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25화

by 설다람


라선을 본 규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라선 씨? 여길 어떻게?"

"어제부로 퀵펜슬, 아니 넥스노트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설마 새로온 기획팀장이 라선이라고?

"규인 씨는 츠렌이 어떻게 돼요?"

"헬렌이요..."

"반가워요. 잘 부탁해요."

라선은 인사를 마치고, 기획팀장의 자리로 갔다. 규인, 헬렌은 망연하게 라선의 뒷모습을 봤다. 직속은 아니더라도, 직급을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라선은 엄연한 상사였다. 해고를 당했던 동료가 상사가 되어 돌아왔다. 헬렌은 믿을 수 없었다. 루팡 이츠 배달원 모습을 들켜도, 연이 닿을 일이 없으니,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까가 걱정되었다. 열등감이 불에 달군 돌멩이처럼 손에 떨어진 것 같았다.

당혹스러움을 갖추고, 개발팀 자리로 갔다. 그곳엔 새로 온 개발리더가 앉아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헤드폰을 끼고 있어,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인사를 먼저 해야 한다는 생각에 헬렌은 책상 바로 앞까지 갔다. 개발리더는 미동조차 없었다. 헬렌이 책상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그제야 개발리더가 헤드폰을 벗고,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제 빠진 헬렌이죠."

"네, 헬렌입니다."

"오늘 오전 10시에 신규 앱 기획 회의가 있을 예정이에요. 그전에 '인공 지능 기반 자동 컨텍스트 및 메타데이터 추가를 이용한 의미론적 메모 작성 시스템' 특허 적용된 데모 있어요? 특허 문서 헬렌이 썼다면서요. 한 번 보고 싶어서요."

헬렌은 당황했다. 대표가 초창기에 투자자들을 현혹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했던 특허를 새로 온 개발리더가 덥석 물었다. 기본이 되는 논리는 있었지만, 나머지는 다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젠 그런 특허 따위는 모두 잊었을 텐데, 어떻게 이 사람이 그걸 알고 있지?

"데모는 없습니다..."

"아쉽네요. 그럼 이따 회의 끝나고 얘기 좀 하죠."


세안나는 다시 헤드폰을 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대회의실에는 웨일과 라선, 세안나, 디자인 팀장 고론이 모였다. 고론은 넥스테이트 출신 사이에 혼자 덩그러니 놓인 것 같았다. 그나마 라선이 있어서 완전히 외따로운 느낌은 덜했다. 그 때문에 일부러 자리도 라선 옆에 앉았다.

"라선 사업 계획 간단하게 브리핑해줄래요?"

"네, 현재 부동산 매물을 검색하는 앱은 많지만, 검색 후 실제 방문 단계에서 사용자가 임장 내용을 기록하는 기능은 전무해요. 임장고고가 파고들 지점은 바로 그곳입니다. 매물을 발견한 뒤, 대다수의 사용자는 개인 메모에 임장 내용을 기록합니다. 그 행위를 모두 끌어올 수 있다면, 사실상 부동산 검색 앱을 사용하는 사용자를 모두 가져올 수 있는 것이죠. 앱에서 핵심이 되는 요소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위치 기반 메모 작성, 두 번째 임장 매물 기본 정보 자동 입력, 세 번째 데이터를 통한 개인 맞춤형 매물 추천."

라선은 유리 칠판에 삼각형을 그리고는 삼각형 바깥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이 세 가지를 반드시 앱에 담아야 해요."

말을 마치고, 마카의 뚜껑을 닫았다. 똑.

달랐다. 퀵펜슬을 떠날 때의 라선과, 돌아온 라선은.

고론은 예리하게 벼려진 라선을 바라보았다. 인상마저 달라진 듯했다.

"기획 조금 더 잡혀야 PoC(Proof Of Concept)가 가능하겠지만, 우선 첫 번째로 말한 건 자동적으로 불러 온 위치 정보를 기반으로 메모에 위치값과 아파트 정보를 메타데이터로 달면 쉽게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번째, 임장 매물 기본 정보라고 하면, 연식, 현관구조, 세대수, 주차 대수 같은 걸 말하는 건가요?

세안나가 물었다.

"네, 지금 서비스되고 있는 유사앱에는 해당 기본 정보를 사용자가 스스로 다시 기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요. 이걸 자동화시켜서 한 번에 채운 뒤, 사용자는 실제 임장에서 얻은 새로운 사실, 개인적으로 느낀점을 작성하는 집중하도록 하는 게, 우리 앱이 지향해야 할 목표죠."

라선이 대답했다.

"그거라면 타사 부동산 검색앱의 정보를 끌어오는 방식으로 만들어야 할 듯한데,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할 것 같네요. 마지막 건은, 오히려 가장 빨리 만들 수도 있을 거예요.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세안나가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말했다. 믿는 구석이란 말에 라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자인팀 의견은 어때요?"

웨일이 고론에게 물었다. 고론은 얼었다. 세 사람은 이미 충분히 신규 사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웨일이 들어오고 나서, 새로운 앱 개발이 주요 안건으로 나오긴 했지만 실행되지 않고 있었다. 보여주기식 신규 프로젝트라고, 고론은 생각했다. 그러나 신규 사업 추진은 진짜였고, 퀵펜슬 앱이 폐기되는 것도 진짜였다.

"완전히 새롭게 만들면 비용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 것 같아요. 퀵펜슬에 사용했던 디자인 컴포넌트를 재활용하면 좋을 것 같아요. 퀵펜슬이랑 이어지는 것처럼도 보이고."

조심스럽게 고론이 제안했다.

"고론이 말한 대로 그렇게 하면 비용과 시간을 아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다시 확실히 하고 넘어갈게요. 임장고고는 퀵펜슬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아요. 진짜 바닥에서부터 처음 쌓아 올린다고 생각해요."

웨일이 사업 방향을 다시 강조했다.

이 사람들은 진짜 갈아엎을 생각이다. 고론은 탈주해야 하나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작은 회사에 들어와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대표가 바뀌고, 정시퇴근 문화가 정착되는 듯했는데, 이렇게 되면 다시 일더미에 쌓일 수도 있었다. 두려움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 말고는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없네요..."

고론이 어딘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끝냈다.

"그럼 세안나! 첫 번째 위치 기반 메모 작성, 두 번째 임장 매물 기본 정보 자동 입력을 먼저 기술로 구현되는지 확인해 줄 수 있어요?"

라선이 세안나에게 물었다.

"해 봐야죠. 기획 팀장님 요청인데."

세안나가 양손을 들었다.

"그동안 전 고객 니즈를 파악해서, 우선적으로 PoC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게요."

"어떻게?"

"고민해 봐야죠. 회의 끝나고."

라선이 어깨를 으쓱했다.


회의는 군더더기 없이 끝났다.


고론이 회의실을 나오면서 라선에게 말을 걸었다.

"넥스테이트에서도 이런 분위기였어? 살벌하게 프로젝트에 목숨 거는 거?"

"에이, 그럴 리가요. 원래 이 사람들이 각 잡는 거 좋아해서 그런 거예요. 정시 퇴근은 칼같이 지켜요."

고론의 마음을 읽었는지, 라선이 안심시켜 주었다.

"다행이다! 난 또다시 야근하는 줄 알았어."

"아, 한 가지 조건이 있었어요. 제시간에 자기가 할 일은 반드시 끝내기."

합리적인 조건이었다. 이전엔 할 일이 모두 끝났어도 다들 눈치 보느라 정시에 일어나지 못했다. 정시에 일어나 나가는 날에는 같은 팀도 아닌데, 프레시가 언제나 딴지를 걸었다. '6시 딱 맞춰서 나가면 5시 50분부터 퇴근할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 아냐!' 프레시는 몰랐다. 계획하면 딱 맞춰서 일을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잔여 업무를 효율적으로 정리해 다음날로 넘기는 일도 업무 중 하나라는 것을.


퀵펜슬은 사라졌다. 퀵펜슬에 다니던 자신도 사라졌다. 새로워져야 한다.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 밀려나가지 않기 위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 고론은 처음 디자인을 맡았던 앱을 떠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아프리카 매미 떼 소리로 아침을 깨우는 알람앱이었다. 고론은 사람들이 정지 버튼을 쉽게 찾을 수 없게 알람이 울리는 화면을 매미 떼가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것으로 디자인했다. 알람앱 중에 가장 혐오스러운 앱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자신의 디자인 실력은 형편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퀵펜슬에서 팀장을 달 수 있었던 건, 언제나, 항상, 가장 늦게까지 야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치를 주면, 눈치를 받는다. 아버지는 항상 말씀하셨다. 할 거 없으면 얼른 집으로 와서, 일 좀 도우라고. 하지만 고론은, 디자인 일을 하고 싶었다. 오래. 새로 바뀐 내각의 움직임을 잘 살펴야 한다. 고론은 숨을 죽였다.



첫 번째 기획 회의가 끝났다. 리코가 나눠준 사업 계획서 덕분에 수월하게 첫 시작을 끊을 수 있었다.

고론에게 말한 대로, 임장고고는 퀵펜슬과 어떠한 연관 관계도 없어야 한다. 임장고고와 이어져야 할 것은 '넥스테이트'와 '부자고고'였다. 사명을 '넥스노트'로 변경하고, 신규앱 명칭을 '임장고고'로 한 건은, 엑시트 성공 신화를 이용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넥스테이트 출신이 가서 만든 앱이라는 이미지를 주는 것이었다. 부자고고가 리뉴얼을 통해 얻어낸 사용자의 신뢰를 빌려와 초기 사용자를 유입시킨다. 개발이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보도자료도 나갈 것이다. 투자 유치를 위해. 리코가 직접 인수한 기업이라는 사실에 몇몇 투자사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지난 엑시트로 한몫 챙긴 엔젤윙즈도 그들 중 하나였다. 넥스테이트를 먼저 알아보고 투자 결정을 내린 민초율은 업계에서 스타 심사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아직 직접 접촉해오진 않았지만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올려놓은 자신의 지위에 쐐기를 박기 위해서, 다음 선택은 훨씬 더 신중하게 내리겠지. 웨일도 마찬가지였다. 직원이 아니라 한 기업의 최고경영자로서의 첫 무대였다. 리코가 그린 설계도에 따라서 움직일 것인지, 벗어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책임감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책임감은 대개 상황이 나쁠 때 등장하는 단어니까. 최악의 상황엔 책임감마저 무력해진다. 전 퀵펜슬 대표가 그랬다. 그 사람은 무엇도 책임지지 않고, 회사를 버렸다. 개인의 삶에서는 옳은 결정이었다. 회사에 남겨진 사람들의 삶에서는 무책임한 결정이었다. 어쩌면 그 사람은 다른 곳에서, 다른 무엇에, 책임을 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그러지 않을 수 있니. 개별 프로젝트의 성과를 책임지는 것과 회사의 성과를 책임지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넥스테이트에 들어간 것처럼

매일을 후회하며 회사에 나오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리코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왠지 이것마저 리코의 계획 안에 있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부정할 수 없는 승부욕이 가슴 안 바닥을 달궜다.


라선은 부자고고 웹페이지를 왼쪽 모니터에 띄우고, 오른쪽 창에는 빈 메모 페이지를 띄웠다.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와 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거르지 않고 두서없이 적었다. 매물 검색 플랫폼에서 누락된 임장 기록 기능을 따로 서비스로 제공한다는 리코의 발상은 설득력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니즈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스타트업이 실패하는 원인 중 1위는 고객이 바라지도 않는 제품을 팔려고 해서이다. 고객 조사를 했다고 해도, 대부분이 유도 질문 투성이인 설문 조사와 미숙한 인터뷰를 통해 니즈를 파악하려 한다. 반드시 피해야 하는 실수이다. 느리더라도 인지적 종결 욕구를 이겨내고, 간접적인 질문을 하나씩 던져 고객의 진짜 페인포인트가 무엇인지, 어떤 기능에 지불 용의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간단하면서 명료한 질문들, 테크니컬 라이팅의 기본 원칙이었다. 기본 원칙은, 기본 원칙답게 대부분의 상황에서 적용되었다. 라선은 칼자루처럼 원칙을 꽉 잡았다. '한 번에, 하나씩 벤다.'라는 마음가짐으로 고객의 니즈를 발라내야 한다.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세안나가 개발팀으로 돌아왔다. 세안나는 의자에 앉아, 눈을 1분 정도 감았다가 떴다. 헬렌이 세안나의 눈치를 살피다, 눈을 마주쳤다. 무엇이 생각난 듯 세안나가 의자를 굴려 헬렌에게로 갔다.


"신규 앱에는 이용자가 기록한 내용을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해요. 특허가 요긴하게 쓰일 것 같아요. 그럼 이제 자세히 알려주실래요. 헬렌?"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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