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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의 파리

Day 155 - 프랑스 파리(Paris)

by 바다의별

2017.07.06


전날 새벽 1시가 넘어 숙소에 돌아온 덕에 이날은 늦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금세 그치는 듯해서 우산은 챙겨 나오지 않았다. 이날은 파리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이라 일단 내가 좋아하는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에 가기로 하고, 그전에는 숙소에서 멀지 않은 마레지구로 향했다.

아무래도 비가 왔으니 날이 꽤 흐렸다. 중간중간 잠깐씩 비가 내려서 비를 피하기 위해 상점들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곳의 가게들은 아기자기한 것들도 많이 팔지만, 가게들이 늘어진 골목들 자체가 참 예쁘다. 비 오는 날에도.

걷다 보니 파리에서 아름다운 공원으로 꼽히는 보주 광장(Place des Vosges)에까지 왔다.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잠시 쉬면서 문득 흐린 날씨에 감사했다. 며칠 내내 맑은 날의 파리만 계속 보다, 마지막 날에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생각해보면 나는 겨울의 파리가 가장 익숙해서인지 이런 흐린 날의 파리가 더 반갑다.

이제 오르세로 향하는 길. 미술관에 가면 어차피 많이 걷게 될 터라 지하철을 탈까 하다가 언제 또 파리에 돌아오게 될지 모르니까 걸어가기로 했다. 이미 마레지구에서 꽤 걸어서 걱정이 되긴 했지만 당분간 마지막으로 파리를 걷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운이 났다.

전날 갑자기 에클레르가 먹고 싶어 져서, 마레 지구에 위치한 한 가게에서 에클레르를 하나 사 왔다. 에클레르는 원래 번개라는 뜻인데, 번개처럼 빠르게 먹게 될 만큼 맛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게 좋아하는 편의 디저트도 아닌데 이날따라 이상하게 먹고 싶었다. 뒤늦게 오래전 마레 지구에서 사촌언니와 함께 갔던 유대인 빵집이 생각나 아쉬웠다.

전날 로댕 미술관에서 만났던 사람이 건네준 티켓으로 오르세 미술관은 줄을 설 필요 없이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비가 온 탓인지 평소에는 그렇게 줄이 긴 오르세 앞에 스무 명 남짓 서 있을 뿐이었다.

오르세 미술관 내부에는 식당이 하나 있다. 대부분 박물관이나 미술관 내부에 있는 식당들이 그렇듯 이곳도 그다지 평이 좋지는 않다. 하지만 내부 인테리어가 화려해서 들어가 보고 싶어 졌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이니까. 비싼 가격에 비해 아주 훌륭하진 않았지만, 생각보다는 괜찮은 식사였다.

오르세 미술관이 본래 기차역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화려한 시계가 그 과거를 말해준다.

지금도 처음 오르세에 갔을 때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들어서자마자 아름다운 미술관 자체에 매료되었고, 고전적인 루브르와 난해한 퐁피두에 비해 편안하고 익숙한 작품들이 많아 더욱 지루한 줄도 모르고 구석구석 걸어 다녔다.

처음 오르세에 갔을 때 가장 처음으로 마주했던 작품들은 바로 퓌비 드 샤반느(Puvis de Chavannes)의 두 작품 '비둘기'와 '풍선'이었다. 동화 속 삽화 같아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던 것이 기억난다. 다시 보니 반가웠다.

모네가 에트르타 절벽을 그린 작품들도 실제 에트르타를 다녀온 뒤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가보지 않고 그림만 보았을 때는 그 장소를 동경했는데, 실제 다녀와서 다시 보니 내가 본 장면이 그림으로 재탄생한 것 같아서 반가웠다.

이날 가장 아쉬웠던 것은, 내가 오르세에서 가장 사랑하는 작품인 에드가 드가의 '별'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디론가 대여가 된 것인지, 오랜 기간의 전시 후 창고에 머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시실을 두 바퀴를 돌아도 찾지 못했다. 드가의 다른 작품들도 물론 좋아하지만, 내가 드가를 좋아하게 된 그리고 오르세를 그리워한 가장 큰 이유가 없었기에 아쉬움이 크게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 머지않은 미래에 오르세를 또 찾을 이유가, 핑계가 생겼다는 거니까. 이번에는 7~8년씩 걸리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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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날이 흐렸는데, 구경을 마치고 나오니 언제 흐렸냐는 듯 맑아졌다. 오전에는 마레지구를 걷고, 오후엔 오르세를 걸어서 굉장히 지쳐있었지만, 날씨가 맑아졌으니 마지막으로 한 군데 더 가보기로 했다. 뤽상부르 공원(Jardin du Luxembo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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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에서 뤽상부르로 가는 길에 생 제르망 데 프레(Saint-Germain-des-Prés) 지구를 지나갔다. 생 제르망 데 프레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생 제르망 데 프레 수도원도 있고, 사르트르, 보부아르 등 프랑스의 문학가들이 모이던 카페 레 두 마고(Les Deux Magots)도 있다. 겨울에 처음 파리에 왔을 때 사촌언니와 함께 이곳에 갔던 기억이 난다.

뤽상부르 공원은 내가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 가장 먼저 갔던 공원이다. 당시 한 달간 사촌언니 집에서 머물면서 어학원을 다녔었는데, 언니네 집과 어학원 사이에 있었다. 어학원 수업이 끝나고 딱히 할 일이 없는 날에는 이곳에서 잠시 산책을 하다 집에 가곤 했었다. 튈르리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큰 공원이다.

역시 여름날이라 예쁘게 꽃이 피어있었다. 가을에 엄마와 함께 찾았을 때도 꽃이 많이 피어있던 기억이 난다. 오래 전의 일들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듯, 내내 흐렸던 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랗던 이날 오후의 하늘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되겠지.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이지만 하루 종일 너무 많이 걸었던 탓에 뤽상부르 공원을 마지막으로 해 질 녘에 숙소로 들어갔다. 파리를 마무리하는 아래 사진들은 에트르타에 다녀온 날 찍은 것들이다. 파리에서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하늘,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파리의 야경 사진들을 마지막으로 남겨본다.

퀘벡시티에서 본 분홍빛 하늘이 계속 기억에 남아있었는데, 이곳에서 이토록 선명하고 화려한 분홍색 하늘을 보게 될 줄이야.

나는 퐁네프(Pont Neuf)에 서서 에펠탑과 퐁데자르(Pont des Arts)를 바라보며 주위가 어두워지는 모습을 보았다. 에펠탑은 파리 시내 대부분의 곳에서 볼 수 있는데, 굳이 가까이에서가 아니라도 나는 이렇게 은근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모습도 좋아한다. 그게 해 질 무렵이면 더 좋다.

물론, 배경이 어두워질수록 에펠탑의 샛노란 빛도 점점 선명해지는 것도 예뻤고, 정시마다 하얗게 반짝이며 빛나는 모습도 예뻤다. 한 번으로는 아쉬워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 또 한 번 보았다.

낮에도 밤에도, 맑을 때도 흐릴 때도 한결같이 예쁜 파리, 안녕.


# 사소한 메모 #

* 또 보자!
* "I don't mind getting wet... Actually, Paris is most beautiful in the rain. (비 맞아도 상관없어요. 사실, 파리는 빗속에서 가장 예쁘거든요.)" -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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