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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나른한 공포

by 설다람

지하철에 눈을 떴는데, 응봉역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순간 싸한 기분이 들어, 앞 사람에게 다급히 물었다.

"수색역 지났나요?"

"저도 조금 전에 타서 모르겠는데요."

"아마 지났을 거예요."

내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옆 사람이 심각한 목소리로 알려줬다.

그도 그럴 것이, 수색역부터 응봉역까지는 32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시계를 보니, 6시 40분이었다.

문이 열리자 마자, 열차에서 내려 다음역이 어디인지 보았다. 왕십리역이었다.

여기서 굉장한 인지부조화가 일어났다.

분명 왕십리역에서 열차를 탔는데, 40분이 지났는데, 한 정거장만 지났다고?

한 가지 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왕십리역행 열차를 타는 방향이라니, 회사를 가려면 수색역 쪽으로 가는 열차를 타야 하는데, 하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 반대편 승강장으로 가니, 응봉역에서 옥수역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뭐지, 난 분명히 6시에 왕십리에서 열차를 탔다. 그런데 눈을 뜨니 6시 40분이고 응봉역에서 왕십리역으로 가는 열차에 타고 있었다.

한 바퀴를 돈 건가? 2호선이 아닌데...

그리고 곧 깨달았다.


출근길이 아니라,

퇴근길이었다는 것을.


아침 6시 40분이 아니라,

저녁 6시 40분이었다는 것을


해가 뜨고 있는 게 아니라

지고 있다는 것을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라 다시 반대편 승강장으로 갔다.


다음 열차가 오기까지 7분이 남았고,

이런 식으로 살다 결국 마지막 한 칸을 가지 못하고 허둥대다 삶을 마감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 옷을 빨기 위해 코인 세탁기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중에 새치기를 또 한 시간을 버린 순간

평생 이렇게 살 순 없다고 다짐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 작가가 있다고 한다.


운좋게도, 그런 사람이 아니라 단호한 결단을 내리지 않겠지만,

오랜만에 시공간이 제대로 휘어져서 돌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토록 나른한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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