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86, 187 - 헝가리 부다페스트(Budapest)
2017.08.06, 07
계속 더워 죽을 것 같더니 갑자기 떠나는 날 빈에 폭우가 쏟아졌다. 운동화가 흠뻑 젖을 정도였다. 그래도 역에는 무사히 잘 도착했다며 기차에 올라타는데, 내가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주말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좌석지정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기차표 구입과 좌석지정은 별도인데, 일전에 암스테르담에서 베를린, 베를린에서 바르샤바에 갈 때는 추가 비용을 지불하면서 좌석지정을 했음에도 기차가 가득 차지 않아 그 의미가 없었다. 이번에는 주말인 데다 기차의 출발지도 빈이 아니었기에, 내가 탈 때 기차는 이미 만석이었다. 결국 문 앞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3시간을 버텨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낮에 도착한 부다페스트는 일기예보와 달리 해가 쨍쨍해서, 배낭을 메고 역에서 숙소까지 30분 정도 걸으니 등에서 난 땀이 바지까지 적셨다. 그래서 일기 예보가 잘못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이날 밤 신청해둔 야경 투어를 취소하지 않았다. 하지만 투어 시작 1시간 전,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폭우에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비는 20분 쏟아졌다 5분 잠잠한 식이었다. 이제 와서 취소할 수는 없었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투어 집합 장소인 이슈트반 대성당(Szent István-bazilika) 앞으로 갔다.
이슈트반 대성당에서 차에 올라타 겔레르트 언덕(Gellert Hill)으로 향했다. 한인 민박에서 운영하는 투어였는데, 특히 시내에서 떨어진 겔레르트 언덕의 경우 차가 없으면 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나처럼 혼자 다니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편리한 투어였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을 정도라고 한다. 야경이 유명한 곳이지만, 어두워지기 전에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꽤 오랫동안 비가 멈춰주었다.
헝가리는 나치에 의해 희생되었고, 그 후에는 나치를 공격한 소련이 점령하면서 또 한차례 희생된 나라이다. 성벽 곳곳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맞은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위 사진 속 종려나무 잎을 들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소련이 나치를 물리치고 승리를 자축하면서 세운 것이다. 이후 공산주의가 붕괴되면서 이를 없애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이 역시 역사의 일부분이므로 남기기로 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니 어느새 어두워지고 있었다. 바로 앞의 엘리자베스 다리(Elizabeth bridge)와 저 멀리 있는 관람차가 눈에 띄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내가 다음날 저 관람차를 혼자 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엘리자베스 다리 뒤편에는 또 하나의 현수교인 세체니 다리(Szechenyi bridge)가 있었고 그보다 더 먼 곳에는 화려하기로 유명한 국회의사당이 살짝 보였다. 1849년에 지어진 세체니 다리는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부다페스트는 도나우(다뉴브) 강을 기준으로 사진 속 좌측(우안)은 부다(Buda), 사진 속 우측(좌안)은 페스트(Pest)로 두 개의 도시였다. 우안에는 부다 성(왕궁), 겔레르트 언덕 등이 있으며 좌안에는 국회의사당과 이슈트반 대성당 등이 있다. 부다는 14세기경 헝가리의 수도가 되었고 이후 1873년에 페스트와 합병,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근처 소도시들까지 합병하여 지금의 부다페스트가 되었다. 세체니 다리는 부다와 페스트를 잇는 최초의 다리였다.
밤의 불빛이 선명해질 때쯤, 다시 폭풍우가 몰아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화려한 부다 성(왕궁) 위에 번개가 치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서 카메라를 제대로 들고 있기가 쉽지 않았지만, 나는 꼭 번개를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었다.
여러 번의 도전 끝에 동영상으로 번개를 담는 것에 성공한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부다페스트에서 3박 4일 머물면서 번개 치는 하늘을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날씨가 좋지 않아서 이날의 여행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폭우를 만나기 전에 서둘러 차에 다시 올라탔다.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아이리스>의 노래, 백지영이 부른 <잊지 말아요>를 들으며 어부의 요새(Fisherman's Bastion)에 도착했다.
마차시 성당(Mátyás templom) 옆에 위치한 어부의 요새는 중세 시대에 어부들이 요새를 지키려고 애썼던 데에서 그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데,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어부의 요새를 떠올리면 지금도 폭우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이곳에서는 지붕이 있는 곳에 숨는다고 해도 비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나는 우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산만으로는 소용이 없어서 가이드가 준 우비를 걸쳐 입었다.
어부의 요새에서는 기둥 사이로 국회의사당의 환상적인 야경을 볼 수 있다. 빗속에서 우리 모두의 사진을 찍어주느라 가이드가 고생하긴 했지만, 쏟아지는 빗줄기가 함께 담겨서 사진이 더 멋졌다.
가끔 셔터를 누를 때 때마침 번개가 치면 이렇게 희한하게 밝은 야경 사진이 나오기도 했다.
이날 밤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기억하고 싶어서 짧은 동영상으로도 남겨보았다.
어부의 요새를 떠나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했을 때는, 언제 이렇게 폭우가 내렸나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빗줄기가 눈앞을 가렸던 좀 전과는 너무나 다르게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독립기념일에는 이곳에서 불꽃놀이를 한다는데, 그러면 얼마나 더 멋질지 상상도 안 간다.
투어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영웅 광장(Heroes' Square)이었다. 헝가리 역대 왕들과 영웅들의 조각상이 빙 둘러져 있는 광장이었다.
폭우 때문에 툴툴거린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사실 폭우가 이날 밤을 더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한다. 맑은 날에는 사진을 찍기 훨씬 쉬웠겠지만, 빗줄기와 번개를 담을 수 있어 즐거웠다.
세체니 다리는 다음날 저녁에 혼자 건너보았다. 유럽 내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다리답게 화려한 불빛이 인상적이었다. 이 다리가 지어지기 전까지는 왕실의 고급문화를 지니고 있던 부다(Buda)와 대중적인 분위기의 페스트(Pest) 간 왕래는 대개 배를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페스트에서 일을 하고 있던 귀족 이슈트반 세체니(Istvan Szechenyi)가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듣고 급히 부다로 돌아가려 했으나 기상 악화로 인해 배가 뜨지 못해 며칠간 발이 묶이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이에 다리의 필요성을 여실히 느끼게 된 세체니는 자신의 재산을 내놓으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다리 건설을 추진했고, 설계자와 현장 감독까지 직접 초빙하였다. 자연스레 이 다리에는 그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 다리 위에서는 국민들로부터 사랑받은 왕비의 이름을 딴 엘리자베스 다리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저 멀리 겔레르트 언덕과 자유의 여신상까지 볼 수 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여전히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게 빛나고 있는 국회의사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옆의 마가렛 다리(Margaret Bridge) 역시 국회의사당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주듯 은은하게 빛났다.
유럽 3대 야경이라는 파리, 프라하, 부다페스트는 모두 예뻤지만 그중에서도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도시 전체가 야경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강렬하게 빛나는 주요 건축물들에서부터 은은한 강가 불빛 하나하나까지 이어지는 풍경은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내렸던 비까지도 나는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 사소한 메모 #
* 여행이 길어서 날씨에 관대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더위에는 여전히 관대하지 못하니 꼭 그런 건 아니려나. 빗속의 야경은 지치기보단 특별했다.
* ♬ Katy Perry - Fire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