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0, 51 - 미국 알래스카 앵커리지(Anchorage)
2017.03.22, 23, 24
여행 출발 전 부모님 댁으로 이사한 후, 재미로 어릴 적 물건들을 뒤적거리다 발견한 게 있다. 내가 만 6살일 무렵 유치원에서 만든 '나'에 관한 책이었는데, '가고 싶은 나라'를 써보라는 항목에 내가 '아이슬란드'라고 적어놨었다. 나는 2015년에 아이슬란드에 다녀왔다. 그곳에 대한 호기심은 대학생 때쯤 생겼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만 6살짜리가 아이슬란드를 어디서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에 'ice'가 들어가니 멋질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한 모양이다. 어릴 적부터 눈과 겨울을 좋아했으니까.
아이슬란드보다도 어릴 적부터 가고 싶었던, 그래서 내가 늘 기억하고 있었던 곳은 바로 알래스카이다. 캐나다 옐로우나이프에 가지 않기로 한 것은 그곳에 들일 시간과 돈을 온전히 알래스카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퀘벡시티 마지막 날 공항 가는 길, 나를 태워준 우버 기사에게 알래스카로 간다고 했더니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추워 죽겠는데 거기를 왜 가냐고 했다. 반면 티켓팅을 해주던 항공사 직원은 자기도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이라면서 부럽다고 했다. 추운 곳은 여행하기 힘들다는 인식이 있다 보니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내게 있어서 다음 행선지가 알래스카라는 사실은 굉장한 설렘이었다. 이전 글에서 적었듯이 나는 이 당시 여행에 대해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었고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데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며 15시간이 걸려 마침내 착륙하는 순간 바라본 바깥 풍경은 다시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저녁에 도착했으니 푹 쉬고, 다음날 아침 앵커리지를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알래스카는 도시가 크게 발달한 주가 아니다 보니 주도인 앵커리지 역시 크게 볼만한 것들은 없었다. 시내는 작았다.
아침 식사 후, 바닷가를 조금 걷다 인포메이션 센터로 가보았다. 근교에 있는 알래스카 네이티브 헤리티지 센터(Alaska Native Heritage Center)가 현재 운영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우려했던 것처럼 겨울 시즌에는 한정된 일자에만 개방을 하고, 내가 있는 동안에는 열지 않았다. 직원은 나의 알래스카 일정에 대해 묻더니(나는 앵커리지에 며칠 있은 후 북쪽 페어뱅크스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남쪽으로 향하는 일일 투어를 해보는 것은 어떠냐고 권유했다. 좋은 생각 같아서 길 건너 여행사에 문의해보았다. 마침 30분 뒤에 출발하는 투어에 자리가 남아있다고 했다. 투어 인원은 나까지 5명, 가이드까지 6명이었다. 캐나다에서 온 부부와 호주에서 온 친구 둘이었는데 작은 동양인 여자애가 세계여행을 한다고 하니 신기한 듯 투어 내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알래스카의 대표적인 scenic drive, 즉 경치가 좋은 도로인 수어드 고속도로(Seward highway)를 타고, 턴어게인 암(Turnagain arm)을 지나 알리에스카(Alyeska)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가 야생동물 보호센터(Alaska wildlife conservation center)에 갔다가 오는 코스다.
차 타고 가는 길, 아래로 알래스카 철도가 보인다. 알래스카 철도는 몇 가지 노선이 있는데 겨울에 승객을 태우는 열차는 앵커리지에서 북쪽으로 가는 앵커리지↔페어뱅크스 구간만을 운영한다. 이 사진 속 철도 역시 그 당시 아마도 화물 운반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턴어게인 암이 그 이름을 가지게 된 건 간단하다. 알래스카를 탐험하던 제임스 쿡 선장은 북서쪽으로 향하는 길을 발견하고자 했는데, 이곳의 물길을 들어가 보니 단지 강으로 연결되는 입구라고 생각하고 되돌아나갔다. 그 후 후발대가 와서 탐험을 했는데 역시나 강으로 연결되는 입구일 뿐이라고 결론짓고 다시 되돌아나갔다고 해서 턴어게인(Turnagain)이다. 참고로 암(arm)이란 바다나 호수 등으로 연결되는 좁은 물길 등을 뜻한다.
눈안개 같은 것인가, 차를 타고 가는데 음산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고.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1시간 정도 달리니 알리에스카(Alyeska)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케이블카를 타고 맨 위 전망대로 향한다. 대부분 스키를 타러 오는지, 스키나 보드 장비를 들고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올라와보니 멀리 있는 산들까지, 산맥이 한눈에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탁 트인 하늘은 설산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스키를 타지도 않으면서 여기서 스키 타면 너무나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보인 온통 눈으로 덮인 풍경에 기분이 좋았다. 날이 맑아서 많이 춥지도 않았다.
대부분 투어사에서 데려가는 식사 장소는 별로인데, 이날 간 곳은 정말 맛있는 클램 차우더와 버터 바른 빵, 그리고 달달한 시나몬 번까지 주는 아기자기한 식당이었다.
점심식사 후에는 와일드라이프 센터, 알래스카의 야생동물 보호센터((Alaska wildlife conservation center)로 향했다. 이곳은 사전에 자세히 알아보지 않아 동물원 같은 줄 알았는데, 고아가 되거나 다쳐서 야생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동물들을 델다가 보호하고 치료해준 뒤, 생존능력을 되찾으면 다시 야생으로 보내주는 곳이었다. 물론, 너무 어릴 때 왔거나 상태가 심각한 몇몇 동물들은 야생에서의 생존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평생 이곳에서 살게 되기도 한다고 한다.
알래스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무스들. 무스들의 뿔은 매년 떨어진다. 봄과 여름에 자라고 가을 이후에는 떨어지고, 봄이 오면 다시 새로 자란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뭉툭한 흔적만이 보이기도 했다.
동물원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이 굉장히 큼직큼직하다.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할 테다. 덕분에 이곳에서 보는 주위 풍경도 예뻤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곰들이다. 브라운 베어(Brown bear)들이 살고 있었는데 울타리 근처까지도 다가와서 굉장히 가까이 볼 수 있었다.
곰이 정말 죽은 척하면 내버려두냐는 질문에 가이드는 브라운 베어의 공격은 방어적인 성격이 크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공격을 멈출지 모르지만, 블랙 베어들이 공격하면 맞서 싸워야 한다고 했다. 왜 그러냐 했더니 블랙 베어가 공격한다는 것은 방어적인 것이 아니라 정말 화가 나서 끝장을 보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잃을 것이 없으니 맞서 싸워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진지한 답변을 해주었다.
어쨌든 죽은 척하면 살려줄지도 모르는 브라운 베어들이었고 울타리 밖에서 보니 마냥 귀여웠다.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고.
이렇게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하고.
동물원이 아니니 동물들의 종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한때 야생에서 살던 야생동물이라고 생각하니 딱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늑대들이 사람을 쳐다보는 것은 무리에서 가장 약해 보이는 이를 사냥감으로 찍기 위함이라고 해 우리는 모두 슬금슬금 피해 다니기도 했다.
이 아이도 딱한 아이. 호저(porcupine)인데 다리가 3개뿐이다. 덫에 걸려 그리 된 것이었던 것 같다. 다시 야생으로 내보낼 수 없어 평생 이곳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물론 좋은 환경이지만 외로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동물들도 보고 각 동물들의 사연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우리 가이드는 여행사에서 일하기 전에 이곳 센터에서 2년 일한 경력이 있어 더 자세하게 알려줘서 좋았다.
이곳에서 보는 풍경도 상당히 멋졌다. 알래스카에 도착한 것이 실감이 났다. 설산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인데 눈만 뜨면 설산이 있어 행복했다.
점심에 먹은 클램 차우더가 든든했는지 저녁에는 크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간단한 간식을 사들고 숙소에 들어가 먹고, 일몰을 보기 위해 쿡 선장의 동상이 있는 레솔루션 파크(Resolution park)로 갔다. 곳도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추천해준 곳이다. 멀리서 해가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는 모습은 언제 봐도 멋지다.
전날 오랫동안 돌아다녀서인지 아니면 추워서였는지 다음날 아침에는 몸이 별로 좋지 않았다. 감기 기운이 있는듯했다. 이럴 때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주어야 한다. 알래스카에 왔으니 알래스카 연어를 먹어야지.
뜨끈한 것이 먹고 싶어 비프 수프도 같이 주문했는데, 기대 없이 한 숟갈 떴다가 감탄했다. 결국 싹싹 비워서 다 먹고, 아플 땐 단 걸 먹어야 한다며 후식으로는 찐뜩하고 굉장히 단 피넛버터 파이까지 싹 비웠다. 참 신기하게도 오후부터는 좀 나아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개관을 하지 않은 네이티브 헤리티지 센터 대신, 시내에 있는 앵커리지 박물관에라도 가보기로 했다. 이곳도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추천을 해준 곳이었다.
박물관 대기에는 앵커리지 학생들이 그린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국 이름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의외로 알래스카에는 한인이 생각보다 꽤 많이 살고 한식당도 몇 개 있다. 앵커리지에는 너무 외곽에 있아서 가보지는 못했다.
박물관은 전체적으로 알래스카 원주민들인 이누이트의 문화, 러시아령에서 미국령이 된 알래스카의 역사와 그 속에서 알래스카의 정체성 등에 대하여 전시하고 있었다.
알래스카와 시베리아가 얼마나 가까운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진도 전시가 되어있었고,
시베리안 허스키와 알래스칸 말라뮤트를 비교해놓은 재미난 그림도 있었다.
박물관에서 배우게 된 것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 이누이트족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겼다. 미국이지만 미국 본토보다 러시아에서 더 가까운 알래스카. 기후도 환경도 본토와는 현저하게 달라 자신들만의 문화를 아직도 지켜나가고 있는 이누이트들. 그리고 이누이트 안에도 얼마나 다양한 부족들이 있던지. 알래스카 주 최북단까지 올라가면 그들의 문화를 체험해볼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은데, 역시나 겨울에는 여행하기 어려운 곳이라 가는 것 역시 어려워 아쉬웠다. 언젠가 여름에 다시 가보고 싶다. 그때는 데날리 산 등산도 해볼 수 있을 테고 더 많은 국립공원에도 가볼 수 있을 테니.
그토록 오래전부터 가고 싶던 알래스카에 도착하자마자 설산 풍경도 보고, 동물들도 보고, 알래스카 연어도 먹고, 박물관에서 알래스카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배웠다. 앵커리지 도시 자체는 작고 조용했지만 어디서든 쉽게 설산이 보인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내가 드디어 이곳에 왔다는 기쁨과, 기대했던 만큼 멋져서 느낀 안도감이 나를 설레게 해주었다.
# 사소한 메모 #
* 나는 정말 눈이 좋은가 보다. 사진 속 내 표정들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 눈이 너무 많이 여 있어 세일 중인 부츠를 하나 샀다. 한국까지 가져가진 못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