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56 - 프랑스 툴루즈(Toulouse)
2017.7.7
이번 프랑스 여행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상봉'에 가까운 것 같다. 너무나도 그리웠던 파리, 교환학생으로 지냈던 곳으로써 파리만큼 그리웠던 보르도, 그리고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있는 툴루즈. 나는 과거와 만났고, 추억과 만났고, 사람과 만났다.
나는 대학생 때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여학생 기숙사에서 지냈다. 가족이 모두 천주교 신자여서이기도 하지만, 학교에 기숙사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반드시 천주교 신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기숙사도 아니었고, 아무래도 '수녀원', '여대생'이라는 수식어가 안전하게 느껴져서인지 근처 다양한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함께 지냈다.
나는 기숙사를 처음 열던 해에 대학에 입학하여 기숙사생 1기가 되었다. 지금은 꽤 커졌지만 내가 입학하고 졸업할 때까지는 늘 수녀님 두 분에 학생 수는 고작 16명이었다. 그러니 가족 같은 것이 아니라 진정한 가족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친구들과는 지금도 가까이 지내고 있고, 수녀님들과 우리의 식사를 책임져주시던 이모님과도 여전히 연락하고 만나 뵙고 있다.
수녀님들께서는 한국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번갈아가면서 수녀회 본원이 있는 프랑스에 다녀오시곤 했는데, 수녀님 한 분께서 지금 툴루즈에 계신다. 정확히 말하자면 툴루즈 근교에 계시는데, 내가 찾아뵀을 때에는 툴루즈에 계셨다. 툴루즈에 있는 수녀원에도 여대생 기숙사가 있어서 덕분에 2박 3일간 숙박도 식사도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툴루즈 역에 도착하니 수녀님께서 차로 데리러 나와 계셨다. 배낭이 무거운 줄도 잊은 채 수녀님을 뵙자마자 꼭 껴안고 한참을 덩실거렸다.
나눌 이야기가 많았지만 회포는 나중에 풀기로 하고, 우선은 수녀원에 짐만 두고 나왔다. 수녀님께서 툴루즈에 계셨던 이유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는데, 브라질 수녀님들이 수녀회 행사로 인해 방문하셨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는 브라질 수녀님들의 일정에 함께 하며 속성 관광을 겸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성 도미니코 수도회가 처음 시작된 곳이었다. 모태신앙으로 천주교이지만 종교에 대한 깊은 지식도, 특별한 독실함도 없었던 내게 재미있고 교훈적인 2박 3일이었다.
도미니코 성인에 대해 알게 된 내용들도 재미있었지만, 이곳에 있던 도미니코 수도회 김인중 신부님의 작품들 또한 인상적이었다. 김인중 신부님은 추상화와 동양화를 접목한 듯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으로 유명하셔서 '빛의 화가'로 불리신다 한다. 프랑스 내에서 굉장히 인정받으신다 하니 괜히 뿌듯해졌다.
수녀님들의 저녁식사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굉장히 푸짐했다. 수프와 피자, 구운 채소, 그리고 디저트로는 달콤한 초록 자두와 천도복숭아까지. 방도 화장실이 딸린 개인 방으로 주셔서 굉장히 편하게 썼다. 수녀회 행사 때문에 어차피 더 오래 머물지도 못했을 테지만, 짧게 머물다 가는 것이 첫날부터 굉장히 아쉬워졌다.
식사 후에도 여전히 환했기에 왠지 아쉬워서 시내로 나와보기로 했다. 보르도에 살 때 내 옆집에 살던 일본인 친구와 함께 당일치기로 왔던 툴루즈를 이번에는 혼자서 산책해보았다. '그때 그 친구와 이곳에 함께 왔었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걸었으니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툴루즈는 '장밋빛 도시'라고 불리는데, 장밋빛 건물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색 때문에 어쩐지 모로코의 마라케시가 떠오르기도 했다.
걷다 보니 도시의 중심 광장에 이르렀다. 예전에 왔을 때에도 예쁘다고 감탄했던 시청 건물. 해가 지려고 이쪽을 비추니 더 예뻤다. 상점들이 모두 닫는 저녁 8시가 넘었는데도 거리에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오늘은 저녁에 마라톤을 하는 축제날이었다. 들뜬 분위기에 나도 기분 좋았다.
수녀원으로 돌아가기 전에 가론(Garonne) 강가에 가기로 했다. 스페인 북부에서 시작해 툴루즈를 거쳐 보르도까지 흘러가는 가론강은 내겐 센 강과 비슷하게 추억이 많은 곳이다.
지겹도록 말했겠지만 나는 야경보다 해 질 무렵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강가에서 이날의 마지막 해가 불타 사라지는 것을 놓칠 리 없었다.
이제 수녀원으로 돌아가려는 길, 퐁네프(Pont Neuf)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가까이서 보니 마라톤에 참가한 사람들이었다. 이때부터 불안감이 살짝 엄습해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행사가 결국 나를 헤매게 만든 것이다. 도보로 걷는 길도 막혀있는 곳이 많았다. 툴루즈 골목골목을 달리는 행사였던 모양이다. 행사 운영 직원에게 물어물어 다른 길로 가도 거기서 또 한 번 되돌아가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구글 지도가 아니었더라면 국제 미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열심히 이리저리 피해 돌고 돌아서 왔는데, 결국 최종적으로 또 한 번 막혀버리고 말았다. 건너야 하는 길인데, 오른쪽에서 마라톤 선수들 수백 명이 쉴 새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계속 달려오는 것이었다. 주위를 보니 나와 비슷한 상황인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서로를 흘깃거리다, 한 남자의 용감한 질주를 시작으로 마라톤 선수들의 움직임을 살피며 뛰어서 건너는 데에 성공했다.
평화로웠던 하루가 다소 급하게 마무리된 듯했지만, 침대에 누운 나는 금세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같은 지붕 아래 아는 사람이, 한때 내가 굉장히 의지했던 사람이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만큼 든든한 것도 없는 밤이었다.
# 사소한 메모 #
* 오래전의 기숙사 생활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날이었다. 혼자여도 혼자일 수가 없었던, 사생활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던 내 방이 그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