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육아. 노력 없이는 따뜻함도 없더라.

by 다니엘라


나는 내가 줄곧 따뜻한 사람인 줄로만 알고 살아왔다.
오래오래 그렇게 믿어왔는데,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부터는
나의 오랜 믿음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학교 등의 단체생활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나의 시간을 허락 없이 빼앗거나
나의 행동을 통제한 경우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인내심이나 평정심을
저울대에 올릴 만한 일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공감하고 이해하며 살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결혼 전의 나는 아이들을 좋아했고,
(아니 좋아한다고 믿고 있었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시간이 아까울 만큼 오래 함께 한 적도 없었다.)


내가 정말로 아이들을 좋아했던가...?
내가 진짜로 날 때부터 따뜻한 사람이었던가...?


대학 1학년 시절,
학비는 학자금 대출과
어느 정도의 장학금으로 해결했지만,
간식비를 포함한 여가비가 부족했다.
부모님은 기초 생활 자금 정도는 지원을 해주셨지만,
그 돈으로는 정말로 ‘기초 생활’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입학과 동시에 돈을 벌어들일 궁리를 시작했다.
학교 앞 커피 전문점에서 사람을 구한다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얼마간 아르바이트를 했었고,
학교 근처에 ‘스카이락’ 레스토랑이 입점한다기에
오픈 멤버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스테이크 팀에 배정을 받은 나는,
무더운 여름
스테이크 철판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홀 서빙으로 배정받지 못한 섭섭한 마음까지 보태
나름의 온당한 사유로 그곳을 나왔다.


그리고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적은 노동에 비해 고수익을 낼 수 있는,
게다가 겸업을 할 수 있는 과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과외 구함 전단을 붙인 지 이틀이 채 되지 않아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말귀를 잘 알아듣고 품이 덜 가는 중학생 과외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말귀를 알아듣거나 품이 덜 가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초등학생 공부를 봐 달라는 전화였다.
과외 전단에 ‘초, 중, 고 전문’이라고 특징 없는 문구를 써넣은 내 잘못이다.
초등학생 과외는 단가도 확 떨어졌다.
게다가 어머님은 전과목 지도를 희망하셨다.
길게 망설였다, 그러나 이내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니까. 한번 해 보지 뭐.’ 하는 마음으로 긍정의 뜻을 비추었고,
한 클래스가 성사되었다.


아이와 첫 만남을 갖는 날이다.
학교에서 길을 건너 가까이에 있는 초등학교 앞의
문구점 건물 3층 집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짜리 외동아들을 둔
문구점 사장님 댁이었다.
학교 앞에 딱 하나 있는 문구점의 아들은
바쁜 엄마 아빠를 대신해
공부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이는 착하고 귀여웠다.
그 또래의 아이들과 같은 엉뚱함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순진하고 착했으며 “네! 네!” 대답을 잘하는 아이였다.


지금은 이름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그 아이와는 6개월을 함께 공부했다. 거의 매일 문구점 3층을 드나들며 전과목 문제집을 펼쳐놓고 함께 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다음날 줄넘기 시험이 있는 날이면
공부를 일찌감치 끝내고
아이 어머님이 차려 주시는 저녁밥까지 먹고
같이 달을 보며 줄넘기 연습을 했다.
삑삑거리며 리코더 운지법을 외우게 한 날도 있었고,
정말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날은 같이 책이라도 읽었다.


아이의 운동회 날이 다가왔다.
대충 짐작은 하겠지만,
학교 앞 문구점의 대목은
설날도 추석도 아닌 학교 운동회 날이다.
학교 앞 문구점 아들은 운동회에 동행할 사람이 필요했다.
엄마도 아빠도 그날만큼은 함께하면 좋겠지만,
엄마도 아빠도 그날은 아이가 달리기 하는 모습조차 바라봐 줄 여유가 없었다.


아이 어머니의 조심스러운 부탁에
주저 없이 “걱정 마세요.”라는 말과 함께
학교 운동회의 보호자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운동장의 대 혼란 속에서 아이를 찾아냈다.
부모가 수많은 인파 속에서 자기 자식의 얼굴만 보이는 것처럼, 내 눈에도 우리 과외하는 ‘꼬마’만 보였다.
아이는 다른 날보다 풀이 죽어 있었지만,
내 얼굴을 보자 금세 방글거리며 뛰어왔다.


어영부영 운동회의 오전 프로그램을 끝내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펼치는 가족들 틈을 지나
아이와 나는 근처의 식당을 찾아 나섰다.
특별한 날엔 자장면이 좋을 것 같아
아이에게 자장면을 먹자고 했더니,
자긴 꼭 먹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만두에 라면이란다.
엄마 아빠가 아무리 바빠도 어린 아들이 라면을 먹는 것은 자주 허락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 특별한 날이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
근처 만두집을 찾았다.
라면 두 그릇과 찐만두를 시켜 운동회를 마무리 지었다.


6개월 간의 특별했던 과외를 하며,
아이들이 늘 귀엽지만은 않다는 걸 눈치채게 되었고,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일에서
엄청난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함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늘 바쁜 엄마 아빠를 대신해
문구점 아들에게
따뜻한 큰 누나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내겐 있었다.
그때도, 사실은 원래 내 성품이 아닌 노력에 의해 만들어낸 따뜻함과 이해심으로 과외학생을 대했던 것이다.
나도 몰랐던 노력이
나의 따뜻함을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전 저녁,
그 따뜻한 노력이 기억날 만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라 하기엔 너무 거창하지만,
그 노력을 떠올릴 만한 일이었다.


매일 저녁 침대 양쪽에 아이들이 자리를 잡고
책을 읽고 나면 곧바로 수면 준비를 한다.
깜깜한 방에 누워 짤막한 잡담을 하고
뒤척이다 잠드는 게 일상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두 아이가 번갈아가며
불면을 호소한다.

“엄마 잠이 안 와요...”
“엄마 귀신이 올 것 같아서 잠이 안 와요.”

안타깝게도 아이들과 함께 누워 있는 그 시간에
엄마는 잠이 쏟아진다.
아이들과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정신은 반쯤 나가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잠이 오지 않는다는 아이들에게
“그냥 눈 꼭 감고 천사 생각해! 그러면 잠이 올 거야.”
“일단 눈부터 꼭 감아봐!”
라며 다그치는 투의 말로 아이들을 강제 취침시키곤 했다.
그러지 않고는 내가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아니, 버텨내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그렇게 잠들고 싶었던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일어나면
지난밤에 대한 후회가 밀려오곤 했다.
내 아이들에게 조금 더 따뜻하지 못했던
그 밤이, 그 밤의 내가 미워졌다.


그리고 문득
아이들에게 따뜻한 엄마가 되기로
수도 없이 다짐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나라는 사람은
노력이 있어야 따뜻한 엄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해 낸다.


어제는 잠이 오지 않는다는 큰 아이를 붙잡고
괜찮을 거야.. 하며
잔잔하게 기도를 해주었다.
그리고
작은 아이에게는 더 어렸을 적 자장가로 불러주었던 곡을
불러주며 등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따뜻하게
아이들과 꿈나라로 향했다.


아이들의 에너지를 쫓아가느라
밤이 되면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워지는
감정 기복이 심한 엄마지만,
이틀에 한번 꼴로 하는 반성 덕분에
오늘 하루도 따뜻한 엄마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해 보려고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