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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기차에서 만난 사람들

Day 52 ,56 - 미국 알래스카(Alaska, 앵커리지↔페어뱅크스)

by 바다의별

2017.03.25, 29

주차장에서 나뭇잎 뜯어먹는 무스. 뒷건물이 내가 묵은 숙소이다.

앵커리지가 심심하다고 생각한 찰나, 페어뱅크스로 이동하는 날 아침, 숙소 주차장에 무스가 나타났다. 사실 숙소 현관에 무스 출몰 지역이니 조심하라는 경고문이 붙어있기도 했고, 알래스카의 치안에 대해 찾아보았을 때 알래스카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을 조심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서 설마 하면서도 혹시나 하기는 했다. 그런데 이렇게 숙소 문 앞에 서 있을 줄은 몰랐다. 발로 차일까 봐 조심조심 빙 둘러서 나갔다.

기차역으로 가는 길. 이곳 하늘은 항상 예뻤다.

알래스카 철도는 미국에서 꼭 타야 할 철도 노선들 중 늘 상위권에 든다. 그만큼 풍경이 멋지다. 나는 겨울에 운행하는 유일한 노선인 앵커리지-페어뱅크스 노선을 탔다. 약 12시간이 걸리는 만큼 가격도 만만치 않다. 그렇게까지 먼 건 아니지만 바깥 풍경을 보면서 가야 하기 때문에 빨리 달리지 않는다.

풍경은 멋지지만 사실은 편도만 탔어도 되는데, 혹시나 갈 때 날씨가 좋지 않을까 봐 왕복을 끊었다. 처음 탈 때는 날씨가 좋았고 두 번째 돌아올 때는 날씨가 좋지 않아 결과적으로도 왕복을 끊을 필요는 없었는데, 그래도 나는 아깝지 않았다. 나는 페어뱅크스로 향하는 길에는 멋진 풍경들을 보았고 앵커리지로 돌아오는 길에는 멋진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앵커리지에서 페어뱅크스로 가는 길. 설국열차를 탄 것 같았다. 모두 동등한 2등석이고(겨울 열차에는 1등석이 없다)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겨울이고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다 보니 날씨가 안 좋을 가능성이 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도착한 날부터 계속 날씨가 전반적으로 좋아서 다행이었다. 구름이 거의 없어서 풍경이 더 돋보였고 경치도 탁 트이게 멀리까지 보였다.

날씨가 흐리면 보이지 않는다는데 이날은 데날리 산이 굉장히 잘 보였다. 잠깐도 아니고 오랜 시간 계속 창밖만 내다보면 보였다. 여름이면 데날리 국립공원에도 가볼 텐데 아쉬웠다. 볼수록 멋있는 산이었다.

단순히 이동만을 위한 열차가 아니라 관광용 열차라서 가는 내내 방송이 계속 나온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무려 12시간 동안 이어폰을 한 번도 꽂지 않았다. 풍경이 좋을 때 미리 어느 쪽 창문을 보라고 알려주고, 동물이 나오면 알려주고, 중간중간 알래스카에 대한 재밌는 얘기들도 해줬다. 심지어 사람들이 동물을 못 봤다고 하면 후진까지 해주는 친절한 기차다.

Nenana Ice Classic
Nenana Ice Classic

삼각대 같이 생긴 것은 얼어붙은 타나나(Tanana) 강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인데, 네나나(Nenana) 지역에서 하는 Nenana Ice Classic이라는 재미있는 복권을 위함이다. 무려 100년도 넘은 전통으로 매년 겨울에 파는 복권인데, 봄에 눈이 녹아 저 삼각대가 물에 빠지는 날짜와 시간을 예상하는 것이다. 삼각대에는 시계가 연걀되어있어 삼각대가 쑥 빠지는 순간 시계가 멈춰 정확한 순간을 맞출 수 있다. 나는 나중에 만난 한 가이드가 날짜를 말하면 사주겠다고 해서 4월 말경으로 예상하였는데, 추후 확인해보니 5월 1일 낮 12시에 빠졌다고 한다.


이것은 나중에 페어뱅크스에서 앵커리지로 돌아갈 때 탄 기차.

이날은 낮까지 계속 날씨가 흐렸다. 바깥 풍경이 앵커리지에서 페어뱅크스로 갈 때보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중간중간 잠깐씩 날씨가 개서 멋진 설산들을 볼 수 있었다.

식당칸은 늘 붐비기 때문에 좌석 번호순으로 입장이 가능하다. 직원이 식사할 사람들 주문을 미리 받고, 방송에서 좌석 번호를 불러주면 그때 가서 먹을 수 있다. 맛은 그저 그렇지만 12시간 동안 싸온 음식만으로 때우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식사를 할 수밖에 없다.

식당 테이블 좌석은 4인 정원이라서 랜덤으로 다른 사람들과 합석해서 식사를 하게 된다. 이날 합석하게 된 사람들은 워싱턴주에서 온 노부부였는데,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두 분 다 너무나 멋진 사람들이었다. 두 분은 친자녀는 없는데 전 세계에 자녀가 40명이나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작업치료사였는데 노르웨이에서 꽤 오래 일하셨다고 한다. 그때 그곳에서 학생들도 가르치셨다는데, 그 학생들이 그 후 미국에서 인턴십을 하고 싶다고 해서 작업치료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미국에 오면 집에 머물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두 분의 홈스테이 호스트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1년씩 함께 생활하니 정말 가족 같아져서, 결혼식에 참석하러 모로코에도 가고 손자 손녀들을 보러 일본에도 가셨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젊으셨을 때 일본 군에서 일한 적이 있어 일본어도 조금 하실 줄 안다고 했다. 나에게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손자들은 일본에 있다고 하니, 옆에서 할머니가 그런 거 정하고 그러는 거 아니라고 핀잔을 주셨다.


두 분은 여행을 좋아하셔서 세계일주 항공권을 끊어 여행하신 적도 있고, 지금은 퇴직 후 함께 노인대학에 다니고 있는데 수업 주제가 오로라라서 학교에서 다 같이 여행을 온 것이라고 했다. 두 분은 일정을 조금 더 늘려서 알래스카 여행을 더 즐기고 있는 중이라고 하셨다.

식사 중, 옆 테이블에 또 다른 노부부가 손자를 데리고 와서 앉았다. 나와 함께 얘기 중이던 할아버지께서 먼저 그쪽 할아버지한테 인사를 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그 노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점심에 네 분이서 테이블에 같이 앉아 점심식사를 함께 하셨다고 했다.


그 노부부는 자식들이 여럿이고 이제는 손자 손녀도 여럿이 있다고 했다. 그분들은 자식들, 손자 손녀들과 약속을 한 게 있는데, 손자 손녀가 7살이 되면 셋이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한 약속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떤 손자와는 그랜드캐년에 다녀오고, 어떤 손녀와는 디즈니월드에 다녀왔다고. 이번에 함께 여행 온 손자는 오로라가 보고 싶다고 해서 알래스카로 여행지를 정한 거라고 하셨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삶을 살아온 두 노부부의 이야기가 재미있기도 했고, 나도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나도 그 두 부부처럼 여행을 좋아하는 반려자를 만나 평생 세계 곳곳으로 여행을 다니며 살고 싶다. 하지만 내가 하상상 속에 아이는 다. 현실적으로 여성이 일을 하면서 아이를 낳고 기르기가 쉽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나는 아이를 갖는 것은 더 이상 여자의 덕목이 아닌 선택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결혼도 안 했으니 진지하게 고민해볼 시간은 앞으로도 많이 있겠지만 사실 지금으로서는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은 거의 없다. 결혼은 하고 싶지만, 아이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최소 20년간의 장기 프로젝트를 할 자신이 없다. 그러기엔 나는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나 많고, 내 인생에 집중하기도 바쁘다. 그럼에도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그러다 첫 번째 노부부를 만나보니 둘만이 할 수 있는 수많은 단기 프로젝트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직접 아이를 낳지 않더라도 홈스테이 등으로 새로운 가족이 생길 수 있다는 가능성도. 살면서 느끼는 기쁨과 새로운 변화 등이 반드시 아이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잘 맞는 배우자를 만나면 둘이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또 두 번째 노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왁자지껄한 그분들의 가족을 상상해보니 그것 또한 좋아 보였다. 어쩌면 나는 당장 힘들어 보이는 짧은 미래만을 보고 먼 미래의 모습은 제대로 고민해보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없고, 어느 쪽처럼 살고 싶다는 결론도 지금으로서는 내릴 수 없을 것 같다. 아마 몇 년 더 살아보고 결혼할 때가 되면 내 생각도 점차 정리가 되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말은 행복할 거라고 믿고 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살든, 그 사람과 둘이서 살든 아이들을 가지게 되든, 이날 만난 두 노부부처럼 함께 여행 다니며 유쾌하게 살고 싶다.


# 사소한 메모 #

* 'The world is a book and those who do not travel read only one page.(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이라는 책을 한 페이지만 읽는 셈이다.)' - St. Augustine(성 아우구스티누스)
* 영화 'Up(업)'의 처음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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