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흩어진 시아버님의 기분 좋은 흔적들

by 다니엘라



집안 곳곳을 정리하다 보면
종종 먼지가 뽀얗게 쌓인 물건들이 보인다.
한동안 식구들의 손이 닿지 않은 물건들이다.
거기엔 가끔 우리 시아버님의 물건들이 포함되곤 한다.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달에 한 번씩
손주들을 보러 먼 길을 다녀가시는
사랑 많은 할아버지시다.
아버님의 물건들에 먼지가 쌓였다는 건
아들네에 다녀가실 때가 되었다는 증거다.


처음엔 아버님의 물건들을 따로 보관하지는 않았다.
한 번 오시면 짧게는 2박 3일,
길게는 3박 4일을 계시는데
필요한 물건은 가져오셨다가
댁에 돌아가실 때면
그대로 가방에 넣어서 가져가곤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고작해야 한 달에 3-4일만
우리 집에 머무르는 분이었다.


아니다, 가만있어봐.
한 달에 3일이면-
일 년이면 36일,
한 달에 4일이면-
일 년이면 48일이나
우리 집에 머물고 계신다는 거였다.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다.


그동안 뭔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족에게 시댁(할아버지 댁)은
일 년에 최소 두 번, 많아야 세 번쯤 방문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시댁에는 우리 작은 꼬마의 샴푸 캡과 바디샴푸
그리고 꼬마들의 콧물 흡입기가 항상 비치되어 있다.
일 년에 고작해야 두세 번 들르고 마는
우리 가족의 물건이
그곳에 늘 준비되어 있다는 건,
‘큰아들네는 언제든 환영’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시댁에 흩어진 우리 식구들의 흔적을 보며
우리 집에도 아버님의 흔적을
하나 둘 늘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작은 아버님의 칫솔이었다.
칫솔모가 알록달록한 새로 산 칫솔 중에서
감색 빛이 도는 가장 얌전한 색을 골랐다.
아버님이 쓰실 칫솔이라며 따로 빼 두었다가
아버님이 오신 날 꺼내 드렸다.
아버님은 ‘요놈 봐라~’ 하는 표정에
미소를 담으시며
칫솔을 건네받으셨다.
그리고 노란색 포스트잇 종이를
검지 손톱만 한 정사각형으로 잘라
숫자 1을 적어 넣으셨다.
숫자 1은 칫솔 손잡이에
셀로판 테이프로 칭칭 감아 붙여 두셨다.
이때부터 아버님의 칫솔은
우리 집의 1번 칫솔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님이 오실 때면 사용하시던
메밀베개를 새 것으로 사 드렸다.
땀이 많으시고 딱딱한 베개를 좋아하시는
아버님 취향에 딱 맞는 베개는
우리 집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를 하면서부터
유일하게 준비했던 아버님의 물품이
메밀베개였다.


몇 년을 그대로 두고
아버님이 오실 때면 무심히 꺼내 드리곤 했다.
관심이 닿지 않는 사이에
아버님의 베개는 많이 낡아 있었다.
더 시원하다는 신소재의 베개를 찾아내서
아버님 전용으로 새로 사 드렸다.


그리고 어느 날
욕실의 샴푸 거치대를 보니,
아버님의 파란색 헤어스프레이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초등학생 때 교회에 가는 주일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맡았던 엄마의 챠밍 스프레이와
비슷한 숨 막히는 향을 풍기는 스프레이였다.
그 향은 아버님의 하루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 같았다.
아이들을 등원시키기 전에
아버님은 얼굴과 머리를 손질하시는데
마지막은 착착착!
스프레이를 세 번 뿌리시는 것으로 마무리하신다.
아버님의 스프레이가
우리 집에 보관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상하게 그 숨 막히는 향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욕실 면도기 보관 선반에는
아버님의 가글용 왕소금이 자리를 잡고 있다.
어머님의 하얀색 플라스틱 약통을 재활용해
왕소금을 담아 오셨다.


그리고 땀이 많으신 아버님의 365일 필수품,
하얀색 땀 닦는 수건을 두어 개쯤
우리 집에 두고 쓰시기 시작했다.
큰 아이는 가끔
건조된 빨래 틈의 할아버지 땀수건을 보며
할아버지를 그리워했다.
“할아버지가 땀 닦아주시는 거 좋은데,
할아버지 언제 오세요?”


타지 생활 7년 차,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며
집안의 물건들은 하나 둘 줄여 나가는데,
시아버님의 물건들은
오히려 하나 둘 늘어가고 있다.
그렇게 늘어나는 물건만큼은 싫지가 않다.
아버님의 물건이 집안 곳곳에 자리하며
우리 집을 더 따뜻하고
사랑 많은 곳으로 만들어 주었기에
아버님의 물건들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오래 오래간만에 욕실을 정리하는데
먼지가 살짝 오른
아버님의 파란색 헤어스프레이가 보인다.
아버님이 다녀가실 때가 된 모양이다.
다음 주쯤엔 아이들을 시켜
할아버지 초청장을 보내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