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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황홀한 불빛의 밤하늘

Day 53 - 미국 알래스카 페어뱅크스(Fairbanks)

by 바다의별

2017.03.26


아이슬란드에서 난생처음 오로라를 보았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요쿨살롱에서 빙하 해변과 빙하호수를 보고, 밤에 레이캬비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전날부터 계속된 비에 오로라에 대한 희망은 거의 접어버린 채, 식당에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던 중, 가이드가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툭 한 마디 던졌다. 밖에 오로라 있다고.


오로라는 굉장히 선명한 초록색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날 본 건 푸른빛이 섞인 은은한 은색에 가까웠다. 사진으로 찍으면 초록색이 훨씬 더 짙게 나왔다. 하늘 위를 가로지른 한 줄기의 빛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넋을 놓고 보았다. 이날은 오로라 지수가 3(최고는 9, 하지만 지수가 전부는 아니다)밖에 안 되었는데도 기적적으로 비구름이 다 걷혀서인지 굉장히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2015년 10월, 아이슬란드

그리고 며칠 뒤, 오로라 지수가 8이라고 하여 오로라 투어를 한번 더 신청해서 보러 갔었다. 하지만 이날은 높은 지수에도 불구하고, 구름이 굉장히 많이 낀 흐린 날이어서 잘 보리지 않았다. 그래도 막판에 출발하려는 순간 약 3분 정도 커튼처럼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어 행운이었다.


2016년 10월 아이슬란드 첫 번째 오로라


2016년 10월 아이슬란드 두 번째 오로라


이처럼 오로라는 운이 상당히 많이 따라줘야 한다. 기본적으로 그날 오로라 활동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고, 주위가 어두워야 하며, 날이 맑아야 하고, 그 완벽한 시간과 장소에 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조건들이 갖추어졌다 할지라도 오로라가 1시간 넘게 있어줄지 10분가량만 머물렀다 사라질지는 모르는 일이다.

페어뱅크스

이미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두 번이나 본 나는 이번 알래스카 여행에서는 오로라를 꼭 보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오로라 투어를 신청하기는 했지만 (차를 렌트하지 않는 이상, 주위가 모두 캄캄한 곳으로 하야하기 때문에 투어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혹시 못 보게 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다. 평생 2번 본 것만도 굉장한 행운이라며.


그러나 알래스카에서 다시 오로라를 마주했을 때, 나는 이 풍경이 주는 엄청난 감동을 스스로 잊고 지냈음을 깨달았다. 아마 이 풍경은 '지겹도록'이라는 수식어가 절대 붙을 수 없을 것이다.

페어뱅크스

투어 가이드는 9시에 숙소로 픽업을 왔다. 이날 오로라 지수는 내가 아이슬란드에서 처음 봤을 때와 같이 3이었다. 이 투어의 장점은 숲 속 오두막 같은 곳으로 가서 밖에서 사진을 찍다 춥거나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실내로 들어올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가이드는 우리에게 11시는 되어야 완전히 어두워질 테니, 10시쯤 오두막에 도착하면 우선 커피 한잔씩 하고 간식을 먹으며 카메라 세팅을 하다가 11시쯤 다시 나가면 될 거라고 했다.


그 순간, 맨 앞에 앉아있던 한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저게 오로라는 아니겠지요? 아직 9시 반도 안 됐는데."


그 순간 차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분명 오로라였다. 아직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짙은 푸른빛의 하늘 위에 초록색 빛줄기, 초록빛이 도는 은색이 아닌 분명한 형광 초록색의 빛줄기가 회오리처럼 사르르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 보이는 오로라의 색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하늘이 아직 푸른빛을 띠니 오로라의 초록빛이 더욱 선명했다.

우리 차 안에는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로라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너무나 아름답다며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나도 처음 보았을 때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끊임없이 뭉클하게 올라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이 세 번째인데도 나는 여전히 그 기분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모두가 추운 것도 잊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냥 밖에 서서 하늘만 바라보았다. 환상적이라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사진보다는 화질이 떨어지지만, 동영상으로도 오로라가 춤을 추는 것이 잡힐 정도였다. 내가 이 정도로 예쁜 오로라를 보고 있다니, 보면서도 믿어지지도 않았다.

이런 엄청난 자연 풍경을 보고 있으면, 항상 비슷한 걸 느끼고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가장 먼저 자연이 위대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면서 이 지구와 우주에 비하면 내가 얼마나 먼지 티끌만 한 존재인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그다음으로는 모든 걸 잊게 된다. 고민도, 근심도, 그리고 실없이 웃었던 일들까지도. 모든 것들이 너무나 사소하게 느껴지고 의미가 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걸 비우고 나면 마지막 단계에 이르게 된다. 결심을 하기 시작하는 단계. 사소한 것들은 과거에 버리고, 미래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게 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결심을 한다. 물론 모든 결심들이 오래가는 것은 아니지만, 자극이 되어주는 자연풍경은 세상에 넘쳐나니 참으로 다행이다.

이날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말없이 오로라를 바라보았다. 설레서 추운 줄도 모르고 계속 밖에 서 있었다. 오로라 자체도 너무나 멋졌지만 나무와 오두막들이 있는 주위 풍경 또한 예뻐서 넋을 놓게 되었다. 9시 반에 차에 타고 있었을 때에는 오로라가 금방 사라질까 마음이 조급했는데, 밤 11시가 넘어서도 오로라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로라의 색은 초록색뿐 아니라 분홍색, 보라색 등 더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마법에 홀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1시간가량 사진을 찍은 뒤 오두막에서 잠시 쉬다, 그다음 1시간 동안은 카메라 없이 가만히 서서 하늘을 바라보기만 했다. 별똥별도 몇 번 보았지만 늘 그렇듯 소원을 빌 새는 없었다.

12시가 넘자 오로라가 조금 주춤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음날 아침에도 투어가 예약되어있는 것이 있었으므로 새벽 1시 반쯤 숙소에 돌아갔다. 다음날 듣게 된 것인데, 새벽 2시 반쯤 갑자기 또다시 강해지더니, 새벽 4시까지도 조금씩 이어졌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잠이 든 사람이 새벽 4시에 잤기 때문에 오로라가 대체 몇 시까지 계속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마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되지 않았을까. 투어 가이드들도 놀랄 만큼 긴 시간 동안 힘차게 춤을 춰준 오로라였다. 다시 이런 오로라를 또 볼 수 있을까?


* 보너스 영상

- 오두막에 살고 있는 알래스카 말라뮤트, 오로라. 이름이 오로라, 애칭은 로리. 이 당시 11주였는데 굉장히 컸다. 물론 그렇다 해도 아기는 영락없는 아기였다. 밖에 있다 들어왔더니 카메라 렌즈에 김이 서려 있었는지 화면이 흐릿해서 아쉽다.


# 사소한 메모 #

* 내 인생 최고의 풍경, 내 인생 최고의 오로라.
* 혼자 여행하는 것이 좋을 때도 많지만, 가끔 이런 말도 안 되는 풍경을 볼 때면 이 순간을 나눌 가까운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프다.
* ♬ Westlife - It'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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