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47 - 뉴질랜드 호비튼(Hobbiton) 촬영지
내가 처음 뉴질랜드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순전히 영화 <반지의 제왕(Lord of the Rings)> 시리즈 때문이었다. 평소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고, 좋아하는 영화들은 수십 번이고 돌려보는 나는 <반지의 제왕>을 볼 때마다 그 촬영지를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뉴질랜드 전역에 걸쳐 그 촬영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넓은 벌판에 직접 마을을 지은 호빗 마을, 호비튼(Hobbiton)에 방문하기로 했다. 나의 뉴질랜드 여행 버킷리스트 1순위였다.
가는 내내 나는 과하게 들떠 있었다. 투어 버스에 올라타기도 전부터 너무나 요란하게 신나 있어서 아빠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실 정도였다.
로토루아에서 출발한 지 1시간 반 정도 지났을 때, 드디어 호비튼에 도착했다. 오는 내내 비가 와서 걱정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이곳에 도착하니 비가 그쳤다. 로토루아에서부터 버스 기사는 호비튼에 가면 비가 그칠 거라고, 그곳은 이상하게 비가 잘 안 온다고 했는데 정말이었다.
호비튼은 인간의 절반 크기인 호빗들이 사는 전원 동네이다. 이곳은 사실 <반지의 제왕> 시리즈 이후에 제작된 <호빗(The Hobbit)> 시리즈 촬영 때 꾸며진 것이라고 한다. <반지의 제왕> 때는 플라스틱으로 임시 세트장을 만들어 촬영이 끝난 뒤 거의 다 철수했는데, 이후 이곳이 관광지로 활성화되자 그다음 <호빗> 시리즈를 촬영할 때는 아예 나무를 이용하여 보다 실제적인 반영구 세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둥근 문이 인상적인 호빗 집들은 집집마다 그 크기가 다 다르다. 보통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집은 호빗 역할의 배우들이 드나들 때 사용하고, 그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집은 간달프라든지 호빗보다 큰 외부 인물이 방문할 때 사용한 것이다.
호빗 집은 44개가 있는데, 집마다 예쁜 정원과 함께 각 호빗의 직업을 짐작할 수 있게 꾸며져 있었다. 예를 들어 집 앞에 여러 종류의 치즈가 올려진 집은 아마도 치즈를 만드는 호빗의 집일 것이다.
호비튼은 정말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 기대 이상이었다. 영화 촬영용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라 기대에 못 미칠까 걱정했는데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판타지 영화 속에 그대로 걸어 들어온 것 같았고, 그것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속이었기에 더 신났다. 이것만으로도 '성공한 덕후'가 된 기분이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참 많았는데, 가이드가 무슨 말만 하면 다들 어떤 장면인지, 당시 누가 어떤 대사를 했는지 바로 반응이 나와서 재미있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여러 번 봤는데.
가이드가 해준 여러 뒷얘기들도 재미있었다. 피터 잭슨 감독이 굉장히 세심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매일 촬영장에서 빨래를 널고 걷는 사람을 별도로 고용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빨래의 모습이 자연스럽고 그 과정에서 땅에도 자연스러운 발자국이 남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뉴질랜드의 수많은 농장들 중에서 피터 잭슨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연못 옆에 큰 나무가 우뚝 서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원작 소설에 충실할 수 있는 장소를 선정하기 위함이었는데, 저곳이 바로 <반지의 제왕 - 반지원정대>에서 빌보가 생일 파티를 했던 '파티 트리(Party Tree)'이다. 높이는 거의 80미터라고 한다.
모두들 기억하는 빌보의 집은 가장 인기가 좋았다. 빌보가 생일 파티를 앞두고 대문에 파티 관련이 아니고는 들어오지 말라고 한 경고문이 정겨웠다.
사진에는 잘 안 나왔지만 빌보의 집 위에 서 있는 나무도 아무 나무나 심은 것이 아니라 영화를 위해 만든 가짜 나무라고 한다. 이파리 하나하나를 짙은 녹색으로 색칠하여 하나하나 붙였다고 한다. 엄청난 정성이다.
그 옆에는 유일하게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는 집이 하나 있었다. 내부에는 물론 아무것도 없었다. 내부 촬영은 거의 웰링턴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밖에서 내부가 잠시 보일 수도 있는 빌보의 집을 제외하고는 모두 텅 비었다고 한다.
빌보의 생일 파티 때 모였던 수많은 호빗들은 대부분 배우와 스텝의 가족들이 연기했다고 한다. 촬영을 기념해 가족들을 뉴질랜드로 초청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는 잭슨 감독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전문 배우가 아니다 보니 모두들 어색해해서 신나야 할 파티 촬영이 어려웠다고 한다. 결국 잭슨 감독은 맥주 공장을 하는 친구에게 연락해 알코올 농도 1% 남짓의 맥주 제조를 부탁했고, 그걸 한 잔씩 마신 가족들은 긴장을 풀고 유쾌하게 촬영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 특수 제작했던 것처럼, 호비튼의 술집 그린 드래곤(Green Dragon)에 가면 이곳에서만 판매하는 맥주를 맛볼 수 있다. 이곳은 실제 펍처럼 술과 안주를 판매하는 가게이다. 맥주 한 잔씩은 투어 비용에 포함되어 있어 무료로 제공된다.
그린 드래곤은 꽤나 북적거렸다. 아늑한 인테리어와 그곳에 가득한 사람들이 실제 펍 분위기를 완성시켰다.
밖에는 빌보의 화려한 생일 파티를 연상시키는 파티 장식들도 조금씩 걸려있었다.
투어가 끝이 나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평소에도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엄청난 팬이지만, 중학생 때 처음 개봉되었던 영화 촬영장을 보고 있으려니 온갖 추억에 잠겨서 더욱 설렜던 시간이었다. 집들이 모두 화사하게 꾸며져 있어 날이 흐린 것도 모르고 구경했다.
그래서 기념품도 신중하게 골라서 사 왔다. 엽서 몇 장은 물론이고, 지도를 꼭 사 오고 싶었기 때문에 호비튼 지도와 중간계(Middle Earth) 지도 중 고민하다 중간계 지도를 선택했다. 돌돌 말려 있지만 견고한 통이 있지는 않아서, 한국에 오기까지 접히거나 구겨지지 않도록 버스, 택시, 비행기, 공항에서 지극정성으로 모셔왔다. 우리 가족은 '지도 원정대'라고 농담을 했다.
호비튼은 영화 <반지의 제왕>이나 <호빗>의 팬이라면 당연히 들를 만한 가치가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아기자기한 동화마을을 보고 싶다면 충분히 구경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내 기나긴 여행의 마지막 날을 앞둔 마지막 오후를 보내기에 환상적인 일정이었다.
하지만 이날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이니까 무언가 이벤트가 필요했던 걸까. 호비튼에서 오클랜드로 돌아가는 길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호비튼에서는 엄청난 설렘과 행복을, 호비튼 투어가 끝나고는 당황과 분노를 느꼈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극과 극의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 사소한 메모 #
* 인공적으로 만든 곳들 중 유적이 아닌 곳에서 이토록 행복감을 느낀 건 처음인 것 같다. 언젠가 뉴질랜드를 또 한 번 방문한다면, 아예 테마를 <반지의 제왕>으로 잡고 웰링턴 스튜디오에서부터 숨은 촬영지들까지 모두 가볼 생각이다.
* ♬ 반지원정대(The Fellowship of the Ring) OST - Concerning Hobbi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