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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휘목 Nov 24. 2024

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24화


아내가 쓰러졌다는 연락에 규인은 출근길을 돌아서 병원으로 갔다. 나올 때 조금 미열이 있다고는 했는데, 쓰러질 정도로 심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내가 의식을 잃기 전, 스스로 119를 불렀고, 구조대원들은 문을 강제로 따 안으로 들어와 아내를 구했다고 했다. 

응급실로 들어간 규인은 아내를 찾았다. 아내는 병실 끝 침대 위에 누워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여실 씨, 괜찮아요?"

규인의 목소리를 들은 아내가 가늘게 눈을 떴다.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파, 아파요."

대신 아프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규인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뱃속의 아이도 걱정되었다. 혼자서 밖으로 내몰린 기분이었다.

"저기 보호자 분 되시나요?"

간호사가 규인에게 물었다.

"네. 남편입니다."

"수납이 필요해서요. 바깥으로 가셔서 복도 끝에 가면 수납처가 있어요. 거기서 수납하고 와주세요."

규인은 수납처로 갔다. 대기실에는 다른 피로도로 의자에 주저앉은 사람들이 있었다. 대기표를 뽑고 자리 앉아서 기다렸다. 규인은 두려웠다. 병원비가.

"20만 원입니다. 일시불로 하시나요?"

"20만 원이라고요?"

생각보다 훨씬 더 비쌌다.

"경증 환자셔서 치료비 90%로 부담하셔야 해요."

"아이까지 밴 사람이 쓰러져서 왔는데, 경증이라뇨."

"고령 산모 분만이나 쌍생아 분만 같은 위험 분만도 다 경증이에요."

"잠시만요. 의사 분 뵙고 올게요."

규인은 응급실로 들어가 담당 의사를 찾았다. 다들 정신없이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 잠시 후 짧게 머리를 자른 젊은 의사가 왔다.

"수납에 가니까 아내가 경증 환자라는데, 아이 밴 사람이 정신을 잃은 게 경증인가요?"

따지듯 규인이 물었다.

"단순 감기입니다. 경증이면 다행인 거 아닌가요? 아내 분이 중증 환자이시길 바라세요?"

비슷한 질문에 시달려 왔는지, 의사는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규인은 할 말이 없었다. 단순 감기라면 다행이라고,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데, 치료비를 보니 경증일 리가 없다고 따지고 있었다. 간호사가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다른 환자에게로 갔다. 규인은 다시 수납처로 돌아가, 병원비를 결제했다. 돈은 사람을 우습게 만들었다. 20만 원이면 한 달 식비의 반이었다. 사람 사는 게 중요한데, 치료비가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회사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반차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처가와 본가 모두 지방이었다. 자신이 아니면 아내를 돌볼 사람이 없었다.

 점심대가 되자, 아내가 정신을 차렸고 의사가 귀가해도 좋다고 했다. 규인은 택시를 불렀다. 택시비는 7,300원이 나왔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 규인은 점심을 차려주었다. 아내는 기운을 조금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두고 가기가 어려웠다. 다시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규인은 오후도 반차를 내달라고 했다. 오늘 새로운 개발팀장이 온다는데, 처음부터 나쁜 이미지를 주는 건 아닌가 걱정되었다. 돈도, 아내도, 직장도 다 무겁지 않은 게 없었다. 


타운홀 미팅이 끝나고 전사 직원들이 그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었다. 세안나는 개발팀이 있는 곳으로 갔다. 세안나가 자리에 앉아마자 개발 팀원 중 한 사람이 전화를 받고는 급히 사무실로 갔다가 돌아왔다.

"아, 죄송합니다. 리더. 조금 전에 전화가 왔는데, 백엔드 개발자가 오늘 못 나올 것 같다네요. 제가 연차를 대신 올렸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편하게 세안나라고 불러요. 말도 편하게 하고."

츠렌이 어색한지, 세안나가 무서운지, 팀원은 긴장한 채로 식사를 하며 어색하게 대화했다. 마치 잘못 조립한 장난감 차를 억지로 굴리는 것 같았다. 세안나는 전혀 불편함을 못 느꼈지만.

"퀵펜슬 지금 프로그램 IA(정보 구조도) 있나요? 최신화된 거."

세안나가 아까 팀원에게 물었다.

"찾아봐야 알 것 같은데,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처음 앱 개발할 때 만들어 둔 것도 없나요?"

"아마도 없을 것 같습니다. 최초 개발자가 퇴사하면서 삭제한 걸로 알고 있어요."

세안나는 라선이 처음 들어와 자신에게 IA가 없냐고 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 거 없다는 자신의 대답이 얼마나 답답하게 느껴졌을지, 이제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럼 유지보수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그냥 버그 보고 들어오면, 그것만 어떻게든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마를 한 번 쓸고 세안나는 독 묻은 말을 뱉지 않게 참았다. 괜찮다. 어차피 현재 서비스되고 있는 퀵펜슬은 더는 관리하지 않을 것이다. 소규모 그룹이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인력으로 퀵펜슬 서비스를 계속 제공하는 건 불가능했다. 새롭게 런칭할 앱에 전력을 쏟아야 한다.

"'인공 지능 기반 자동 컨텍스트 및 메타데이터 추가를 이용한 의미론적 메모 작성 시스템', 이 특허는 누가 개발했어요."

"그게 뭔가요?"

"퀵펜슬에서 낸 특허요. 발명자는 전 대표님이랑, 지규인 씨로 되어 있네요."

"규인 씨, 아니 헬렌이 오늘 빠진 친굽니다."

"퀙펜슬 서비스에 이 기술 적용된 거 맞아요?"

"아니요. 저도 중간에 들어와서... 잘 모르는데, 아마 최적화가 안 되어서 빼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게 꽤 되거든요,"

 또 한 번 독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러니까 퀵펜슬이 망하지, 아니 망했지. 최적화가 어려우면, 최적화가 될 수 있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지. 그냥 포기한 게 분명했다. 세안나는 퀵펜슬 코드를 보고 싶지 않았다. 이 팀으로 새 앱을 만든다고? 조금 두고 볼 일이지만, 팀부터 다시 만드는 게 올바른 수순일 것 같다고, 세안나는 직감했다. 오늘 연차로 빠진 개발자가 다른 직장 면접을 보고 있지 않기를 바랐다. 적어도 한 명은 있어야 했다. 말이 통하는, 한 명이.


식사를 마치고 사람들은 사무실로 돌아가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세안나와 라선은 부서를 돌면 한 명, 한 명과 차례로 인사를 나눴다. 라선을 아는 사람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반겼다. 민머리에 날카로운 눈매인, 세안나를 본 사람들은 어색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한 바퀴를 돌고 세안나와 라선은 휴게실 의자에 앉아, 차를 마셨다.

"돌아온 기분이 어때요?"

세안나가 라선에게 물었다.

"뭐, 이상하죠. 직급도 달라지고, 사람들도 달라지고, 게다가 이름까지 다 츠렌으로 바뀌어 있고."

"더 바뀌어야 할 것 같은데. 사람이라든가, 사람이라든가."

"겨우 식사하면서 대화 나눈 거 정도로 벌써 갈라 치는 거예요?"

라선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세안나를 바라보았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세안나가 한 발짝 물러섰다.

"그나저나 개발팀에 덩치 큰 남자 없었어요?"

"없었어요. 누구 찾는 사람 있어요?"

"아뇨, 예전에 같이 업무 했던 분이 있는데 안 보여서요."

"아, 한 명 연차 냈다고 했어요. 그분인지 모르겠네요. 라선이 찾을 정도면 그런대로 믿을만한 사람인 거죠?"

돌다리를 두들기듯 세안나가 물었다.

"괜찮은 분이에요."

"실력이?"

"성격이요. 실력은 제가 프로그래머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요."

라선은 세안나가 개발 팀원을 이미 모두 아래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충돌을 일으키기 좋은 내적인 위계가 세안나 머릿속에 구축된 것이다. 희망은 규인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세안나에게 인정받는다면, 최소한의 균형은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리코가 자신에게 기대한 바가 이런 것일 테다. 폭탄이 지뢰밭 위에 구르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막기. 

"반드시 괜찮은 분이어야 해요."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세안나가 말했다.

"큰 걱정은 마세요."

라선이 안심시켰지만, 세안나를 달래기엔 부족해 보였다.



저녁을 먹고 아내가 기운을 차렸다. 흠뻑 젖은 땀을 씻기 위해 샤워를 한 뒤 아내는 곧바로 잠들었다. 한시름 놓은 규인은 책상에 앉아 부업으로 운영하는 블로그 글을 캣GPT를 이용해 만들었다. 애드센스로 들어오는 돈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필사적으로 살아야 한다. 이전에 살던 전셋집에서 쫓겨나듯 나오고 나서, 겨우 투룸을 구해 월세로 살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조금은 더 넓은 곳으로 가야 한다. 임신을 하고 직장을 그만둔 아내는 이따금 미안하다는 말을 했고, 규인도 미안하다고 했다. 더 많이 벌어오지 못해서. 더 좋은 직장에 다니지 못해서. 이직을 위해, 이력서를 계속 쓰고 있지만, 한 번도 연락이 온 적이 없었다. 이게 딱 자신의 수준인가. 스스로가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회사는 망해가고 있었다. 넥스테이트 출신 경영자가 들어와 회사를 조금씩 바꾸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뚜렷한 변화가 없었다. 츠렌이라는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는 우스운 문화만 어느 정도 정착한 듯했다.

 오늘 새로운 기획팀장과 개발리더가 온다고 했다. 얼굴 도장을 제때 찍지 못한 것이 큰 문제가 되진 않길 바랐다. 이 바닥에 깔린 게 젊은 꼰대였다. 이전 대표가 그랬고, 대표의 끄나풀들이 그랬다. 회사에 대한 불신은 회사가 실질적인 '임금'과 '복지'를 향상하지 않는 이상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캣GPT가 생성한 글을 적절히 조합해 만든 글을 포스팅하고, 규인은 시간과 시간의 틈에서 숨을 골랐다.

  한 때는 퀵펜슬도 좋은 회사, 성장성이 보이는 회사였다. 그렇게 대표가 강력하게 설득했고, 지분을 주겠다는 말에, 입사를 결정했다. 하지만 입사 후 지분 얘기는 없었고, 없는 아이디어도 그럴듯하게 꾸며내 특허를 내는 일을 맡았다. 교묘하게 만든 연극소품 같은 특허는 회사 소유가 되었다. 홀린 사람처럼 시간을 빼앗겼고, 노력을 강탈당했다. 일을 잘할수록 돌아오는 건 더 많은 업무였다. 라선이 떠나고 나서 업무를 떠밀려 받은 사람도, 자신이었다. 너밖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부탁한다. 맞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하지 않으려 했으니까.

 회사에 무엇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살 도리는 자신이 찾아야 한다. 회사는 단순히 하나의 파이프라인일 뿐이다. 임금노동자가 벌 수 있는 돈은 한계가 있다. 종잣돈을 빠른 시일 내에 모으고, 돈이 돈을 버는 메커니즘을 구축해야 한다. 대표가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기 사명을 바꾸고 신규 프로젝트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이름 하나 바꾼다고, 사정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위가 바뀌어도 아래가 그대로면 한계가 있다. 경영진도 같은 생각이라면, 해고가 점진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솎아내기에 걸러내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잘하면 된다. 회사에선 저전력 모드로 에너지를 아끼고, 회사 밖에서 탈출구를 찾는 데 써야 한다.


침대로 가 아내 옆에 누운 규인은 아내를 꼭 끌어안았다.

이 사람 함께 잠들고 눈을 뜰 수 있어, 세상에 감사했다. 

그 외에 세상에 감사한 일은 무엇도 없었다.


그래도 다정하고, 상냥하게, 누구에게도 책 잡히지 않게.

내일도 웃어야지.


다음 날 아침 출근한 규인은 밝게 인사하며 사무실로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을 봤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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