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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미룰 수가 없었다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by 바다의별

코로나바이러스의 기승으로 든지 미뤄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4월에 결혼하는 친구는 결혼식을 가족들만 초대해 치르는 대신 신혼여행은 무기한 연기했고, 5월에 해외여행을 계획했던 친구 역시 당연히 여행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도 다들 재택근무로 업무가 연달 뒤로 밀렸고, 친구들과의 소모임도 줄줄이 취소되었다.

하지만 나의 할머니께서는 열흘 전에 돌아가셨고, 조문객 없는 장례식을 치렀다. 딱 한 가지, 죽음만큼은 계획할 수도 미룰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그러나, '역시 죽음이란 참 슬프고 막막한 일이야'라는 생각으로 우울해지지는 않았다. 늘 천사 같고 소녀 같던 할머니를 보내드린 일은 물론 생각할 때마다 가슴 가장자리에 사포를 대는 것처럼 따끔거리는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할머니와의 헤어짐으로 인한 슬픔이지 죽음 그 자체에서 기인한 슬픔은 아니었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을 것을 알기 때문에 늘 조금은 슬프죠.


한동안 푹 빠져서 보았던 드라마 '굿플레이스'에 나왔던 대사이다. 처음에는 사후세계에 대한 가벼운 코미디인 줄 알았는데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며 나를 때때로 잠 못 들게 했던, 그리고 최종회에서는 기어코 나를 펑펑 울리고야 말았던 아주 특별한 드라마. 나는 '굿플레이스'로부터 위로받고 있었다.


'굿플레이스'에서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파도가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우리의 삶은 잠시 파도가 치는, 딱 그 찰나의 순간일 뿐이다. 어떤 모양의 파도였고 얼마나 높았고 얼마나 먼 해변까지 파고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그리고 그 이후에 어디에서 또 어떤 모습이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는 바다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 삶은 고작 파도가 치는 그 짧은 순간일 뿐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딱 한 가지다. 언젠가 우리는 파도의 정점을 찍을 것이고, 그 정점을 지나 그 어느 때보다도 깊숙이 가라앉게 되리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늘 조금은 슬픈' 이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닷물에 휩쓸리기만 할 필요는 없는 법다.


하지만 그게 바로 인생을 의미 있게 해주는 거예요.


어쩌면 찰나의 순간이기에 그 안에서 뭐든지 해볼 수 있는 것이 모든 생명의 원동력이 아닐까. 우리는 죽음 외에는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고 무엇이든 계획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결국 유한한 생을 완성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순간들이다. 소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의 헤이즐이 말한 것처럼, 0과 1 사이에는 0.1, 0.01, 0.001이 존재하니까.


우리는 매일, 유한함 속의 무한함을 누리고 있다. 무한함이 끝나기 전까지 열심히, 그리고 많이 선택하겠다고 나는 다짐했다. 어디까지나 끝이 있는 것을 알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죽음을 감사하게 생각할 정도의 사람이 되지는 못하지만, 그 영원의 시간이 있어야 할 이유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할머니께서 이제 평안히 누리고 계실 영원의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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