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98 - 남아공 크루거 국립공원(Kruger)
2017.05.10
드디어 트럭킹 투어 또는 오버랜드 투어 또는 캠핑 투어, 어쨌든 그것이 시작되었다. 가장 힘들 거라고만 생각했던, 하지만 가장 소중하게 기억에 남게 된 32일간의 여행 시작!
트럭은 이렇게 생겼다. 내부는 버스처럼 좌석이 있고, 에어컨이나 난방은 없다. 남아프리카는 늦가을이자 초겨울이라 밤에는 꽤 추웠는데 낮에 트럭을 탈 때는 여전히 더웠다. 그래도 커튼이 있으니 햇빛을 막을 수는 있었다.
우리는 투어 인원 17명에 스태프 3명, 즉 가이드 1명, 운전사 1명, 요리사 1명이 있어 총 20명이었다. 아래에는 우리 리스트가 있다. 글씨가 작아 잘 보이지는 않겠지만, 대부분 여러 국적들이 모이던데 우리 그룹은 좀 특이했다. 영어권 원어민들이 대부분이었다.
호주 6명, 캐나다 2명, 네덜란드 3명, 스페인 5명, 그리고 한국인 1명. 스페인 친구들은 5명이서 친구라 자기들끼리 모여 다녔고, 나는 주로 호주랑 캐나다 친구들과 주로 함께 다녔다. 빅토리아 폭포에서 사람들이 교체가 되었을 때도 결국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영국인이어서 이때는 70% 이상이 원어민이었다.
아무리 내가 영어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해도 원어민들과 하루 24시간 함께 붙어있기란 처음에는 꽤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대화에 끼려고 하면 순식간에 주제가 다른 걸로 넘어가는 빠른 속도를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일주일쯤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자유롭게 대화에 참여할 수가 있었다. 영어 회화를 위해 어학연수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이런 단체 캠핑 투어에 들어와 부딪혀보기를 추천한다.
스탭이 3명뿐인 캠핑이니 우리는 매일 번갈아가며 각자 맡은 일들을 해야 했다. 이러한 당번활동 스케줄표는 가이드에 따라 다른 것 같다. 가이드에 따라 활동을 분류하는 가짓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첫 번째에는 3가지 활동으로, 요리 보조(요리사를 도와 채소 썰기, 과일 씻기 등등), 설거지(조리도구 설거지. 각자 먹은 접시는 각자 설거지!), 트럭 관리(캠핑장에 도착하면 창문 닫은 거 확인, 바닥 쓸기, 쓰레기통 비우기 등) 이렇게 나누어져 있었다. 여기다가 텐트를 치고 걷는 것, 사용한 식기를 설거지하는 것 등등은 각자의 몫이다.
나는 1번 그룹으로 자넬(호주), 패트릭(호주), 베아(스페인)와 함께 했다. 자넬은 크리스와 함께 신혼여행을 왔는데, 이 둘과는 나이로비까지 함께 가면서 굉장히 친해져서 나는 호주 여행을 하러 갔을 때 이 친구들의 집에서 머물기도 했다. 둘은 늘 티격태격하지만 결국 크리스가 자넬의 기분을 잘 풀어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거의 10년을 함께 했는데도 알콩달콩 달달해 보이는 커플이다.
또한 최고 연장자는 70대 부부인 캐롤과 마이크와도 가까이 지냈는데(어쩌다 보니 빅토리아 폭포까지는 내가 최연소자) 두 분은 퇴직 후 바로 집과 차를 팔고, 카라반을 구입해 약 13년간 집시처럼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자녀들 집에 머물기도 하다가, 이렇게 길게 해외여행을 오기도 하신다고. 나이 때문에 캠핑이 많이 힘들기도 하실 텐데, 당번활동도 절대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그분들을 보며 나도 나중에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마지막 표는 우리의 일정표. 첫 번째 투어 가이드였던 윌은 굉장히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트럭에 자신이 읽던 책을 두고 아무나 쉽게 꺼내 읽을 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특히 동물사전 같은 것을 보면 자기가 언제 어디서 그 동물을 처음 보았는지를 기록해둘 정도였다.
그가 이렇게 트럭에 붙여준 일정표로 우리는 매일 얼마나 이동을 하게 될지, 그리고 다음 캠핑장에서 와이파이가 될지, 옵션으로 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있는지 예측할 수 있게 해주었다. 와이파이가 되어봤자 리셉션이나 바에서 될 뿐이고 그마저도 유로인 곳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부모님께 연락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미리 알려드리는 건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우리의 첫날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첫 목적지인 크루거 국립공원(Kruger National Park)으로 향했다. 오후 2시쯤 도착했을 때, 나는 식사 보조로서 점심 준비를 도왔다. 우리 조가 요리사를 도와 이것저것 씻고 자르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텐트를 쳤다. 인원이 홀수라 혼자 참여한 나는 텐트도 혼자 쓰게 되었는데, 내 텐트는 다른 사람들이 대신 쳐주었다. 혼자 치는 것이 힘들다 보니 이후에도 나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점심으로는 간단히 샌드위치를 먹고, 저녁 게임 드라이브를 나갔다. 차 두대로 나누어 갔는데, 사파리 가이드끼리는 서로 무선을 통해 어느 지역에 어떤 동물이 있는지 정보를 수시로 공유한다. 특히나 빅 5 (Big 5 동물: 사자, 표범, 코뿔소, 코끼리, 버펄로(물소)) 중 하나일 경우 현재 보던 동물이 있다 할지라도 내버려두고 서둘러 달려간다.
참고로 못생긴 동물들을 모은 어글리 5(잔인해...)도 있는데, 여기에는 윌더비스트, 하이에나, 흑멧돼지(Warthog, '라이언 킹'의 품바), 아프리카 독수리(Vulture, 하늘을 빙글빙글 날다가 동물 시체를 먹는 새), 대머리황새(Marabou stork)가 포함된다. 그런데 사실 흑멧돼지는 품바의 이미지 때문인지 귀엽고, 대머리황새도 노인처럼 생겼다고 하지만 귀여운 면이 있다. 독수리는 무섭고.
어글리 5 중 하이에나는 쉽게 보기 어렵고, 빅 5 동물들 중에서도 코끼리와 버팔로를 상대적으로 보기 쉬울 뿐, 나머지는 보기 어렵다. 사자나 코뿔소도 마주치기 힘들고, 특히 표범의 경우 낮에는 움직임이 거의 없어 더더욱 보기 힘들다.
그런데.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사파리 가이드가 말이 없이 힘차게 달리더니, 우리에게 사자를 보여주었다. 대놓고 길가에 얼굴을 내밀고 앉아 있었다. 무전을 듣자마자 놓칠세라 열심히 달려온 것이다.
풀숲 뒤에는 수사자 한 마리가 더 앉아있었다. 이 지역을 군림하는 사자가 한 마리 있는데, 그 사자와 사이가 좋지 않은지, 이 두 사자가 그 사자를 몰아내고 무리를 이끌려고 노리고 있다고 했다. 그야말로 '라이언킹'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라이언킹'에서 왕 자리를 노리던 '스카'가 떠오르기도 했다.
사자는 굉장히 늠름하고 잘생겼다. 그런데 눈빛이 저녁식사를 고르는 듯하기도 해서 살짝 무섭기도 했다.
캐나다인 에리카의 친구가 정확히 1달 전 요하네스버그에서 빅토리아 폭포까지 우리와 똑같은 투어로 여행했었다는데, 그 팀은 사자를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하니 운도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정말 행운이었다. 첫 드라이브에서 출발하자마자 사자가 기다렸다는 듯 앉아 있다니.
사자를 실컷 본 뒤, 거대한 국립공원 크루거를 달리면서 임팔라(Impala, 영양 종류)들도 꽤 많이 지나쳤다. 이때까지만 해도 임팔라를 볼 때마다 예쁘고 신기했는데, 곧 우리는 임팔라라는 말만 들어도 시큰둥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영양 종류 동물들이 가장 많이 있기 때문에, 큰 규모의 무리가 모여 있는 것을 보는 게 아니면 감흥이 오지 않았다.
해가 점점 지고 있었다. 사자 이후로는 동물을 별로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사자가 워낙 강력해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이미 기분이 좋았다. 어차피 다음날 하루 종일 크루거 국립공원을 다시 한번 훑게 될 테니 더 아쉬울 것이 없었다.
해가 지는 것을 보며 술을 한잔씩 했다. 아마룰라(Amarula) 술인데, 나중에 탄자니아에서 이를 핫초코와 섞어 아마룰라 핫초코로 만들어 파는 것에 우리는 모두 반해버렸다. 베일리스와 비슷한 맛의 술로, 마룰라 열매로 만든 것이다. 흔히 마룰라 열매는 코끼리들이 먹고 취하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가이드 말로는 코끼리가 취하려면 열매 2톤은 먹어야 한다며 과장된 것이라고 했다. 정말로 동물이 취하는 것을 보고 알게 된 게 사실이라면 코끼리가 아니라 원숭이 정도일 것이라고 했다.
달이 슬슬 뜨면서 나뭇가지에 걸렸다. 예쁘게 떠오르고 있었다. 이 이후에는 특별한 동물을 보진 못했다. 어두워져 가이드가 이곳저곳 불빛을 비추어보았지만, 임팔라 몇 마리와 토끼 몇 마리 보았다.
약 3시간 정도의 투어를 마치고 캠핑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버펄로를 마주쳤다. 국립공원 입구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빅 5 중 두 가지를 첫날 본 것이다.
캠핑장에 돌아와 우리 요리사가 준비해둔 저녁식사를 먹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쉬운 건 식사를 한 번도 사진으로 남긴 적이 없다는 것인데, 플라스틱 또는 스테인리스 접시에 스테이크나 닭 요리(돼지고기도 종종 있었지만 자주는 아니었다), 빵 또는 밥, 샐러드, 그리고 감자를 비롯한 구운 채소 정도가 일반적인 한 끼였다. 요리사들은 모두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이라 음식이 굉장히 맛있었다. 캠핑이니까 식사가 별로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캠핑 투어 후에 오히려 살이 찐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캠핑 첫 날을 무사히 마치고, 텐트로 돌아왔다. 혼자 텐트를 쓰니 치고 걷을 때 도움을 받아야 해서 미안하고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잘 때는 편했던 것 같다. 정신없이 지나간 첫날. 갑자기 24시간 영어를 써야 하는 스트레스, 그래도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는 즐거움, 그리고 사자를 보았다는 흥분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 사소한 메모 #
* 본격적인 캠핑 첫날. 나는 무사히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 오늘 본 것: 빅 5 중 사자, 버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