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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권태기, 시행착오

Day 48 - 캐나다 퀘벡시티 (Quebec City)

by 바다의별

2017.03.21


퀘벡시티 둘째 날 오후, 빨래를 하러 빨래방에 갔다. 세탁기에 빨래를 돌려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친구가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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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시티에서 나고 자랐다는 그 친구는 지난해 일을 그만두고 7개월간 장기여행을 했었다고 한다. 이번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 중에 그때까지만 해도 가장 오랜 시간 여행한 사람이었다. 나와 사연도 비슷하고 기간도 비슷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 다 다녀온 곳들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을 하며 웃었고, 내가 아직 가지 않았던 곳들에 대해서는 그 친구가 몇 가지 팁을 주기도 했다. 우리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대화 속에서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나는 한 마디가 있다.


각자 여행하는 이유가 다르니까, 가는 곳도 다르고 속도도 다르겠지.


나는 찍고 찍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긴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나라의 특성에 따라 혹은 시간적 제약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때가 있다. 이번에 남미에서도 자유여행이 자신 없어 대부분의 일정을 세미 패키지 투어로 다니다 보니 굉장히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그런데 그게 습관이 된 것인지, 그 이후에도 나는 계속 '열심히' 다녔다. 무리해서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여행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매일매일 밖으로 향했고 나는 피곤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감동적이고 모든 순간이 소중했는데, 어느새 웬만해서는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이 도시에 왜 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출발 전에는 분명 각 도시마다 보고 싶었던 것들, 하고 싶었던 것들이 있어 여행지를 열심히 고르고 골랐던 것인데, 어느 순간 그런 설렘들은 다 흐릿해지고 그저 체크리스트에서 하나둘 지워내는 느낌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다 봐야지, 그래도 여행 온 건데 아깝잖아.'라는 생각들로 나는 스스로에게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이건 마라톤이다.


나는 오랫동안 꿈꿔온 여행을 실현시킨다는 사실에 들뜬 나머지, 장기여행을 위한 마음가짐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떠난 것이다. 짧은 휴가는 100미터 달리기처럼 바쁘게, 빠르게 여행해도 된다. 하지만 이건 마라톤이다. 여행이 길다고 해서 무조건 모든 곳에 다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걸 47일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다음날, 퀘벡시티를 떠나기 전날, 나는 오랜만에 일요일을 즐기듯이 푹 쉬었다. 맛있는 음식들, 달콤한 디저트를 사들고 와서 침대에서 하루를 보냈다. 여행 출발 후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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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적은 일기:


여행이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 있다. 권태기인가 보다. 어느 순간부터 구경하는 것이 신나지가 않고 숙제하는 기분이다. 숙제가 있어 밖으로 나갔다가 저녁에 숙소로 돌아오면 더 많은 숙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 여행을 정리하는 동시에 이후 일정을 계획하고 예약해야 한다. 여행과 일상이 구분되지 않은 채 몇십 일이 반복되자 아무리 길게 자도 피로가 풀리지를 않는다.

지금 나에게는 주말이 없다. 평소 나는 일요일만 되면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방안에서 영화나 한 두 편 보며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그랬던 내가 47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 밖으로 나가 저녁에 들어왔다. 매일 평균 2만 걸음을 넘게 걷고 있고 숙소를 옮기는 날엔 17kg짜리 배낭까지 내 어깨를 짓누른다.

회사 다니는 게 더 편하다고 느낄 때도 있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행하면 마냥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행도 일상이 되니 더 이상 여행이 아니었다. 계속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 그리고 밤에는 각종 예약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 앞으로는 이틀에 한 번씩만 일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최소 2주에 하루 정도는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어보기로 했다.

오늘은 여행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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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소한 메모 #

* 올해 내가 하는 일이 여행이라면, 여행으로부터의 휴식도 필요하다.
* 일상이 된 여행은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여행과는 완전히 다르다. 때로는 여행과 일상이 구분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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