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87, 188 - 헝가리 부다페스트(Budapest)
2018.08.07, 08
폭우 속에서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구경한 다음날, 낮의 부다페스트를 구경하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이날도 예보에 소나기가 한두 차례 온다고 하여 맑은 날씨를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그걸 감안한다고 해도 굉장히 우중충했다.
오전 11시의 풍경이라기에는 상당히 어두웠다. 빗속임에도 화려하게 빛나던 전날의 모습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거기다가 강가의 꽃인지 풀인지 모를 것들까지도 갈색을 띠고 있어서 분위기는 더욱 쳐졌다. 유람선을 탈까 했었지만 그럴 마음이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이미 전날 밤 이곳의 근사한 밤 풍경을 충분히 보아서 아쉬운 마음은 없었다.
날이 맑았다면 더 예뻐 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밤이 더 멋졌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사실 나는 시내 구경보다도 오후의 일정을 더 기대하고 있었다. 그동안 배낭에 짓눌렸던 나의 어깨와 허리, 다리의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세체니 온천을 예약해두었다. 오랜만에 스스로에게 크게 한 턱 쏜다는 생각으로 마사지까지 예약해두었다.
온천으로 유명한 부다페스트의 3대 온천은 세체니 온천, 겔레르트 온천, 루다스 온천이다. 아무래도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화려한 세체니 온천이지만, 물은 그리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물이 좋아 치료 목적으로 간다는 루다스 온천에 가장 가고 싶었지만, 루다스 온천은 전통적으로 남성 전용 온천이어서 여성은 화요일과 주말에만 이용이 가능했다. 이날은 월요일이었고 온천을 화요일로 미루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냥 세체니 온천에 가보기로 했다. 그 화려한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직접 가보니 물이 안 좋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온천탕에 들어가 있는데, 물이 깨끗할 리가. 게다가 중간중간 내리는 비까지. 나는 이상하게 노천온천에 갈 때마다 비가 온다. 아이슬란드에 갔을 때에도 블루 라군이며 자연 온천이며 모두 그랬고, 나중에 뉴질랜드에서도 그랬다. 비올 때의 노천온천의 장점은 머리는 시원하고 몸은 뜨겁게 해 최적의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체니 온천은 그대보다는 물이 덜 뜨거웠지만, 몸을 녹이기에는 적당했다.
마사지 역시 시원했다. 가격이 헝가리 물가 대비 그리 저렴한 편은 아니었지만, 여행 출발 후 처음으로 받는 마사지였기에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저녁 식사를 하러 시내로 돌아왔다. 헝가리 요리인 굴라시(goulash)를 먹었다. 매콤한 소고기 야채 스튜인데,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의 퓨전 식당에서 엄마와 함께 처음 먹어보고는 반해버렸던 메뉴이다. 사실 헝가리는 내 최초 여행 계획에는 없던 나라였는데, 그때 굴라시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는 곧장 일정에 추가했다. 이날 점심에 먹은 굴라시는 기대했던 맛이 아니어서 실망스러웠는데, 저녁에 먹은 굴라시는 정말 훌륭했다. 생각보다 국물이 많아 밥을 말아먹고 싶을 정도였다.
식사 후 세체니 다리를 걷기 전에, 광장에 들렀다. 축제를 하듯 이것저것 잡화도 팔고 간식도 팔고 있었다.
내 눈길을 끈 건 의외로 이것이었다. 나는 고소공포증도 있고 그냥 겁도 많아서 평소에는 관람차를 타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날은 무언가에 홀린 듯 티켓을 사버리고 말았다. 워낙 야경이 멋진 부다페스트니까,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도 좋겠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혼자 타서 더 무서웠지만,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고 있으니 괜찮았다. 전날 야경 투어의 집합장소였던 성 이슈트반 대성당이 밤을 맞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부다 왕궁도 꽤 선명하게 보였고, 사진에는 없지만 세체니 다리도 가까이 보였다. 주요 건물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어두운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가로등들이 보이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헝가리에서의 마지막 날에는 중앙시장에 갔다. 다음날에는 또 기나긴 이동을 하게 될 테니 시장에서 과일이나 사 와서 여유로운 오후를 보낼 생각이었다. 시장은 크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로 클 줄은 몰랐다. 토론토의 세인트 루이스 마켓이 떠올랐다.
복숭아에 푹 빠져있던 나는 온갖 종류의 복숭아를 구입한 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음악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조금씩 리듬을 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피곤한 것도 잊고 계속 서서 음악과 그 음악을 저마다 즐기는 사람들에게 집중했다. 흐린 날씨에 조금 무거워졌던 몸과 마음이 온천에 한번, 음악소리에 한번 풀렸다.
마지막 날 루다스 온천에 가볼까 싶기도 했지만 세체니 온천에 혼자 가보니 혼자서는 재미를 찾지 못해서 그냥 시내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적당히 따뜻한 오후를 즐겼다. 밤이 되면 부다는 잠들고 페스트는 깨어난다고 했던가. 낮보다 밤이 더 근사했던 부다페스트였다.
# 사소한 메모 #
* 첩보영화의 어두움과 로맨스 영화의 눈부심을 모두 간직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