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38~241 - 뉴질랜드 오클랜드(Auckland)
오클랜드 1일 차.
시드니 공항에서 호주 달러를 탈탈 털어 쓰고, 몇 시간 뒤 뉴질랜드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했다. 청정 자연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반지의 제왕>의 팬인 건 말할 것도 없고. 뉴질랜드가 최종 여행지가 된 건 부모님과 예전부터 계획했던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여행지를 선호하는 우리 가족에게 뉴질랜드는 부모님의 결혼 30주년을 기념하는 여행지로 딱이었다.
나는 부모님을 만나기 며칠 전에 미리 오클랜드에 도착해 친구를 만나 며칠간 놀기로 했다. 프랑스 보르도 교환학생 시절 만난 친구와의 8년 만의 재회였다. 중학생 때 가족이 다 같이 뉴질랜드로 이민 온 한국인 친구인데, 덕분에 오클랜드에서 정말 편히 잘 지냈다. 친구 부모님께서는 호주에 계셔서 친구와 친구네 강아지 이브와 셋이서 지냈다.
꽃 수출입 일을 하는 친구는 공항에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프랑스에서 학기가 끝나고 헤어지면서 언제 또 보나 했더니 이렇게 8년을 돌아 만났다. 그런데도 조금의 어색함 없이 너무나 즐거웠다. 마치 어제 만난 사이처럼. 나랑 성향이 비슷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고 싶은 것이 많고, 관심 분야에 열정적이다. 와인을 좋아해서 보르도에 갔고, 지금은 와인 소믈리에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하고 있고, 하프를 좋아해서 직장생활 중에 틈틈이 오케스트라 공연도 하는, 멋진 친구다. 덕분에 난생처음 하프를 만져봤다.
첫 식사는 친구가 나를 위해 집에 소고기, 소시지, 보쌈, 치킨 등 온갖 종류의 고기를 준비해두었다. 특히 나를 반기며 5년간 숙성시킨 특별한 와인을 땄다. 용의 해에 담가진 와인이어서 더 특별했다. 우린 둘 다 용띠니까.
이날 반가웠던 건 친구만이 아니었다. 사랑스러운 친구네 강아지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와서 이름이 이브였다. 극세사 이불이 부드러웠는지 밤마다 내 침대에 올라와서 같이 잠들었는데, 나지막이 코를 고는 것마저 어찌나 예쁘던지. 슬프게도 13살의 이브는 얼마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고작 며칠 같이 지냈을 뿐인데 정이 많이 들어서 소식을 듣고 나도 눈물을 흘렸다. 이제 아프지 않을 테니 편히 쉬기를.
오클랜드 2일 차.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보니 친구가 부엌에 아침식사를 차려놓고 나갔다. 덕분에 든든히 아침 식사를 한 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친구는 일찍 일을 마치고(전날도 공항에서 나를 만나러 일찍 마쳤는데) 나를 만나 함께 돌아다녔다.
날씨가 딱 적당해서 돌아다니기 좋은 하루였다. 햇살은 따뜻한데 바람은 살랑이는 그런 날씨. 오클랜드의 길거리를,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몇 군데 구경하다 마누카(Manuka) 꽃 모양 귀걸이를 하나 샀다. 이제 집에 돌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기념품 구경에도 적극적이었다.
어느 작은 광장의 풀밭에는 이렇게 빈백들이 놓여있었다. 우리도 푹 꺼지는 빈백을 하나씩 차지하고 액체처럼 늘어져서 햇살을 잠시 즐겼다.
저녁에는 미션 베이(Mission Bay)로 향했다. 미션 베이에서는 랑기토토(Rangitoto) 화산섬을 볼 수 있었다. 낮고 길게 늘어져 있는 산은 마치 일부러 누가 얹어놓은 듯, 그림 같고 멋졌다. 다시 폭발할 가능성이 있는 휴화산이라고 한다.
우리는 벨기에 맥주에 뉴질랜드 명물인 초록 홍합(그린 홍합, Green-Lipped Mussel)을 포함한 푸짐한 해산물 플래터를 먹고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해지는 저녁의 랑기토토를 바라보았다.
한적하고 조용한 해변에서 먼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며 우리는 끝도 없는 수다를 계속 이어갔다.
오클랜드 3일 차.
오늘도 역시 퇴근을 일찍 한 내 친구. 나를 위해 계속 시간을 내줘서 정말 고마우면서도, 뉴질랜드의 일 문화가 상당히 부러웠다. 친구는 일찍 퇴근하고 나를 픽업해 마운트 이든(Mt. Eden)으로 향했다. 우선은 치즈케이크가 유명한 카페에서 베일리스 치즈케이크와 캐러멜 팝콘이 얹어진 치즈케이크를 먹으며 커피를 한 잔 했다.
달달한 것들로 속을 채운 뒤, 마운트 이든 분화구에 올라갔다. 랑기토토와 달리 이곳은 몇 만년 전에 활동한 이후 지금은 사화산이다.
파릇파릇한 분화구는 과거에 화산이었던 사실을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다.
이곳에서는 오클랜드 시내가 멀리 보였다. 먼 하늘에는 구름이 많이 끼긴 했지만 오클랜드의 랜드마크인 스카이 타워와 그 주변 풍경은 선명히 보였다.
분화구 구경 후에는 폰손비(Ponsonby)에 갔다. 이날은 금요일이었고, 오클랜드 사람들이 불금을 보내는 곳에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폰손비는 뉴욕의 소호 같았다. 예쁜 가게들과 음식점들이 많은 곳이었다. 우리는 어느 디자이너 샵에서 멋진 원피스를 발견해 각각 다른 색을 골라 입어보았지만 너무 비싸서 차마 사지는 못했다.
저녁식사로는 로스트 치킨을 먹었는데, '코리안 바비큐 소스'를 함께 주문했더니 쌈장이 나왔다. 닭고기를 쌈장에 찍어먹는 건 새로웠는데 생각보다 맛있었다. 우리끼리 신나는 금요일 저녁을 보내고 오클랜드의 반짝이는 야경을 구경한 뒤, 친구 집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오클랜드 4일 차.
알차게 보냈지만 마지막 날은 언제나 아쉽다. 8년 만에 만난 친구와 함께 하는 마지막 날. 전날 밤 드라마를 보다 늦게 자서 늦게 일어났다. 생각해보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일찍 일어난 날은 단 하루도 없었던 것 같다.
공항 근처에 있는 빌라 마리아(Villa Maria) 와이너리에 갔다. 뉴질랜드 와이너리들 중에서도 꽤 유명한 곳이다. 도착하자마자 비가 오긴 했지만 다행히 식사를 하는 동안 그쳤다.
식사를 생각보다 빨리 마쳤더니, 와이너리 투어 시간까지는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해서 그냥 우리끼리 주변을 구경했다. 어차피 가장 중요한 건 테이스팅이니까.
프랑스에서도 와이너리 투어를 해보았지만 보통 2~3잔이었던 것 같은데, 이곳에서는 7~8잔은 마신 것 같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와인을 아주 좋아한다는데, 사놓고 숙성시켜야 하는 와인을 절대 기다리지 못한다고 한다. 구입 후 따는 순간까지 걸리는 평균 시간이 28분이라고.
와인 테이스팅까지 마치고 나니 하늘이 맑게 개어있었다. 이제 막 새잎이 나는 포도밭이 싱그러웠다.
우리 투어의 마지막 종착지는 타카푸나 (Takapuna) 해변이었다. 이곳 카페에서 엄청나게 단 후식을 먹고, 해변을 걸었다. 미션 베이에서 보았던 랑기토토가 여기서도 보였다. 나는 이곳이 썩 마음에 들어서 나중에 부모님과도 함께 와, 뉴질랜드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비가 오고 난 뒤라 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었다. 이곳은 미션베이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 산책하는 사람들, 수영하는 사람들. 아직 수영할 정도의 날씨는 아닌 것 같았는데.
친구와 아쉬운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던 중, 부모님의 비행기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는 알림이 왔다. 예정보다 30분이나 일찍 내려서 황급히 짐 싸들고 출발했다. 부모님께서는 친구가 부탁한 한국 식재료들을 들고 오셔서 입국 심사 시 걸릴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무 문제없이 빨리 나오셨다. 친구는 우리 가족을 호텔까지 태워주었다. 미안하고 고맙고, 또 헤어지게 되어 아쉬웠다. 얼마 전 생각보다 빨리 한국에서 재회하게 되었지만!
이미 한 달 전 싱가포르에서 만났지만, 그래도 해외에서 가족을 만나는 건 언제나 굉장히 반가운 일인가 보다. 황금연휴 기간이라 직항 편이 없어 대만을 거쳐 무려 27시간이나 날아오신 부모님은 피곤하셨을 텐데도 바로 잠들기 아쉬우셨나 보다. 부모님의 뉴질랜드 여행 시작을 기념하며, 나의 마지막 여행을 축하하며, 따뜻한 감자튀김과 환상적인 나쵸를 안주 삼아 맥주 한 잔씩 들고 건배했다.
# 사소한 메모 #
*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할 말이 끊이지를 않고 마치 매일 만난 사이처럼 어색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런 친구가 세계 곳곳에 있다는 것. 좋은 인연들에 늘 감사했다.
* 부모님 모시고 가는 여행이 불편하다는 친구들이 많은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편하고 즐겁다. 이것 또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