 그래?"
웨일이 허니맨에게 의견을 물었다.
"유소 말이 백 번 옳아. 천 번도 옳고, 만 번도 옳을 거야."
"그럼 어쩐다, 역시 인사는 어렵네. 다일, 뭐 좋은 방안 떠오르는 거 없어."
리코가 책상 위로 손가락을 까딱까딱거렸다. 허니맨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 뭔가 알아차린 듯 리코를 쳐다봤다.
"너 지금 나한테 방금 일 시킨 거지!"
"내가 언제?"
리코가 시치미 뗐다.
"퀵펜슬 인사를 내가 지금 왜 고민하고 있어!"
"그야 네가 인사팀장이니까."
"내가 언제 한다고 했어! 나 이제 너 밑에 안 있다."
허니맨이 씩씩거렸다.
"다일 말이 맞아. 이제 네 밑에 있는 사람 없어. 나도, 다일이도 마찬가지야."
"고맙다. 유소. 이제 누구 밑에서 일하는 일 없어."
"맞아, 같이 일해야지. 허니맨."
웨일이 허니맨을 허니맨이라 불렀다.
"너, 뭐야 유소. 설마 리코 꾐에 빠진 거 아니지."
"아니, 성공할 각이 보여서 하는 거야."
웨일이 사업 계획서를 들고 말했다.
"실제로 해내는 건, 다른 문제지만."
리코에게 시선을 돌리며, 웨일이 덧붙였다.
"난 모두를 믿어."
대책이 없는 신뢰를 리코는 웨일과 허니맨에게 보냈다. 리코는 악랄했고, 불투명했다. 그런 사람이 언제나 타인에게는 믿음을 줬다. 믿음을 떠넘겨 받은 사람들은 묘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가장 위험한 부류 중에 하나였다. 사기꾼과 스타트업 대표는 한 끗 차이였다.
"그런데 퀵펜슬에서도 츠렌 쓸 거야?"
허니맨이 말했다.
"난 그러고 싶어."
리코가 말했다.
"너한테 안 물었어, 넌 어차피 회사 다닐 것도 아니잖아."
"나도 그러고 싶어. 편했거든."
웨일이 말했다.
"그럼 나 츠렌 바꿔도 되냐?"
"그건 안 되지."
웨일과 리코가 동시에 말했다. 허니맨은 일이 몹시 잘못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
출근길 스크린도어 유리창으로 자신을 바라본 라선은 가방이 비뚤어진 것을 보고 고쳐 멨다.
퀵펜슬에 첫 출근했을 때가 떠올랐다. 입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이름 없고, 작은 회사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좋아했다. 처음 받은 월급으로 저녁을 사드렸다. 메뉴는 육회 비빔밥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다음 월급부터는 자기한테 1원도 주지 말라고 했다. 본인에게 1원과 라선에게 1원은 가치가 다르다고. 아버지는 셈이 빠르진 않았지만, 돈에 대한 가치관은 확고했다.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모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목돈을 만들어야 한다. 아버지는 쉬지 않고 일했지만, 벌이 자체가 절대적으로 적었다. 회사에 들어간 뒤, 아버지와의 연락은 드물어져 갔다. 먼저 건 적이 없었기에, 아버지가 줄인 것이라 보는 것이 맞았다. 라선은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가 어디서 살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나이조차도.
해고당했던 회사에 임원급으로 다시 들어간다고 하면, 아버지가 좋아했을까. 아버지가 보고 싶은 건지,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는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사무실에 라선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쟤가 왜 여기서 나와하는 표정들이었다. 신 차장이 일어나 라선에게 왔다. 신 차장은 불편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라선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팀장님"
츠렌으로만 서로 부르다가 '팀장'이라는 호칭을 들으니, 어색하게 들렸다.
"잘 지내셨죠. 차장님. 편하게 라선이라고 불러주세요. 본명이 제 츠렌이거든요. 차장님은 뭐라고 불러드리면 될까요?"
"프레시...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신 차장 본명인 신선류와 잘 어울리는 직관적인 츠렌이었다.
"앞으로 편하게 말해요. 프레시."
프레시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회의실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기에, 안내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프레시는 굳이 라선을 직접 모시고 대회의실로 갔다. 대회의실에는 웨일이 라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라선. 늦게 불러서 미안해요. 알겠지만, 한 번에 주요 인력을 교체하기엔 리스크가 컸어요. 지금 허니맨이 어느 정도 신임도 얻고 새로운 조직 문화도 잘 정착시키고 있어요. 넥스테이트 출신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들도 늘었고요. 때마침 기획팀장이 스스로 퇴사해, 부드럽게 라선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어요."
퇴사 후 리코가 준 계약서에 서명을 했지만, 임용이 늦어질 것 같다고 허니맨으로부터 안내받았다. 그동안 라선은 이직 준비를 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NK 같은 곳에 합격한다면, 아무리 지분을 준다고 해도, 퀵펜슬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세안나에게도 물었지만, 본인도 기다려 달라는 이야기만 들었다고 했다. 라선과 차이점이 있다면 세안나는 계속 넥스테이트를 다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 이력서가 떨어져 나가고 있을 때, 다행히도 리코의 약속 대로, 웨일이 라선에게 정식 임용할 것이라고 연락했다. 오늘이 정식 임용식이었다.
"세안나도 올 건데..."
웨일의 말은 시작부터 우려가 가득했다.
"라선만 믿어요. 무슨 말인지 알죠?"
"물론이죠."
◑
임용 전날 라선은 세안나와 저녁을 같이 먹었다.
"리코가, 웨일이 약속을 지켜서 다행이에요. 굶어 죽을 뻔했거든요."
"약속이 아니라, 계약을 지킨 거지. 안 지켰으면 무슨 수를 써서 라도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만들었을 거예요."
독성 말투가 적나라하게 튀어나왔다.
"전 어떻게든 퀵펜슬에서 버텨야 해요."
"버티는 게 아니라 무조건 성장시켜야죠. 지분 때문에 온 건데."
"그래서 부탁인데, 말투 조금만 더 부드럽게 해줄 수 있어요?"
라선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투로 개발팀장 자리에 오르면, 난리 날 걸요. 리사인드에 저격글도 올라오고."
"퀵펜슬이 리사인드에 떠요?"
"이런 거. 이런 거 조심하라는 뜻이에요."
"왜죠? 사실을 물은 건데."
"자, 퀵펜슬 작은 회사 맞아요. 리사인드에 규모 작아서 안 뜨는 거 맞고요. 사람들한테 어디 다닌다고 자랑할 만큼 대단한 회사 아닌 것도 맞아요. 그런 곳 다니는 사람한테, 너네 회사도 리사인드에 뜨냐? 라고 물으면 높은 가능성으로 무례하게 들려요."
라선이 조근조근하게 설명해 줬다.
"그게 그렇게까지-"
"그게 그렇게까지 그래요. 알겠죠? 세안나 때문에 퀵펜슬 폭파하면, 우리 가진 지분이 다 무슨 소용이에요. 휴지 조각이지."
그 말을 듣고 세안나가 깨달은 듯했다. 무조건 성장시켜야 한다는 자신의 말을 지키려면, 라선이 말하는 소통 규칙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내일 친절하게. 웃으면서. 인사하는 거예요."
유치원 아이를 가르치듯 라선이 말했다.
세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시금치를 먹는 아이처럼.
◑
타운홀 미팅이 열렸고, 웨일이 라선과 세안나를 앞으로 불렀다. 허니맨이 마이크를 먼저 라선에게 주었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라선이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라선입니다. 저를 아시는 분도 있고, 처음 보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사실 저도 예전에 3년 동안 퀵펜슬에 근무했었는데, 사정이 있어 회사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라선은 프레쉬를 바라보며 말했다. 프레시는 눈을 피했다.
"이렇게 돌아오니, 기분이 새롭네요. 퀵펜슬이 앞으로 발전할 수 있게 기획팀장으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손히 인사한 뒤, 마이크를 세안나에게 넘겨주었다. 세안나는 머뭇거리다가 조심히 말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세안나입니다. 전 다들 처음 보실 겁니다. 성격이 그리 밝지 않고, 사회성이 조금 부족해서 말을 조금 날카롭게 하거나,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할 때가 있습니다. 무례하게 보일 수 있으나, 나쁜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니니, 가급적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회사의 성장을 누구보다 바라기에, 저 녀석 낙하산 타고 내려와서 재수 없게 군다 라고 생각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세안나는 마이크를 허니맨에게 돌려주었다. 이 정도면 선방이다. 라선은 세안나의 솔직한 대답에 안도했다. 끝에 약간 독이 묻어 있긴 했지만, 어조는 전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새로 온 두 분이 잘 안착할 수 있게, 여러분들이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웨일이 다시 한번 직원들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오늘은 취임 이후 계속 고민해 왔던 회사의 새로운 비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기존의 퀵펜슬은 전방위적인, 범용적인 메모앱을 지향해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모델로는 강력한 경쟁사들을 이기기엔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에 퀵펜슬은 범용 메모앱이라는 컨셉을 버리고, 하나의 목적에 특화된 메모앱을 개발하고자 합니다."
배경에 파워포인트가 떴다. 파워포인트에는 두 가지 단어가 있었다.
'Nexnote'와 '임장고고'였다.
"퀵펜슬의 사명은 미래지향적인 노트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는 뜻에서 넥스노트 'Nexnote'로 바꾸었습니다. 더불어 향후 저희가 개발할 앱은 부동산 임장 기록에 특화된 메모앱 '임장고고'입니다."
리코의 사업기획서에 적힌 내용이 현실에 나타났다. 라선은 비로소 재출발선에 섰다. 라선은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놓친 것을 발견했다.
규인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