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28화

by 설다람

"퇴사하고자 합니다."

헬렌은 사직서를 내밀었다. 상담이 아니라, 통보하러 온 것이다.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허니맨이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갑자기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회사에 불만 같은 건 없습니다. 그냥 개인적인 사유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사유라, 회사에서 절대 건들면 안 되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하지만 헬렌은 특허를 알고 있는 유일한 직원이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어떤 사유인지는 묻지 않을 게요. 그런데 헬렌을 그냥 놓치기는 회사 입장에서 큰 손해입니다. 혹시 처우 때문인가요?"

여기서 처우라함은 급여를 의미했다. 헬렌은 말이 없었다.

"아닙니다."

혹시 특허 사용을 막으려고 나가는 건 아니겠지? 허니맨의 머릿속으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여기서 꺼내기엔 민감한 주제였다. 만약 이것이 퇴사 사유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특허 자체는 이미 회사 소유다. 기술을 빼돌린다고 다른 곳에서 사용할 수는 없다.

"저도 보고를 올려야 해서, 확인 후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늦어도 내일까지는 퇴사 조치가 완료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경우 없다는 거 알지만, 개인적으로 급하고 어려운 사정이라 양해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최대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허니맨의 보고 목적은 사표 수리가 아니라 사표 철회였다.

사직서를 책상 위에 둔 채로 헬렌이 문을 닫고 나갔다.


허니맨은 투자자 미팅에 나간 웨일에게 전화했다.

"큰일이야, 헬렌이 사직서를 냈어."

-뭐? 이유가 뭐래?

"몰라, 개인 사유라고만 말했어."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연봉 협상해주겠다고는 해봤어?

"거기엔 별 말 없었어. 있다고 해도, 지금 사정에서는 붙잡을 수 있을 만큼 더 올려줄 방법도 없어."

적어도 연봉에 10%는 올려줘야, 매력적일 것이다. 만약 앞자리 수가 바뀌는 조건으로 일자리를 제안받은 것이라면, 협상 자체가 불가할 것이다.

-아직 특허 관련해서 인수인계 못 받았다고 했지.

"본인도 잘 기억이 안나서, 과거 자료 좀 찾아보고 준다고 했대."

웨일이 한숨 쉬었다.

-언제까지 퇴사 처리 해야 해?

"내일까지. 급한 사정이 있는 가 봐."

-회사가 무슨 장난도 아니고, 하루만에 사직서를 내고 튀어!

흥분한 웨일이 소리쳤다. 최근에 자금 조달 문제로 예민해진 탓이었다. 대학생 때 이후로 이렇게까지 열난 웨일을 본 적 없었다. 대표 자리는 녹록하지 않았다.

"진정해. 방법을 찾아볼게."

허니맨이 차분하게 말했다.

-어떻게?

어떻게...허니맨도 바로 떠오르는 묘안은 없었다. 무슨 수를 써야 하지만, 쓸 수 있는 수 자체가 한정적이었다. 마른 입술을 깨물었을 때, 남은 수가 떠올랐다.

"라선에게 부탁해볼게. 둘이 꽤 친분이 있는 것 같아."

-그게 될까?

"웨일, 의심하지 말고, 방법을 생각하자."

허니맨이 다독이듯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미안해.

웨일이 사과했다.

허니맨은 되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잘 챙겨주지 못한 것 같아서, 짐을 나눠들어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팅 잘하고, 이따 봐."


허니맨은 전화를 끊고, 라선에게 갔다.



"뭐라고요! 무슨 이유로?"

헬렌이 사직서를 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라선이 큰소리로 되물었다.

"그걸 몰라요. 개인 사유라고만 하고, 오늘까지 퇴사 처리를 해달라는데, 어떻게든 잡아야 해서. 라선에게 부탁하러 왔어요."

무슨 뜻인지 라선은 바로 이해했다. 특허 때문이었다. 메모 내용을 분석해 매물을 추천하는 기능을 포함해서 MVP를 완성하기 위해선, 특허가 반드시 필요했다.

"제가 오후에 한 번 이야기 해볼게요."

"라선만 믿어요."

믿는다는 말에, 부담이 탑처럼 양 어깨에 쌓였다. 가뜩이나 속이 안 좋다는 사람에게, 회사에 남아달라는 둥, 필요한 인재라는 둥 하고 이야기를 하기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붙잡아야 했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 라선이 헬렌의 자리로 갔다.

"나가서 차 잠시 마실래요, 헬렌?"

예상했다는 듯이 헬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선은 헬렌을 근처 카페에 데리고 갔다. 푸른 고슴도치 간판에 반쯤 땅 아래로 꺼진 카페였다. 비가 올 때마다 침수 피해를 걱정하지만, 폭우주의보때도 물에 잠긴 적은 없는, 의외로 안전한 곳이었다. 진한 치즈 케이크가 카페의 대표 메뉴였다. 헬렌이 애호하는 메뉴라는 걸, 라선은 기억하고 있었다. 라선은 치즈 케이크 하나와 생강 에이드를 주문했다. 헬렌은 배 에이드를 시켰다.

"허니맨한테 들었어요. 회사를 나간다고."

라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그렇게 되었어요."

헬렌은 말을 아꼈다.

"혹시 이직하는 거예요?"

주저하다 헬렌이 입을 열었다.

"아직 몰라요."

어디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건 무례했다.

이 회사도 성장할 수 있다고, 그때가 되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분도 없는 사람에게 참고 기다리란 말을 할 수 없다. 실제로 그런 날이 오더라도, 지금 당장 이직에서 얻는 효용이 훨씬 클 것이다. 솔직해지자.

"특허가 필요해요. 헬렌. 그것만이라도, 인수인계해주고 가주세요."

회사 규정에 적힌 내용을 들먹이며, 강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라고 허니맨이 자신에게 설득을 부탁한 것은 아닐 테다. 과거의 정을 생각해, 재고하게 만드는 것, 그게 라선이 부여 받은 임무였다.

헬렌이 이마를 쓸었다. 퀭한 눈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말그대로 피곤에 절인 것처럼 보였다. 라선은 스스로가 가혹하고, 매정하게 여겨졌다.

"결국 그게 필요한 거죠."

그 말에 라선은 죄책감을 느꼈다.

"저, 많이 힘들어요. 라선 씨."

헬렌이 '씨'를 붙였다. 츠렌이 아니라, 본명으로 자신을 부른 것이었다. 많이 힘들다는 말은, 직장 내 문제가 아닌 이상, 아니 직장 내 문제라고 해도, 회사 사람에게 꺼내기 조심스러운 말이었다. 회사는 친구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일을 하는 곳이었고, 동료에게 자신의 흠을 드러내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조직 문화가 좋아졌다고 해도, 회사라는 조직체는 결국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회사는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굴러 가야 하고, 개인은 회사 창출한 이익을 나눠갖기 위해, 생의 일부를 바쳐야 한다. 라선은 속살을 내비친 상대의 연한 살을 칼로 도려낼 자신이 없었다. 얻는 것도 없이, 관계에 생채기를 낸 채로 끝날 것이다.

"미안해요. 헬렌."

"아니에요."


둘은 대화의 마침표를 제대로 찍지 못하고, 말줄임표가 된 채 회사로 돌아왔다. 라선은 허니맨에게 상황을 보고 했다. 허니맨의 안색이 나빠졌다.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지 않기를, 반전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믿었던 모양이다.

"고생했어요. 라선."

허니맨이 스스로를 위로하듯이 말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허니맨의 기대를 저버린 것도, 헬렌과의 신뢰를 깨뜨린 것도. 역량 부족이라는 네 글자가 눈앞에 떠다녔다. 직위가 달라진 만큼 책임도 커졌다. 신규 앱 개발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 허니맨은 아직 누구에게도 헬렌이 퇴사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헬렌의 결심을 돌릴 비책이 있을까. 6시 정각이 될 때까지 라선은 헬렌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났고, 라선도 일어서 나갈 준비를 했다. 헬렌은 아직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모두가 사라지고 나면, 짐을 정리하려는 건가. 이대로 헬렌이 나가면, 계획이 얼마나 비틀어질까? 세안나와도 의논하고 싶었지만, 허니맨의 부탁을 지켜야 했고, 세안나는 이미 사라졌다.


타인에 대한 불안감이, 자신에 대한 불안감으로 번지지 않게, 라선은 정신을 움켜잡았다.




삐비빅.

소리가 났고,

다음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라선은 당황했다. 아침까지 멀쩡했던 문이 열리지 않았다. 도어락을 열고 다시 '1004' 눌렀지만 열리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원인으로 열리지 않는 것일 테다 라고 생각하니, 출장비 5만 원을 주고 열쇠 수리 업체를 부르기에는 돈이 너무 아까웠다. 인터넷으로 도어락 방전 시 여는 법을 찾아보았다. 9v 건전지를 비상전원 접지 부분에 가져다 대면 열린다는 블로그 글이 있었다. 블로그 글 대로, 편의점에서 9v 건전지를 사들고와 비상전원 접지 부분에 가져다 대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라선은 포기하지 않고, 30분 동안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도어락 여는 법을 죄다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 없었다. 아, 진짜 불러야 하나. 라선이 지도 앱을 켜고 열쇠 수리 업체를 검색했다. 그때 지도앱에 고양이 얼굴 아이콘이 떴다. 삼색 고양이가 혀를 낼름 거렸다.

아, 진짜 낚여줘야 하나. 라선은 고양이 머리를 꾹 눌렀다. 주소가 떴다. 지하철로 한 시간 삼십오 분이었다. 퇴근하고 나서, 집 문 바로 앞에 도착했는데, 다시 한 시간 이십오 분 동안 지하철을 타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열쇠 수리 업체를 부른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해결될 일이라면, 고양이 머리가 지도에 둥둥 떠오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라선은 지하철에 다시 올라 서울의 변두리를 향해 몸을 옮겼다. 퇴근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는데도, 아직 사람들이 많았다. 손잡이를 꽉 붙잡고 사람들 머리틈 사이로 난 창을 바라 보았다. 그 속에 자신도 지하철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강을 건너갈 때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와 야경을 등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라선은 검푸른 하늘과 그 아래 가로등과 전조등에 반사되어 비늘처럼 보이는 잔물결을 응시했다. 생각의 빈 칸으로 어둠이 흘러들어오려 할 때, 안내 방송이 나왔다.


딩동댕딩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열차의 기관사입니다

여러분 잠시 시간을 내어 창 밖을 봐주시겠습니까.

어둠 속에서 크고 작은 불빛이 어울리며, 흔들리는

서울은 오늘도 흘러가고 있습니다.

저는 흘러가는 빛을 보며, 우리 역시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종착지를 향해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오늘 하루가, 그 어떤 날보다 느리게,

또 누군가에게는 그 어떤 날보다 빠르게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또 한 칸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마주할 나날이 항상 밝을 수는 없겠지만

슬픔도 마냥 어두운 것은 아니길 기도합니다.

오늘도 대단히 고생 많으셨습니다.


모두 안전히 귀가하시고 푹 쉬십시오.

감사합니다.'


뉴스로만 들었던, 낭만 안내 방송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기관사의 말에 귀기울였다. 대교를 지나고, 사십 분을 더 가서 일곡 역에 내렸다. 지도 앱을 켜서 경로를 확인했다. 역에서 내려서 삼십 분을 더 걸어 이북동까지 가야 했다. 이십 분 정도 걸었을 때, 빌라가 다닥다닥 붙은 언덕길이 나왔다. 어딘가 본 적 있는 풍경이었다. '이북 태권도'라는 허름한 간판의 태권도장을 보고, 라선은 기억해냈다. 딱 세 달 머물렀던, 무료로 운영되는 태권도장이 있던 그 동네였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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