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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점이 아니라 선이다

선택만이 존재할 뿐, 실패는 없다

by 바다의별

내 인생은 자잘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 시작은 14년 전 고등학교 3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멋진 글을 쓰는 기자가 되고 싶었던 나는, 원하던 대학에는 원서조차 넣어보지 못한 채 수능 점수에 맞추어 대학에 가는 신세가 되었다. 전공도 미정인 상태로 인문과학계열로 입학했다가 1학년 학점도 목표 점수 달성에 실패해 원치 않게 불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이후 신문방송학을 복수전공하기는 했지만 결국 언론사도 광고기획사도 아닌, 그토록 피하고 싶던 평범한 사무실의 직장인이 되었다. 그렇게 출퇴근을 하다가 나는 5년도 채우지 못하고 희망퇴직의 기회를 덥석 물었다. 퇴직 후 8개월 간 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여행을 한 기간만큼이나 오랜 구직생활을 겪어야 했다. 1순위, 2순위로 생각했던 회사들은 줄줄이 탈락한 뒤 결국 규모가 작은 공공기관 한 곳에 입사했다. 하지만 적당히 일하고 적당한 보수를 받으며 소소한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혈세가 다방면으로 낭비되고 있는 현실만을 목격한 채 1년 반 만에 퇴사해버렸다.


그런데 의외로, 내 인생은 성공의 연속이기도 했다. 계획에도 없던 불문학을 전공하는 바람에 프랑스에서 1년간 교환학생으로 생활하였고, 덕분에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3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건설회사에 입사하면서 쉽게 가보지 못하는 나라들로 출장도 다녀왔고, 해외영업직이었기에 외국어 공부의 끈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결과적으로 그 회사에 입사했기 때문에 희망퇴직이라는 흔치 않은 기회도 얻게 된 것이다. 나는 그동안의 경험들과 운 좋게 얻은 넉넉한 퇴직금으로 어릴 적부터 간절히 바랐던 세계여행이라는 꿈을 이루었다. 다녀와서 구직활동이 길어지다 보니 조급한 마음에 공공기관이라는 이름만 보고 덜컥 입사했지만, 덕분에 회사를 선택할 때는 얼마나 많은 요소를 어떻게 고민하고 조사해봐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 둔 데이터 덕에 지금은 나름대로 만족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


하나의 인생이 이토록 다르게 적힌다. 그러므로 나는 실패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라고 믿는다. 인생이란, 내가 한 선택들로 이루어진 순간들의 집합일 뿐이다. 하나의 일을 놓고 본다면 실행이 곧 도전이고 완성이 곧 성공이며, 중단과 좌절은 곧 포기이자 실패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긴 인생에서 일회성의 이벤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티끌에 불과하다. 수능은 단지 하나의 시험일 뿐이고, 취업도 그저 하나의 경험일 뿐이다. 기대한 바를 이루지 못한 모든 일에 실패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만큼 불공평한 일도 없다. 포기 역시 실패의 한 종류가 아닌 다른 일을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지 못했을 때, 친구가 내게 해 준 말이 있다.

"지금 꿈꾸는 일들, 언젠가는 다 하게 될 거야. 지금은 단지 조금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돌아가면서 더 많은 걸 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믿어."

그 당시의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 생각나는 대로 던진 말이었는지, 정작 이 말을 해준 본인은 기억도 못하고 있다. 하지만 친구의 가벼운 말이 나에게는 인생의 모든 막막한 순간마다 힘이 되고 있다.


초라한 성적으로 은퇴한 스포츠 선수가 후에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다면, 그의 스포츠 인생은 성공한 것일까, 실패한 것일까? 선수로서 실패한 것처럼 보여도 그 실패가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데에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당장은 실패한 것처럼 느껴져도 먼 훗날 돌아보면 사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꿈꾸는 성공의 길 위에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몇 번 멈춰 세워지고, 몇 번 넘어지고, 직선 대신 구불구불한 곡선 길 위를 걷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지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계주 결승전을 기억하는가? 한 선수가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따라잡아 극적인 반전을 이뤄낸 우리나라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는 장면은 그 누구도 쉽게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에 못지않게 동메달을 수상한 네덜란드 선수들의 표정 역시 잊히지 않는다. 이날 최종 결승에 오른 네 팀 중 두 팀이 실격을 당하는 바람에, 결승 이하 순위 결정전에서 1위를 차지했던 네덜란드가 어부지리로 최종 3위에 올랐다. 이미 결승전 진출에 실패했으니 메달은 당연히 단념했을 텐데, 전혀 기대하지 않은 성과를 얻게 된 것이었다. 감격과 놀라움이 섞인 선수들의 표정에서, 인생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임을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100만큼의 노력을 한다고 해서 늘 100만큼의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하나의 선택은 수많은 연속된 결과들을 만들어낸다. 내 선택들이 의도치 않게 타인의 인생에 영향을 주듯 타인의 선택 역시 때로는 내 인생에 영향을 준다. 이 핑퐁처럼 오가는 나비효과 속에서 아주 자그마한 사건들에 대해 성공과 실패를 논하는 일은 대단히 성급하고 무의미하다.


성공이란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 그에 대한 답변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상태, 누군가에게는 정점, 누군가에게는 추상적인 바람,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구체적인 목표의 실현일 수도 있다. 각자의 인생이 다르고 목적과 목표가 다른데, 왜 우리는 새로운 도전과 지치지 않는 끈기만을 성공을 표현하는 긍정적인 가치로 여길까? 삶을 대하는 방법과 중요한 순간에 내리는 선택의 가짓수는 무한하다. 누군가는 용기 있는 포기를 통해 다른 것을 이루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미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어 새로운 도전을 열망하지 않기도 한다.



우리는 습관처럼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어야 한다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살아야 된다고, 절대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스스로와 상대방을 다그친다. 하지만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좌절이 두려워 도전을 피할 필요도 없지만, 충분한 도전을 해보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몰아칠 필요도 없다. 인생이 끝내 절망과 체념으로 점철될 지라도 살아왔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근사하다고 믿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지금 그 자체로 충분하다. 만약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나는 그 도전을 응원할 것이고, 중간에 포기하겠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 선택을 응원할 것이다.

당신의 선택을, 우리의 인생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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