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시로 노래한 이육사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빡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오늘 알아볼 인물은 이육사입니다. 《청포도》,《광야》,《절정》으로 유명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지요. 일제 강점에 대항하면서 빼앗긴 조국을 향한 그리움을 시로 노래하며 삶으로 살아낸 열정 가득한 이육사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육사는 1904년 경상남도 안동에서 아버지 이가호,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이육사라는 이름은 글을 쓰기 위한 필명으로, 원래 이름은 이원록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이가호는 천 원 지폐의 주인공이기도 한 퇴계 이황의 13대 손이었고, 뛰어난 성리학자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이원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경상북도 영천에 있는 백학학교와 보문의숙(普文義塾)에 다니다가 대구에 있는 교남학교를 다녔고, 그는 공부하면서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현실을 보면서 일제의 부조리에 당당히 맞서려는 의지를 다지게 됩니다. 그래서 1925년, 자신의 형제였던 이원기, 이원유와 함께 항일무력단체이자,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입단하였습니다. 의열단, 아마 역사 교과서에서 많이 들어보셨을 독립운동 단체일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에 있어서 주요 인물이었던 총독, 경찰 고위 간부나 주요 시설물이었던 조선총독부, 일본은행, 나아가 일왕이 있던 궁전까지, 어렵게 말해 주요 요인이나 시설물의 암살ㆍ파괴 활동을 전개한 단체였습니다. 의열단에 입단한 이원록은 1927년, 같은 의열단원이었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습니다. 이때 자신의 죄수번호가 264번이었는데요, 독립과 해방을 향한 자신의 의지를 담아 이름을 이육사라고 하였고, 한자에 이 더러운 강제 점령의 역사를 도륙하고 찢어버린다는 의미(육사: 戮史)를 담았습니다. 물론 이 한자는 주변인들의 만류로 다른 한자로 고쳐지지만, 식민통치를 향한 저항 의지를 자신의 죄수번호에 눌러 담았습니다.
감옥에서 출옥한 뒤 1929년 5월부터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1년간 근무하였는데, 그 사이 1930년 1월 3일 이활이라는 필명을 써서 자신의 첫 시(詩)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합니다. 1931년 잠깐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다가 다음 해 4월에 의열단 핵심 단원 윤세주를 만나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하였습니다. 의열단의 행동강령이었던 주요 요인이나 시설물의 암살ㆍ파괴 활동을 위해 이육사는 폭탄·탄약·뇌관 등의 제조법과 투척법 그리고 피신법·변장법·무기운반법 등을 배웠습니다.
이후 1933년 4월 학교 졸업 후 7월경 귀국하여,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하였습니다. 신문사·잡지사를 다니면서 시를 짓는 한편,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1934년 3월 의열단 관련자라는 이유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자라는 이유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으며 7월에야 기소유예로 풀려났습니다. 계속 이어진 옥살이로 지쳤을 법도 한데요, 이육사는 지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1937년 윤곤강·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하여 《청포도》를 비롯하여 《교목》,《절정》,《광야》 등을 발표하였습니다.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상을 치르기 위해 5월에 귀국하여 조선에 머무르는 동안 일본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이듬해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교도소에서 39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이전에 윤동주 시인을 소개하였을 때 시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함축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문학이라고 하였습니다. 윤동주는 국권이 침탈된 상황 속에서 주변 인물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부끄러웠던 자신을 성찰하는 작품 세계를 펼쳤습니다. 이육사 또한 일제강점기라는 똑같은 시대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윤동주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이육사 시인의 시(時)세계는 시대 저항의 의지, 주권을 잃은 나라가 마치 고향을 잃은 것과 같다고 하는 실향 의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육사는「꽃」이라는 시에서 자신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꽃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北)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이 시에서는 이육사 시인의 초인적인 의지,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을 드러냅니다. 초인적이라는 말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뛰어난 어떤 것을 말합니다. 보통 사람은 시련이나 고난, 차가운 현실, 마치 하늘이 끝나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땅과도 같은 상황 앞에서 움츠러들고, 피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육사는 「꽃」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그는 척박한 땅에서도 붉은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시련 앞에서도 자신만의 꽃을 피우려고 하였습니다.
잠시 이육사가 이 시를 썼던 시대를 살펴보면요, 1930년대 일제는 소위 말해 민족말살정책을 전개합니다. 조선인들은 조선 땅에서 살고 있지만 민족은 없다, 일본 민족에 흡수되어 일본 민족과 하나가 되어 일왕에게 충성하는 황국 시민이 된다는 사상을 자꾸 주입시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이라고 하여 조선을 시작으로 중국, 동남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합니다. 그리고는 세계전쟁을 준비하지요. 실제로 1940년 일본은 진주만(태평양) 지역에 있는 미국 항공모함들을 기습 공격합니다. 정리하면 이육사가 시를 썼던 시기 일본은 동남아시아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주변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까지 성장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안타깝게도 조선인들은 일본과 협력하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중에는 한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던 독립운동가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영화 암살 보셨나요? 그 영화에서 독립운동가였지만 변질하여 친일활동을 하였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독립될 줄 몰랐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일본은 승승장구하니까.”라고 하며 일본이 강대국이 되어 조선을 지켜줄 것 같았다고만 합니다.
일본의 세력은 점점 커져만 가고, 조선인이라는 정체성과 민족의 정신이 희미해져 가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육사는 ‘오히려’ 조국 해방, 광복의 희망을 노래합니다. 희망은 현실과 동떨어지는 것이 아니죠. 현실과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가령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는 사람이 누워만 있고 연습을 게을리하면 그 사람은 우승을 희망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 희망은 허상에 불과하죠. 매일 운동을 하고 그 강도를 높여가면서 각고의 노력을 해야 대회에서 우승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육사는 조국 해방, 광복의 희망을 시에도 담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으로도 드러냅니다. 항일 무장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하면서 일생동안 무려 17번이나 감옥에 투옥됩니다. 한 번 가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혹한 감옥을 39살이라는 짧은 일생동안 17번이나 갔던 그의 삶은 독립에 대한 희망과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삶이 무모하다고 할 지라도, 이육사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시대적으로는 어렵고 입을 모아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북쪽에서 제비가 날아오는 것처럼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조국의 해방과 광복을 염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희망과 염원이 모이고 모여 1945년 그들이 정말로 바랬던 대로 광복이 찾아왔지요.
저는 프롤로그에서 역사 속 인물들의 삶에서 현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자 지혜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육사의 삶은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말이죠. 코로나 펜데믹 속에서 지치고 힘든 우리에게 이육사의 삶은 ‘오히려’ 용기를 가지라는 메시지를 줍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그것이 지나가면 오히려 붉은 꽃이 피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고달프더라도 비가 오면 땅이 젖는 것처럼 오히려 좋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희망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허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삶을 긍정하고 좋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그때에 피는 빨간 꽃을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고달프고 불평스럽습니까? 그런 삶에 단 하나의 좋은 것도 없으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아주 작은 희망의 조각을 찾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