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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10시간을 달렸다

Day 55 - 미국 알래스카 페어뱅크스(Fairbanks)

by 바다의별

2017.03.28


오전 10시 픽업, 저녁 9시경 귀가. 하지만 차에서 내린 시간은 다 합쳐서 고작 1시간 남짓에 불과했다. 이 글은 매우 짧을 것 같다.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Arctic Circle(북극권)로 가는 투어를 신청하게 된 것은 두 개의 소소한 이유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북극권 한계선을 넘어 내 이름이 적힌 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눈 밖에 없는 진짜 알래스카를 느껴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9시간을 차 안에서 보내는 것에 대한 보상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차를 타고 더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도로 위에는 눈발이 빠른 속도로 거세게 날리고 있었고, 눈 때문에 도로의 경계선도 모호해졌다. 가장자리의 도로가 위험할 때도 있기 때문에 가이드는 적절히 가운데와 가장자리를 오가며 운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큰 트럭들이 우리를 마주 보고 달려올 때면 아찔하기도 했다.

눈발도 날리고 하늘도 흐리고 땅은 하얀 눈으로 덮여 아무 색깔도 느낄 수 없었고, 어느 순간 네트워크도 되지 않아 다른 세상과도 단절되었다. 이곳에는 전기 없이 사는 문명 밖의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했다. 정말이지 무(無)의 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도착한 북극권은 달랑 이 표지판 하나가 전부였다. 무언가 특별한 걸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막상 이렇게 표지판 하나만을 보고 나니 달려온 시간이 허무해졌다. 사실 이 표지판은 한계선 아래쪽에 세워진 거라면서 우리 가이드는 조금 더 위까지 우리를 데리고 차로 올라갔다 다시 왔다.

다시 돌아내려 오는 길, 구름 뒤에 해가 살짝 보이는 듯했지만 역시나 다시 숨어버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모피와 동물 사냥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이드는 미국의 다른 주들에서 알래스카 주의 사냥을 비난한다고 했다. 그런데 늑대 한 마리 안 사는 따뜻한 곳에 살면서 무작정 모피 반대, 사냥 반대를 외치면 안 된다고 했다. 알래스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유일하게 얼지 않는 늑대 털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했고, 정기적으로 사람들이 무스나 곰들에 의해 공격을 당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모피가 필요 없는데 과시용으로 모피를 사용하는 것과 당장의 생존과 직결되어 필요에 의해 사용하는 것은 다를 것이다. 또한 당장 그 동물이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과 먼 나라 이야기인 상황 역시 다를 것이다. 빚을 내서 100만 원짜리 가방을 사는 것은 사치일 수 있지만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100만 원짜리 가방을 사는 것은 그렇게 볼 수 없는 것처럼. 모두의 입장이 다른 거니까.

엄청나게 큰 땅이지만 페어뱅크스가 상당히 남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감안했을 때, 이 주는 무(無)의 땅이 굉장히 많을 것이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무작정 비판을 하기 전에,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지, 한 번쯤 생각해보고 이해해보는 시도도 중요한 것 같다.

페어뱅크스로 돌아가기 전, 꽁꽁 얼어붙은 유콘 강에도 들렀다.

이렇게나 큰 강이 꽁꽁 얼어붙어 사람들이 그 위를 걷고 뛰어다녀도 위험하지 않다니, 신기했다. 아마 이 강도 5월이 지나서야 녹아내렸겠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잔 것 같다. '하는 것 없이 피곤하다'라는 말이 가장 적절하게 어울린 하루였다.


# 사소한 메모 #

* 그 어떤 것도 왕복 10시간의 값어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런 여행은 하지 말아야겠다.
*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나의 경험과 지식만으로 타인을 평가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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