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30화

by 설다람




"지금 무슨 말이에요?"


세안나가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특허는 가지고 계신 내용이 전부이고, 실제로 구현한 적은 없습니다.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한 특허입니다."


헬렌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심판을 받기 직전의 제물처럼 담담한 어조였다. 세안나가 헬렌을 노려 보았다.


"지금 장난쳐요?"


"죄송합니다."


특허는 개발되지 않았다. 기초적인 아이디어가 전부였다. 그 말인즉슨 거의 처음부터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회의에서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예상보다 빠르게' 구현을 마무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상황 아는 다른 사람 있어요?"


"라선에게만 보고했습니다."


그래서 라선이 아침에 유난을 떨었구나. 아무리 기획 팀장이라고 해도, 개발 리더는 자신이었다. 헬렌이 자신을 건너뛰고 라선에게 이 사실을 먼저 알렸다는 사실에 세안나는 한 번 더 화가 났다. 헬렌은 자신을 불신하고 있었다. 불신은 곧 무시처럼 여겨졌다.


"지금 개발 리더가 누구죠?"


"세안나..."


"그런데 그걸 왜 라선에게 먼저 얘기해요? 이 문제, 기획팀에 전달한다고 없던 기술이 생기나요?"


헬렌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새로 들어오고 나서 현황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프로젝트 일정 어그러뜨렸다고 비난받을 사람은 저예요. 고압적으로 보일까 봐 일부러 재촉도 하지 않았는데, 자료 가져온다고 기다린 사람 바보 만들면 좋아요?"


어딜 가나, 트러블을 일으킨다는 이미지를 벗으려 애썼다. 그런데 뒤통수를 맞았다.


"꼭 개발해 내겠습니다. 특허."


"헬렌이 뭘 할 수 있어요!"


세안나가 고함쳤다. 깔보는 말이었다. 다잡지 않으면, 곧바로 튀어나오는 말투였다. 자신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그래서 먼저 내뱉게 되는 말투였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 앞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선다. 완전히 달라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전 회사처럼 누구도 가까이 다가오려는 엄두도 내지 않을 만큼, 외면받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뒤틀린 성격이 용틀임했다.



"나가봐요."


나지막이 세안나가 명령하듯 말했다.


헬렌이 나가고 물을 한 잔 마셨다. 물에서 쓴 맛이 났다.



자리에 앉아 WBS 편집창을 켠 세안나는 개발팀 작업 일정을 수정했다.


1개월로 설정되어 있던 마감기한을 지구 끝까지 연장시켰다.





일정 변경 알림이 떴다. 라선은 WBS를 확인했다. 개발팀 작업 일정이 가로로 무한히 늘어져 있었다. 마지막 편집자는 세안나였다.


헬렌이 특허가 가짜란 사실을 고백한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 저녁 헬렌과 마지막으로 구상했던 계획은, 헬렌이 솔직하게 사실을 바른대로 말해 자신이 내린 결론을 세안나가 똑같이 도출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논리적인 세안나라면, 같은 결론을 내릴 것이다. 특허에 대한 추가 정보가 부재하다면, 無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그나마 특허와 관련된 지식을 조금이나마 가진 개발자를 자를 이유는 없었다. 새로운 개발자를 뽑는 것도 소모적이다. 특허가 가짜라는 사실에 분노는 할지언정, 이 사실을 가지고 법적 문제를 다투면서까지 분란을 일으킬 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세안나는 전사적으로 자신의 적의를 드러낸 것과 다름없었다. 개발팀에 무리가 가지 않게 조정한 일정을 논의하기도 전에, 세안나가 너무 빠르게 움직였다. 세안나가 총구를 겨누고 있는 상대는...



자신이었다.



"잠시 나가서 이야기 좀 해요."


세안나가 자리로 와서 말했다.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세안나는 밖으로 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갔다. 라선도 뒤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늘은 깨질 듯이 맑았다.



"언제 알았어요. 특허 가짜라는 거."


라선이 올라오자마자 세안나가 쏘아붙였다.


"어젯밤에요."


"왜 바로 얘기 안 해줬어요. 아침에 알려줄 수 있었잖아요. 그것 때문에 특허 없어도 개발 가능하냐고 물어본 거죠?"


"미안해요. 사안이 조금 복잡해서, 바로 말 못 했어요. 세안나도 알 듯이 간단한 게 아니잖아요. 개발팀 업무 과중되지 않게 MVP는 해당 기능을 빼는 것으로 조정해-"


"그러니 더더욱 먼저 얘기해 줬어야죠!"


세안나가 소리쳤다.


"업무가 얼마큼 과중될지, 라선이 예측할 수 있어요?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지, 얼마나 걸린다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뭘 조정해요. 개발 이슈인데, 저랑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헬렌이랑 이야기 나누고, 결론 내리고, 통보하듯이 사실 알려주면 끝이에요?"


몰아치는 격양된 목소리에 귀가 얼얼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잘못인 줄 알면서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던 일이다. 헬렌의 퇴사를, 헬렌이 삶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기를.


세안나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라선은 입을 다물고 들었다. 바람이 두 사람 사이로 불었다. 라선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손으로 머리를 뒤로 넘겨 정리했다.


"헬렌한테 사적 감정 있어요?"


눈을 찌푸리며, 세안나가 물었다.


"그건 전혀 아니에요!"


라선이 부정했다.


"그럼 나한테 감정 있어요?"


"그럴 리가요!"


라선이 부인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든든하거든요. 넥스테이트에서 건너온 사람 중에 제일."


세안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라선이 말했다. 세안나도 라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적 감정은 아니지만, 감정으로 헬렌을 돕고 있는 건 맞을지 몰라요. 세안나한테도 오지랖 부렸듯이. 헬렌이 퇴사하든, 하지 않든, 일정이 뒤쳐지는 건 똑같다면, 그래도 지금 있는 인력 하나를 잃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어요. 업무 상으로도 옳은 판단이라 생각해, 급하게 밀어붙였고, 무례를 범했어요.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라선이 다시 한번 정중히 사과했다. 세안나는 못 본 척했다. 침묵이 거대한 빙산처럼 떠있었다.


넥스노트로 오고 나서, 조금 유연해진 세안나의 모습에 너무 쉽게 선을 넘은 듯했다. 자신이 아닌 타인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영역이다. 헬렌의 영역도, 세안나의 영역도, 모두 라선이 침범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영토였다. 논리는 공유할 수 있지만, 생각은 공유할 수 없다. 같은 뼈대를 만진다고 해도, 감정이란 살이 붙는다.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는 자신의 역산은 진공의 공간에서 이루어진 계산이었다. '세안나는 논리적이다'라는 생각도 편견이었다. 미세한 톱니바퀴가 수백 개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미안함이 몸 안에서 드르르 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았다. 말로는 결코 전달할 수 없는 미안함이었다.



"소리쳐서 미안해요. 먼저 가 봐요. 열 좀 식히다 내려가게."


세안나가 등을 돌려 하늘을 보며 말했다. 라선은 알겠다고 말하고, 사무실로 내려갔다.





웨일은 장난으로 분필을 칠판 끝까지 그려놓은 것 같은 WBS를 확인했다. 장난인가, 실수인가? 최종 편집자는 세안나였다. 세안나가 실수로, 장난으로, 이런 걸 할 리가 없었다. 장난쳐서는 안 되는 일이고. 내선 번호로 세안나에게 전화했다. 다른 사람이 대신 받아 지금 잠시 자리 비웠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라선에게 전화했다. 관리자는 라선이니까. 또 다른 사람이 대신 받아 지금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답했다. 설마 둘이 지금 난리 피우는 거 아니지? 웨일은 넥스테이트에서 두 사람이 거의 주먹다짐 직전까지 갔던 사건을 기억했다. 회사에 근무하면서, 그날과 같은 소동을 본 적은 없었다.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사람들이, 공적인 장소에서 감정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것은 미숙한 행동이었다. 라선의 수습이 끝나기 전까지 두 사람의 관계를 계속 주시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날 리코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사무실은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만약 둘이 다시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고 있는 것이라면, 당장 찾아내 말려야 한다. 신규 프로젝트에 집중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에, 감정싸움을 할 여유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웨일은 개인 연락처로 세안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다섯 바퀴를 돌았을 때, 세안나가 전화를 받았다. 길게 늘어진 일정표에 대해 묻자, 내려가서 설명해 주겠다고 했다.




잠시 후 세안나가 방으로 찾아왔다. 밖에 있다가 왔는지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홧김에 변경한 거예요. 돌려놓을 게요. 그런데 원래 일정대로는 못 돌아가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특허, 보완할 수 있는 자료가 없대요. 백업이 날아간 모양이에요."


세안나가 기가 차다는 말투로 말했다.


"헬렌이 가지고 있다면서요?"


"확인해 보니, 없다네요. 퀵펜슬 계정으로 관리했는지, 전 대표가 관리했는지, 아무튼 없대요. 이 상황에서 원래 일정 대로 가는 건 무리예요."


"라선도 이 사실 알아요?"


"알다마다요. 제가 WBS에 난리 쳤는데, 모를 리 없죠. 대화 좀 했어요. 지금은 MVP 출시가 우선이니, 특허 관련 기능은 제외하고 진행하기로. 뭐 기획팀장이 어련히 알아서 조율하겠죠."


세안나가 비꼬듯 말했다.


웨일은 당황스러웠다. 특허를 보고 리코가 회사를 매수했는데, 특허를 활용할 수 없다. 페인 포인트를 넘어 히든 니즈까지 한 번에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불가능해졌다. 첫 발을 내밀기도 전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헬렌이 사직서를 낸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나. 아직 헬렌의 사직서는 보류 중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헬렌을 퇴사시켜도 문제가 되지 않을 듯했다. 특허가 아니면, 굳이 남길 필요가 없다.


"그럼 지금 당장 라선도 부르죠."


웨일이 전화를 걸려 했을 때, 세안나가 먼저 일어나 자신이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웨일의 방에서 나온 세안나가 라선에게로 갔다.


"라선, 특허 처음부터 새로 개발하는 방향으로 새로 짠 WBS 초안 있죠?"


라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헬렌과의 문제가 풀리고, 세안나에게 바로 보여주려던 자료였다.


"웨일한테 특허 보완 자료가 없어, 무용지물이라고 해뒀어요. 거의 깽판 치고 와서, 지금 웨일 패닉이니까. 라선이 안심시켜줘야 해요."


"고마워요. 세안나."


"고마우면 나중에 지분 나눠줘요. 0.1%."


"어..그건."


"농담이에요."


이 상황에서 세안나가 농담을 할 줄이야. 라선은 웃어야 할지, 어이없어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노트북을 챙기고 라선은 세안나와 함께 웨일 방 문 앞에 섰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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