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26화

by 설다람


"특허는 왜 갑자기..."

"사용자가 만드는 노트 데이터를 분석해, 자동으로 분류하는 기능을 만들어야 해요. 특허는 정확히 그거에 해당되고요. 성능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완전 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보다는 발판 하나라도 있는 게 낫잖아요."

헬렌은 그 특허는 숫제 거짓부렁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새로 온 개발리더에 찍혀서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딱 봐도 성격이 여간 비뚤어진 게 아닌 것처럼 보였다. 잘못된 장소에,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사람에 끼고 말았다.

"그럼요. 퀵펜슬에는 전혀 안 쓴 거죠? 이 기술."

"네, 최적화를 못해서 너무 느려졌거든요. 처음에만 올리려고 몇 번 시도하고, 그다음부터는 포기했었어요. 저도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이걸 어떻게 알고..."

"아는 사람이 그 특허 믿고 여길 샀거든요."

바퀴가 잘못 끼워졌다.

"이거면-"

세안나가 말을 이으려고 할 때, 헬렌의 폰이 울렸다.

"받아요."

"괜찮습니다. 하시던 말씀을 마저 하시죠."

"그땐 괜찮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요."

휴대폰 진동 소리가 세안나의 말을 울렸다.

"이제 받으세요."

세안나가 몸을 돌렸다.

돌아서면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을 때, 진동이 멈췄다.

발신자는 전(前) 대표였다.



라선이 선택한 고객 조사 방법은 설문조사, FGI도 아니었다. 아직 앱 출시 전이었기에, 다수의 얕은 선호를 확인하는 것보다는 깊이 있는 정보가 필요했다. 라선은 고객을 한 명, 한 명 직접 만날 생각이었다. 인터뷰 참여자를 구하기 위해 '부동산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회원 수 120만 명이 넘는 한국 최대 규모의 부동산 커뮤니티였다. 그곳에서 라선은 질문 게시판에 올라온 게시글을 보고 적합한 대상을 찾았다. 질문 게시글에는 작성자의 현재 상황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라선은 20대 후반 30대 중반 나이대의 고객을 선별해 인터뷰 요청 쪽지를 보냈다.

50명가량에게 연락했지만, 답장은 없었다. 인터뷰로 사례금을 준다는 문구가 피싱 사기처럼 보였는지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라선은 간단하게 소속과 용건만 적은 이전 쪽지와는 다르게, 구구절절, 거의 사정하듯 글을 써서 다시 다른 50명에게 보냈다.

딱 한 명이 답장을 주었다.

'언제, 어디로 가면 되나요?'

걸렸다! 소중한 잠재 고객에게 약속 장소와 시간을 알려줬다. 퇴근 후 라선은 조금 이르게 약속 장소로 가, 어떻게 질문할 것인지, 머릿속으로 예행연습을 했다. 여유롭게, 긴장하지 말고. 사교성을 영혼까지 끌어 모으자. 참여자는 약속한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였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될 수 있게, 나이 외에는 다른 인구통계학적 정보는 인터뷰가 마치고 물을 예정이었다. 다행히 남자는 적당히 수다스러웠다.

"부동산앱은 어떤 걸 주로 쓰시나요?"

"예전에는 백방을 썼는데, 요즘은 부자고고를 더 많이 써요. 맞춤별 추천 기능이 상당히 편해서, 매물 찾는 시간을 많이 줄었어요.."

넥스테이트에서 쫓겨나듯 나왔지만, 부자고고를 자주 쓴다는 말에, 라선은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어쨌든 부자고고를 대세 앱으로 만든 건 자신이 리뉴얼 작업이었으니까.

"임장은 얼마나 자주 다니세요?"

"월에 세 번은 가는 거 같아요. 결혼 전에는 꼭 구하고 싶어서요."

"한 번에 가면, 매물을 몇 개나 보시나요. 보통 하나 정도 보나요?"

"아뇨, 기왕 시간 내서 가는 거, 근처 매물은 다 조사해서 괜찮은 것들을 한 번에 다 보죠. 실제로 가서, 다른 좋은 물건이 있다고 해서, 두 곳 정도 더 본 날도 있어요. 임장 기록을 꼼꼼히 하는 편인데도, 그런 날은 어디서 뭘 봤는지, 헷갈려서 제대로 정리가 안 돼요. 그래서 요즘은 하루에 최대 세 개로 정했어요."

"임장 기록용 앱 같은 건 안 쓰세요?"

"제가 원래 쓰는 메모앱이 있어서, 거기다가 임장 내용을 기록해요. 그런데 아무래도 일상 메모도 같이 쓰다 보니, 정리도 안 되고 기껏 분류해 놓아도 곧바로 엉켜서 지저분해져요. 그래도 간편하게 빼내서 쓰기에 지금 쓰고 있는 앱 제일 편해서, 태그를 제대로 다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아예 따로 문서로 작성하는 분들도 있다는데, 전업이 아닌 이상, 그렇게 하긴 거의 불가능하죠."

새로운 앱을 사용하는 것에는 저항이 있다. 그러나 기존앱에 축적하기에는 다른 기록들과 성격이 다르다.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

"임장 기록할 때 가장 귀찮은 게 있을까요?"

남자는 잠시 고민했다.

"아 맞다, 그거. 부동산 매물 정보를 매번 복사 붙여 넣기 하는 거요."

리코가 추측했던 가설 중 하나가 나왔다.

"앱으로만 하면 복사 붙여 넣기가 안 되니까, 캡처해서 메모에 넣는데, 그렇게 하면 검색이 안 되어서 불편하더라고요. 예를 들면 가본 곳 중에 계단식 아파트만 추려서 보는 게 불가능한 거죠. 이미지니까 검색어가 안 잡히잖아요. 임장 기록도 필터링을 하려면 결국 텍스트로 적어둬야 해서, 이미지는 이미지대로 캡처해서 넣고, 일부는 텍스트로 다시 옮겨요."

인사이트 발굴, 단순히 매물 정보를 끌어 오는 게 아니라, 필터도 걸 수 있어야 한다.

"이것만 자동화해줘도, 감사할 것 같아요."

남자는 라선에게 요청하듯 말했다.

"비슷한 게 또 있을까요? 불편한 것들이요."

"음... 어느 집이 어디에 있던 집이었는지도, 생각이 안 날 때도 있어요. 처음에 위치를 확실히 적어둬야 하는데, 완전히 잊어서, 다시 지도로 찾곤 해요. 여간 번거롭지가 않아요. 갔던 아파트에 임장한 내용을 포스트잇처럼 붙이면 좋을 텐데 말이죠."

또 리코의 예상이 적중했다.

"방문한 아파트를 클릭하면, 임장 노트도 보이고, 매물 정보도 자동으로 끌어올 수 있으면 확실히 도움이 되실까요?"

"그런 걸 만들고 계신 거예요?"

남자가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보다 더 나은 앱을 만들어야죠. 예를 들면, 가입한 정보와 메모하신 내용을 바탕으로 유사한 매물을 자동을 추천해주는 기능 추가한다든지."

"그런 것도 가능해요?"

"물론이죠. 믿는 구석이 있거든요."

라선이 세안나의 말을 따라했다. 사는 지역과 같은 정보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질문하고 인터뷰를 마쳤다. 남자는 앱이 출시되면 자신에게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잠재적 고객 한 명을 얻었다. 인터뷰는 유익했다. 남자가 인터뷰에서 말한 니즈에는 Must-have와 Nice to Have가 섞여 있었다. 이용자를 절대로 떠날 수 없게 만들려면 Nice-to-have를 찾고, 고객이 Nice-to-have를 Must-have로 느끼게끔 만들어야 한다. 이번 인터뷰로 리코가 줬던 가설 중 두 가지가 Must-have, 한 가지가 Nice-to-have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MVP(최소 기능 제품)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앞의 두 가지가 구현되어야 한다. 보통이라면 두 가지만 갖춘 제품 이른 시일 내에 내는 것이 중요했다. 시장에서 고객의 검증을 받으면서 앱을 다듬고, 확실히 충성 고객을 휘감을 기능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니까, 그러나 지금은 마지막 니즈도 충족시켜 줄 수 있다. 라선은 개발팀에 공유할 IA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비행기를 제작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만들어야 하는 건 날개가 아니라 자전거다.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다 어떻게 넘어지는지, 언제 자전거에 대고 욕을 하면서 발로 차는지, 자전거에 어떤 조명등을 달아달라고 아우성치는 지를 알아야, 모터 사이클을 개발할 수 있고, 차까지 제작할 수 있다. 자전거조차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면서, 비행기를 날게 할 순 없다. 이번 개발이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자전거에 날개를 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집중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목이 굽어졌고, 어깨가 뻐근해졌다. 라선은 팔을 높이 들어 기지개를 켰다. 갈 길이 멀었다. 몸을 충분히 풀어 둬야 한다.



허니맨과 웨일은 저녁 같이 먹었다. 회사 근처 수제 두부 도넛 집이었다. 웨일의 선택이었다. 허니맨은 웨일과의 식사에서 한 번도 주도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너 정말 그 정도만 받아도 되겠어?"

허니맨이 도넛을 한 입 먹으며 말했다.

"다른 직원들 돌아갈 몫도 빠듯한데, 어쩔 수 없지. 리코도 1년 동안 거의 무급으로 일했다며"

웨일이 담백하게 말했다.

"리코랑 비교하지 마, 걘 이상하잖아."

"이상해서 성공한 건 아니잖아. 봉급 많은 CEO, 투자사가 좋게 볼 리 없어. 리코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고."

"꼭 리코를 따라 할 필요 없어."

허니맨이 달래듯 말했다.

"따라한 적 없어."

웨일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너무 너한테 그렇게 박하게는 굴지 마. 세안나는 웃돈 주고 데려왔으면서."

"웃돈 안 주면, 못 데리고 오니까."

리코가 세안나에게 스카웃 제의를 했다고 해도, 사장은 웨일이었기에, 세안나를 영입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웨일은 리코의 제안에 동의했다.

"임직원 면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

"3분의 2 정도까지 마무리했어. 대부분 잘 적응하고 있는데, 새 프로젝트를 한다고 하니 나가겠다는 사람이 좀 나왔어."

"어느 정도?"

"개발팀에 한 명, 디자인팀에 한 명. 이번 주 내로 사직서 제출할 것 같아. 채용 공고 준비할까?"

웨일은 도넛을 손가락으로 찢어,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준비는 하되, 조금 더 타일러 봐."

"노력은 하겠지만 나간다는 걸 막을 순 없어. 빨리 결정해야 해. 업무 공백 생기면 더 무너질 수 있으니까."

본격적인 신규 프로젝트에 들어가면, 인력이 추가되면, 추가되었지, 중도에 이탈하는 인원이 생기면 안 된다. 그전까지는 탄탄한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준비가 필요했다. 웨일도 고민하는 듯했다.

각자의 도넛을 끝내고, 두 사람은 일어났다. 계산은 각자 했다. 리코가 길들인 문화였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타인에게 빚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편리하긴 했다. 그토록 리코에게 얻어먹으려고 했던 허니맨은 스스로가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허니맨은 웨일과 정류장에 도착해 함께 버스를 기다렸다. 웨일이 탈 버스가 오고 있을 때, 허니맨은 가장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웨일 할 말이 있어."

허니맨이 강렬한 눈빛으로 웨일을 바라보았다.

"내 월급은 그대로 동결이다. 나 회사에 충성심 없는 거 알지?"

웨일은 말이 없었다.

"약속해 줘,"

허니맨이 간절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 약속은 네가 할 수 있는 거지."

웨일이 말을 남기고 버스를 타고 사라졌다.

이 녀석이나, 그 녀석이나.



고층 빌딩이 즐비한 핵심 업무 지구는 다른 구역의 지대보다 한 계단 높은 곳에 있는 듯했다. 생경한 도시 풍경 속에서 길을 헤매던 헬렌이 마침내 도착한 곳은 세지로 3가에 위치한 '하나비(花火)'라는 일식집이었다. 제 돈 주고는 절대로 못 가는 고급 일식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직원이 나와 헬렌을 룸으로 안내했다. 복도 끝 두 번쨰 칸에 도착한 직원은 왼 편 룸의 후스마를 열었다. 그곳에 퀵펜슬의 前 대표 신속희가 앉아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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