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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를 사랑한 선비

이덕무가 세상을 바라보며 살았던 법

by 펠릭스


사람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아갑니다. “나는 왜 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스스로 묻고 답하며 의미를 찾아갑니다. 저는 역사 속 인물들의 삶에서 우리들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고 그것을 글로 써서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인물은 다소 생소한 인물일 수도 있는데요, 이덕무라는 인물입니다. 차태현 주연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차태현이 역할을 맡았던 인물인데요, 이덕무를 모티브로 하여 영화를 제작하였습니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얼음을 훔치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지는 않았지만, 작중에 서양에서 수입한 책들을 읽는 모습이 나오는 것처럼 이덕무는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 : 책만 보는 바보)라고 할 정도로 책을 읽고 학문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청나라에서 들여온 고증학(고전 문헌과 언어를 연구하는 성리학의 한 종류)을 연구하여 정조시대 규장각 검서관으로 강진에 진출합니다. 이덕무는 다른 성리학자와 다르게 조금은 독특한 방식으로 공부하고 책을 쓰고 세상을 바라봤는데요,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이덕무(차태현 역)를 모티프로 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덕무는 1741년(영조 17년)에 오늘날 서울 인사동 부근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은 전주 이씨 로 정종의 아들인 무림군의 10대 손자로 왕족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성호는 통덕랑이라고 하여 정 5품 상계의 관직으로, 오늘날 4급 공무원과 비슷한 직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도 한양에서 왕족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관직도 높았지만 정실부인의 아들이 아닌 서얼로 태어났습니다. 조선시대때는 서얼에 대한 차별이 심했는데요, 과거 응시에 제한이 있었고 관직에 오르는 것도 쉽지 않았으며,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양반집 아들이지만 생계를 걱정하여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해결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덕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독서였습니다. 이덕무는 책을 읽고 연구하는 것에 몰두하였는데요, 하루는 전라남도 강진에 표류한 청나라 상인이었던 황삼과 대화를 나누고, 이를 기록할 정도로 지적 호기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독서와 공부에 매진하는 한편, 이덕무는 박제가, 유득공 등 백탑파 출신 실학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실학자는 실학을 탐구하는 학자들로, 여기서 실학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규정과 예법 중심적으로 흘러가버린 성리학의 단점을 비판하면서 현실 문제에 관심을 둔 학문입니다. 실학자들은 기존의 권위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성리학을 떠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민생을 위한 학문과 생산의 증대를 강조하였습니다. 이덕무는 청조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경서(유학이나 성리학 도서)의 고증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언어 등의 분야를 연구하였고, 청나라 고증학자인 고염무의 『정림 집』을 수입하여 연구하였고, 『기년아람(紀年兒覽)』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온다는 속담처럼, 서얼 출신의 이덕무도 벼슬길에 오를 기회가 생겼습니다. 1777년에 정조 임금이 즉위하면서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고히 하고 기존의 붕당 체제를 견제하기 위해 초계문신제도를 통해 서얼 출신들의 실학자들을 등용하는데요, 이덕무는 같이 교류하던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에 임명됩니다. 규장각은 정조가 세운 왕실 직속 도서관으로 오늘날 국회 도서관과 비슷했는데요, 그곳을 관리하던 검서관(사서) 또한 임금이 직접 임명하였는데 서얼 출신이었던 이덕무가 임명된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인사였습니다. 서얼 출신이라 관직에 등용되는 것도 쉽지 않았던 그에게 왕이 세운 도서관에, 왕이 직접 임명하는 직책에 앉은 것은 대단한 성공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자신이 출세하고 업적을 세우고 누구를 만나고 한 것들을 글로 남기고 시로 노래하였습니다. 자연의 풍류를 즐기면서 자신의 출세와 업적을 뽐내고 과시하려고 하였는데요, 이는 후손들에게 자신의 업적과 공을 알리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이라고 강원도 지방을 노래하면서 임금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는 시를 썼습니다. 수험생들을 힘들게 한 시입니다. 이덕무 또한 글과 책을 썼지만, 이덕무는 기존 사대부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을 뽐내고 자신이 한 일을 과시하는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덕무는 자신의 책을 시작하는 시문에 영처고(嬰處稿)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영이라는 한자는 영유아 할 때 쓰는 그 영입니다. 갓난아이라는 뜻이고요, 처라는 한자는 처녀 할 때 쓰는 그 처입니다. 처녀라는 뜻입니다. 풀이하면 ‘갓난아이와 처녀의 원고, 글’이라는 뜻이에요. 이 영처고의 서두는 다음과 같습니다.


글을 짓는 것이 어찌 어린아이가 장난치며 즐기는 것과 다르겠는가? 글을 짓는 사람은 마땅히 처녀처럼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자신을 감출 줄 알아야 한다... 어린아이가 장난치며 즐기는 것은 천진 그대로이며 처녀가 부끄러워 감추는 것은 순수한 진정 그대로인데, 이것이 어찌 억지로 힘쓴다고 되는 것이겠는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영처고(嬰處稿)자서



이덕무는 자신이 글을 쓰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치며 즐기는 것처럼’, ‘처녀가 부끄러워 감추는 것처럼’ 순수하고 천진하다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천진한 마음과 처녀의 순수한 마음은 가식이나 꾸밈이 없는 진정성을 교집합으로 가집니다. 이덕무는 진정성이 드러나고, 아이처럼 천진하면서도 처녀처럼 순수하게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글로 옮깁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 카스테라를 아시는지요? 달걀과 밀가루, 설탕, 꿀을 섞어 틀에 넣어 구워서 부드러운 식감과 달달한 맛을 가진 빵입니다. 카스테라는 스페인, 포르투갈 지역에서 만들기 시작하여 16세기 중반 당시 포르투갈과 무역하던 일본 나가사키에도 들어오며 동양에 전파되었습니다. 당시로 귀한 재료였던 설탕과 꿀을 많이 넣었기에 대중적으로 전파되기보단 다이묘 등 높은 계급의 사람들만 먹거나 외국에 사신이 오면 대접하던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조선통신사와 사신의 자격으로 일본에 갔던 조선인들은 카스테라를 대접받았고, 사신들은 카스테라를 설고(雪餻, 雪糕)라고 하여 눈과 같은 떡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카스테라가 조선에 이덕무를 통해 이 카스테라가 조선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는 것 알고 계셨나요? 이덕무는 카스테라를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이덕무는 일본어 발음인 카스테라를 음차 하여 가수텨라(加須底羅)라고 하였고, 자신의 저서 청정관전서에서 카스테라를 소개하였습니다.

1494391768763.jpg 이덕무가 사랑했던 카스테라, 그는 가수텨라(加須底羅)라고 음차하여 조리법과 함께 조선에 소개하였다. 출처: 여성동아




"가수저라는 정한 밀가루 한 되와 백설탕 두 근을 달걀 여덟 개로 반죽하여 구리 냄비에 담아 숯불로 색이 노랗게 되도록 익히되 대바늘로 구멍을 뚫어 불기운이 속까지 들어가게 하여 만들어 꺼내서 잘라 먹는데, 이것이 가장 상품이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어린아이의 울고 웃는 모습과 시장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모습 또한 익히 관찰하다 보면 그 무엇을 느낄 수 있다. 사나운 개가 서로 싸우는 모습과 영악한 고양이가 스스로 재롱떠는 모습을 가만히 관찰하다보면 지극한 이치가 그 속에 있다. 봄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는 것과 가을 나비가 곷 꿀을 채집하는 것에는 하늘의 조화가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 모두가 지극히 세밀하고 지극히 미미한 것이지만 제각각 그 속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지극히 오묘하고 지극히 변화하는 만물의 원리가 담겨 있다. 무릇 천지의 높고 넓은 것과 고금의 오고 가는 것을 관찰하면 이 또한 장관이고 기이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개, 고양이 같은 짐승과 누에, 나비 같은 벌레나 곤충에서 이덕무는 세상의 이치나 천지의 조화를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덕무는 많은 견문과 지식을 쌓은 엘리트들의 논리적 사고, 이성적 사유가 아니라 천연의 본성 그대로의 존재, 어린아이의 눈과 동심으로 사물을 보았을 때 얻을 수 있는 지혜와 식견을 소개하였습니다. 미세하고 개별적인 사물에도 지극한 이치가 담겨 있다고 한 이덕무는 주변의 작은 것들도 사소하게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울타리의 거미, 하늘의 구름, 피는 꽃, 눈 덮인 설원 등 모든 것이 이덕무의 글쓰기 소재가 되었으며, 이덕무는 그런 세심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독서와 함께 글쓰기는 이덕무에게 있어 또 다른 자기 수양의 한 방편이었습니다.


이덕무에게서 배울 수 있는 삶의 지혜

이덕무는 연암 박지원, 정약용와 시대를 같이 한 실학자이지만 교과서에 실리거나 하지 않아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이덕무의 삶과 태도, 동심에서 우리는 뛰어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의 삶은 여러 한계가 있었습니다. 서자라는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자신의 운명과 매 끼니를 걱정하며 가난하게 살았던 그의 삶에서 좌절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자신에게 다가올지도 모를 기회를 묵묵히 기다리고 미래를 위해 자신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렇게 때를 기다린 이덕무는 규장각 검서관이라는 관직에 등용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는 자신을 꾸미거나 높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순수함에서 우러나온 동심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런 동심으로 그는 삶의 모든 것을 사랑할 줄 알았습니다. 책을 사랑했고, 자연을 사랑했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가족, 스승, 벗들을 사랑했습니다. 이덕무의 삶과 동심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웁니다. 순수하고 담백하게, 그리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변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가면 자신만의 향기를 내며 좋은 영향을 주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지친 세상에 소소한 기쁨과 작은 희망을 가져다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참고 도서

-『글쓰기 동서대전』, 한정주, 김영사

-『책만 보는 바보』, 안소영, 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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