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29화

by 설다람




"라선?"


태권도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옆을 돌아보니, 가방을 멘 헬렌이 서 있었다.


"헬렌? 아, 여기 어렸을 때 잠시 살았던 곳인데 갑자기 생각나서 들렀어요. 여기 태권도장도 다녔었는데, 이런 게 기억날 줄 몰랐네요. 추억 따라서 밤산책을 할 줄은 더더욱 몰랐고요."


묻지도 않았는데, 라선은 길게 설명했다.


"그나저나 헬렌은?"


헬렌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라선을 보았다.


"여기 살아요. 따라온 거 아니죠?"


"그럼 범죄죠!"


라선이 손사래 쳤다.


"알겠어요. 여기 치안 썩 좋지 않으니, 조금만 둘러보고 일찍 돌아가세요."


주의를 주고 헬렌은 라선을 지나가려 했다.


"잠시만요. 헬렌."


라선이 헬렌을 불러 세웠다.


"어려운 문제 있으면, 돕고 싶어요. 회사 일이랑 별개로요. 퀵펜슬 다닐 때, 신세 진 것도 많아서..."


이렇게 말하니까, 꼭 뒤따라 온 것 같지만, 라선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못 볼 사람이 될 테니.


헬렌은 라선을 한참 바라보았다. 라선은 긴장했다. 그때 옆에서 누가 술병을 부딪치며 지나갔다.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에게선 진한 담배 냄새가 났다. 그제야 라선은 헬렌이 자신이 아니라, 뒤에 오고 있던 남자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고마워요."


"아녜요."


헬렌은 뒤돌아서 언덕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 회사 성공할 거예요."


라선이 외쳤다.


"진짜 성공할 거예요."


진심이었다. 꼭 그래야 하니까.


"특허가 있으면, 더 빨리-"


"특허, 가짜예요."


헬렌이 말을 잘랐다.


"네?"


라선은 헬렌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전 대표가 특허 하나 정도는 있어야, 투자를 받는다고 그럴듯하게 만든 거예요. 실제로 그런 기술은 없어요."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


헬렌이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무너지고 있는 오래된 건축물처럼 보였다.


"그게 들키면 징역도 살 수 있고, 벌금도 낼 거예요. 재취업도 불가하고, 태어날 자식 볼 면목도 없어요. 그러니 들키기 전에 도망치는 거예요. 살려고 나가는 거예요."


라선은 할 말을 잃었다. 퇴직 사유를 이직이나 가족 내 생활고 정도로 추측했는데, 차원이 달랐다. 어떤 조언도 사실 앞에서 무력해질 것이다.


헬렌은 벙찐 라선을 두고 다시 언덕을 올랐다.


커다란 헬렌의 등이, 산처럼 길에 그려져 있던 그림자가 사라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등이 떠올랐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는 등이 넓었다. 등이 넓어서, 남들보다 더 많이 들었고, 등이 넓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기대었다. 라선도 그 등에 기대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멍하니 뒷모습을 보던 라선은 무슨 생각이 난 듯 언덕을 뛰어 올라갔다.


헉헉거리는 숨소리에 헬렌이 경계하며 뒤를 돌았다.


라선은 무릎에 양손을 올려두고 숨을 고르며 말했다.



"실제로 그런 기술이 있으면요?"


"없어요."


헬렌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요. 지금 없는 것뿐이에요. 최종적으로는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해하지 못한 헬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허가 가짜라면, 지금 당장 신규 앱에 메모를 분석해서 매물을 추천하는 기능을 넣을 수 없어요. 그럼 알고리듬 개발 기간이 필요할 거고. 그렇게 만들어진 알고리듬은 결국 특허 내용과 같을 거예요. 로직은 같으니까요. 그러니 해당 기능을 구현하는 게, 곧 특허 기술을 만드는 것과 동일해요. 그러면 특허는 진짜가 되는 거죠.


물론 회사가 바라는 대로 지금 당장은 추천 기능을 넣을 순 없을 거예요. 대신 지금 출시할 MVP엔 매물 정보를 가지고 오는 기능과 메모에 지리 정보를 넣는 기능 둘만 넣는 것으로 변경하면 돼요. 어차피 헬렌이 나가든, 나가지 않든, 작업이 늦어지는 건 똑같아요."


헬렌을 변호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라선은 두 가지를 선택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설명했을 뿐이었다. 헬렌이 회사에 남아 있는다고 해도, 특허를 활용할 수 없다면, 헬렌의 유무는 결과값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 아니다.


"그렇지만 회사에 남았는데, 특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 회사 측에서 저를 계속 둘 이유가 있을까요."


"그러니까 헬렌이 특허를 완성시켜야죠."


"그걸 할 수 있었으면, 진작 했겠죠."


"지금은 달라요. 세안나가 있잖아요. 세안나랑 같이 만드는 거예요."


"세안나 혼자서도 되지 않을까요?"


"그것도 가능한지 확인해 봐야겠네요. 세안나도 해내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까요! 이게 확실해지면, 회사에 남아도 돼요."


" 특허가 가짜란 사실이 밝혀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건..."





긴 대화를 끝내고, 라선과 헤어진 헬렌은 집으로 갔다.


"꽤 늦었네요. 밥은 못 먹었죠? "


여설이 헬렌을 반겼다.


"뭐 그럭저럭 먹었어요."


헬렌이 거짓말했다.


"진미채랑 멸치볶음 해뒀어요. 밥이랑 같이 먹어요."


여설은 헬렌의 거짓말을 덮어주었다.


"고마워요."


식사를 하면서 여설은 오늘 읽은 책 이야기를 했다. 재즈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퀄텟에서 쫓겨난 뒤, 작은 술집에서 신청곡을 받아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을 얼떨결에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음반을 틀어놓고 자기가 치는 것처럼 연기하다. 피아노 연습을 죽어라 해서 나중에는 진짜 연주를 하는데, 기특한 거 있죠."


여설은 신이 나서 얘기했다. 도서관 사서였던 여설은 아이가 태어나면 매일 같이 책을 읽어줄 것이다.


"주인공이 연습할 때, 피아노 뚜껑에다가 뭐라고 적었는지 알아요?"


"'끝내 실력은 남는다?"


"그건 내 책상에 붙은 메모잖아요!"


여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럼 뭐라고 써져 있어요?"


여설의 머리를 만져주며 헬렌이 물었다.


"*'fake it until you make it"*


"fake it until you make it"


헬렌은 여설의 말을 되뇌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헬렌은 침대에 누웠다. 폰을 들어 메신저를 켰다. 신속희님이 10,000,000을 보냈습니다. 라는 문구가 아직 활성화되어 있었다.


받기 버튼 위에서 엄지가 빙글거리다가


마침내 화면을 터치했다.



*진짜로 할 수 있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것처럼 속여라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라선은 세안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MVP 관련으로 얘기할 게 있는데 시간 내줄 수 있어요?'


-5분 뒤, 괜찮아요.


'네 그럼 소회의실에 봬요.'



5분 뒤 세안나가 노트북을 들고 소회의실로 들어왔다. 라선은 세안나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어깨를 부여잡고 물었다.


"세안나, 특허 지금 가진 내용만으로 구현 가능해요?"


"헬렌이 수식이랑 코드를 준다고 했으니, 가능할 듯해요."


"수식이랑 코드 없으면요?"


"수식이랑 코드 없으면, 조금 더 걸리겠지."


세안나가 이상하리 만큼 적극적으로 묻는 라선을 수상하게 쳐다봤다. 라선은 세안나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그래도 기능 만들 수 있다는 얘기죠?"


"설마 헬렌이 퇴사라도 해요?"


어제까지는 100% 맞았을 추측이었다. 지금은 50%였다.


"아니요. 최악의 경우에서 WBS를 짜는 상황을 대비해서 물어본 거예요. 아직 기획팀 일이 어려워서, 미리미리 준비해 둬야죠. 실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당황하지 않게"


라선은 어색한 웃음을 남기고 회의실을 나갔다.


노트북을 들고 혼자 남은 세안나는 뭐 하러 이곳에 왔는지 까먹었다.



세안나와 얘기를 끝낸 후 라선은 곧장 헬렌에게로 갔다. 라선은 헬렌을 데리고 비상계단으로 갔다.


"확인했어요. 할 수 있대요."


"그럼 전..."


"허니맨한테 가서 당장 말해야죠!"



사무실로 돌아온 헬렌은 허니맨에게로 갔다. 허니맨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헬렌을 바라보았다. 허니맨은 헬렌을 회의실로 데려갔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자리에 앉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 있나요?"


헬렌이 말을 꺼내기 전에 허니맨이 먼저 말했다.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켁, 켁.


헛기침을 하고, 헬렌이 말을 이었다.


"사직 신청을 철회하고 싶습니다."


허니맨은 헬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무 밑동을 찍는 도끼처럼 단호했던 헬렌이었다. 반전된 태도에 허니맨은 붕 뜬 기분이었다.


"어제 퇴근 후에 라선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결정했습니다. 여기 남아서 계속 근무하고 싶습니다."


라선이 한 번 더 면담을 했다. 그리고 효과가 있었다. 허니맨의 안색이 밝아졌다.


"가능할까요?"


헬렌이 물었다.


"물론이죠. 웨일한테 말해둘게요. 이견 없을 거예요. 헬렌은 필수 인력이니까. 만약 안 된다고 하면 제가 설득해서 꼭 철회시킬게요."


허니맨 과장스럽게 얘기했다. 웨일은 무조건 철회 신청을 받아줄 것이지만, 그걸 대놓고 말해선 안 된다. 최종 결정자가 가벼워 보이면, 회사의 판단을 우습게 볼 수 있다. 허니맨은 자신을 쿠션으로 사용했다.





아직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헬렌은 심호흡했다. 가장 결과를 알 수 없는 시험이었다.



"세안나 말씀드릴 게 있어요."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헬렌은 휴게실에 세안나가 혼자 있는 틈을 타, 말을 걸었다.


"특허 관련이죠? 그래서 자료는 다 찾았어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세안나가 물었다.


"그게 보관하고 있던 게 다 날아간 것 같습니다."


세안나의 눈이 예리해졌다.


"백업은?"


"뒤져봤는데, 없더라고요."


"github에는 올려놓았을 거 아니에요?"


"제 계정에는 없었습니다."


"헬렌, 프로그래머죠?"


"네."


"지금 이 상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특허까지 낸 기술인데, 로컬 저장소에도, 원격 저장소에도, 클라우드에도 없는 게!"


세안나가 언성을 높였다. 진짜 있었더라면, 백업도 github에 업로드도 모두 되어 있을 것이다.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특허, 제대로 낸 거 맞아요?"


헬렌은 세안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라선이 말했듯이 세안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라선과 함께 있을 때 언뜻언뜻 드러났던 부드러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후드를 벗은 세안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잡고 뒤로 쓸었다. 당장 물건을 던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덩치는 헬렌이 두 배나 컸지만, 세안나에게는 사람을 제압하는 살기를 지니고 있었다. 라선이 경고한 대로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유일한 희망이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헬렌이 침을 삼켰다.


"특허 가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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