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53 - 프랑스 에트르타(Etretat)
2017.07.04
드디어 오랜 소원을 성취했다. 프랑스에 가기 한참 전부터 그토록 가고 싶던 에트르타를, 교환학생 중에도 가지 못하다가 이번에 드디어 간 것이다. 그때는 정보도 부족했거니와,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가보지 않았거나 차를 운전해서 가야 한다는 대답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아마 내가 파리가 아닌 지방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했기 때문에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가보니 파리에서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었다.
지금이야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구글이나 각종 블로그들을 검색하면 세세한 정보까지 알 수 있고, 구글맵이나 여타 지도 및 교통정보 어플을 활용하면 누구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8년 전만 해도 여행 정보를 구할 수 있는 경로가 많지 않았다. 구글을 비롯해 외국 사이트들을 검색해도 정보가 부족했고, 국내 사이트 중 유일하게 유용했던 네이버 대표 유럽여행카페 '유랑' 역시 지금은 새롭고 독특한 여행지에 도전한 후기들이 많지만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가는 대도시들에 대한 중복된 정보만 가득할 뿐이었다.
구글맵 같은 것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스마트폰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빳빳한 종이 지도를 들고 다녔다. 내가 유럽에서 생활할 때 썼던 휴대폰에는 사진 촬영 기능도 없었지만, 사진 촬영 가능한 휴대폰을 사용할 때에는 관광객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지도의 필요한 부분만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한 뒤 메시지를 확인하는 척 휴대폰으로 지도를 보기도 했다. 화질이 썩 좋지 않아 결국 종이 지도를 꺼내야 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너무나 여행하기 편해졌다. '우리 때는 그랬어.'라며 무용담을 늘어놓는 어른이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우리 때는' 그랬다. 아날로그식 여행. 숙소를 예약하면 반드시 그 위치를 프린트해서 들고 가야 했고, 빳빳한 지도 위에 갈 곳을 표시해야 했고, 버스를 타야 하거나 길을 헤매면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과 연락을 할 때에는 비싼 문자를 보내거나 노트북을 켜서 스카이프로 영상통화를 해야 했다.
파리 생 라자르 역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르 아브르(Le Havre) 역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1시간. 에트르타 시청 앞에 내려 구글맵을 켜고 해변으로 걸어갔다. 클로드 모네가 사랑한, 바로 그 에트르타에 왔다.
에트르타에는 3개의 코끼리 절벽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위 사진 속 절벽인데,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며 에트르타를 대표하는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아발 절벽(Falaise d'Aval)이다. 모네의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저 유명한 절벽은 이곳에서 두 번째로 커서 엄마 코끼리라고 불린다.
나는 아발 절벽을 제대로 보기 위해 먼저 우측의 새끼 코끼리 절벽 쪽인 아몽 절벽(Falaise d'Amont)으로 향했다.
노르망디 지역 특성상 바람이 많이 불었지만, 걸어 올라가니 몸에서 열이 나 따뜻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오후가 되면서 더워졌다.
절벽 위에는 꼭 영국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돌로 이루어진 예배당이 하나 있었다. 분명 해변은 한산했는데 이곳은 꽤나 붐볐다. 바로 뒤에 주차장이 있어서인 것 같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도 마주쳤는데, 아마 일일투어로 에트르타&옹플뢰르&몽생미셸까지 가는 사람들인 듯했다.
투어를 이용하면 편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내가 오래 머물고 싶은 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다. 나는 이미 오래전 옹플뢰르와 몽생미셸에 다녀왔고 하루 종일 에트르타에만 머물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혼자 기차를 이용하였다. 그럼에도 하룻밤을 묵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당시에는 그저 숙소를 옮긴다는 것에도 너무나 지쳐있었던 것 같다.
이 풍경을 최대한 만끽하고 싶어서 나는 발길 닿는 대로 계속 걸어가 보았다. 어느새 엄마 코끼리도, 예배당도 저만치에 있었다. 교환학생 첫 학기에 나는 노르망디 지방보다 더 북쪽에 살고 있었다. 해협 하나를 건너면 영국에 갈 수 있던 그곳은 날씨가 변화무쌍했다. 5월에도 점퍼가 필수였던 그곳은 아침에 맑다가도 낮에 우박이 내리곤 했다. 그런 날씨를 상상해서였는지, 이곳의 맑은 날씨가 나를 배로 기쁘게 해주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지점까지 오니 파도소리와 바람소리, 새소리만이 들렸다. 사진을 찍고 있던 중, 어떤 영국인이 말을 걸어왔다. 5년을 여행 중이라는 그 남자는 그동안 집에는 서너 번 정도 들렀다고 했다. 내가 5년을 여행해도 여전히 새로이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한국에는 가보지 못했다고 답했다. 세상에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천천히 해변으로 다시 걸어내려왔다. 이제 엄마 코끼리 위에 올라 아빠 코끼리를 보러 갈 차례였다.
해변가에는 아까보다 사람이 많아졌다. 아직은 물이 차가운지 물속에서 노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해변가에 세워진 식당들에서 커피 한 잔을 하고 있었다. 자연 풍경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세워진 건축물들은 아기자기해서 동화 속 마을 같았다.
엄마 코끼리에는 동굴이 있었는데, 그쪽으로도 사람들이 꽤 걸어가고 있었다. 나도 걸어 들어가 볼까 하던 찰나, 옆에 있는 경고문을 발견했다. '낙석주의' 경고 위에는 '절벽 위로든 아래로든 걷는 것은 모두 위험하며 사고 발생 시 에트르타 시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라고 다시 한번 강조해놨다. 위로 올라가는 것은 계단까지 설치해놓고 무슨 심보인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동굴은 나중에 시간이 나면 가기로 했다.
아발 절벽은 아몽 절벽보다 산책로가 길고 더 높았다. 아기 코끼리가 저만치 멀어졌지만, 여전히 아빠 코끼리는 보이지 않았다. 배도 고프고 힘들었지만, 회색빛의 멋진 절벽과 바위들을 보면서 힘을 냈다.
위에 올라오니 선선한 바람이 불어 시원했다. 아빠 코끼리는 듣던 대로 멋졌고, 이곳에 핀 노란 꽃들과 함께 보고 있으니 더 예뻤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힘들다며 툴툴거리고 있었는데, 이 풍경을 보고 나니 그냥 돌아 내려가기가 아쉬웠다. 나는 내친김에 아빠 코끼리 절벽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러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바라본 엄마 코끼리의 모습은 반대편에서 본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이곳까지 걸어온 사람은 거의 없어서, 그리고 이곳 해변에도 아무도 없어서 외딴곳에 나 혼자 서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풍경을 더 감상하고 싶었지만 배고픔과 버스 시간 때문에 내려갈 수밖에 없어서 아쉬웠다. 내려가는 길에 오른쪽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는 사람들을 보았다. 오로지 골프를 치러 해외 곳곳을 다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절벽이 훤히 보이는 이곳의 필드를 보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에트르타 해변을 한번 더 둘러본 후, 아기자기한 크레페 맛집에 가서 캐러멜에 절여진 사과와 아몬드와 찐득한 초콜릿이 어우러진 진한 단맛의 크레페를 먹었다. 원래는 야채 가득한 식사용 크레페를 먹으려 했으나, 막상 가니 디저트가 무척이나 당겼다.
다시 버스를 타고 르 아브르역으로. 하룻밤 머물렀다면 르 아브르도, 루앙(Rouen)도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아쉬움이 남을 때는 언제든 다시 와야지 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정말이지 언젠가는 차를 렌트해서 한 달간 프랑스 일주를 하는 것이 소망이다.
파리에 도착하니 어느새 저녁 7시였다. 저녁을 먹고 노트르담 드 파리가 있는 시테섬(Île de la Cité)을 배회하며 붉어지는 하늘과 어두워진 풍경을 보고 잠이 들었다.
# 사소한 메모 #
* 아름답고, 고요하며, 신비롭기까지 한 에트르타. 형편없는 그림 실력이지만 나도 한번 스케치해보았다. 결과물은 노코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