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0년 전인데, 정말 달라졌어요. 그때만 해도 종이 지도에 이곳저곳 표시해서 들고 다니며 현지인들에게 길을 물어봐야 했고, 인터넷에 있는 정보도 주요 도시들에 대한 것 말고는 잘 없었거든요."
몇 년 전, 파리 민박집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스스로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벌써 '라떼는 말이야'를 하고 있다니. 당시 8인실 도미토리에는 나 혼자 30대였고, 독일, 스페인 등 다른 나라 교환학생으로 와 있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나도 모르게 10년 전 프랑스 교환학생으로 있던 기억이 나서 추억에 잠겼던 것 같다.
요즘은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다른 것 필요 없이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지도 어플만 있으면 초행길도 쉽게 다닐 수 있고, 셀카봉만 있으면 모르는 사람에게 사진을 부탁할 일도 없다. 가족, 친구들과도 수시로 연락할 수 있고 실시간으로 사진이나 영상도 공유할 수 있다.
많게는 11년, 적게는 6년 된 오래전 여행 추억들
여행마저 빠르고 쉬워진 지금, 때로는 아날로그 감성이 그립다. 손짓 발짓으로 현지인들에게 길을 묻고, 일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여행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던 그때가 그립다. 한 번쯤은 디지털의 도움 없이, 직선보다는 곡선으로 돌아가고, 어플을 켜는 대신 사람들에게 말을 걸며, 그 순간에 집중하는 여행을 해보고 싶다.
당연히 불편할 것이다. 처음에는 답답해서 짜증이 날지도 모른다. 주변에 물어볼 사람이 마땅치 않으면 발을 동동 굴릴 것이고,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몇 바퀴를 돌고 돌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기억이 반드시 안 좋은 기억으로 남지는 않았다. 10년 전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가 연락처 교환은 물론 좋은 식당을 소개받았고, 그리스에서는 아테네에서 지도를 잘못 보는 바람에 같은 유적을 다른 각도로 몇 번씩 보게 되어 오히려 재미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원히 경험하게 될 줄 알았던 서툰 즐거움을 다시 느낀다고 생각하면 나름대로 설레는 일이다.
지난해 제주도 여행에서 찍은 일회용 카메라 사진: 디지털카메라와 함께 가져가서, 일회용 카메라는 생각날 때만 꺼내 촬영했다
이왕 아날로그 여행을 한다면, 카메라도 필름 카메라로 가져가 보고 싶다. 눈으로 보기도 전에 일단 순간을 놓칠세라 셔터부터 누르는 걸, 자제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종종 사진 때문에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들이 발생한다. 예를 들면 푸른색으로 칠해진 것 외에는 특별할 게 없는 마을에 가기 위해 왕복 7시간을 허비한다거나, 내가 본 그대로의 모습을 담기보다는 작품 사진처럼 만들어 내는 데에 집중한다거나. 모로코 여행은 중간에 부재자 투표까지 하느라 일정이 바빴는데도 사진 한 장을 위해 꾸역꾸역 쉐프샤우엔까지 다녀왔다. 예쁜 마을이었지만, 4시간 구경을 위해 7시간을 허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붉은색의 미국 앤텔로프 캐년에서는 흐린 날씨 속에서도 '작품 사진 색감'을 위해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카메라 설정을 한참 맞추었다. 결국 나는 내 눈에 보인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사진을 만들어냈다. 그게 나중에 추억하는 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찍을 수 있는 사진이 제한되면 정말로 남기고 싶은 순간들이 어떤 건지 더 분명해질 것 같다. 여행을 증명할 보통의 사진들이 아닌, 나만이 남길 수 있는 진짜 순간들 말이다.
1) 모로코 쉐프샤우엔 / 2) 흐린 날의 앤텔로프 캐년 / 3) 만들어진 앤텔로프 캐년
여행은 여행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하는데, 다른 곳에 목적을 더 싣는 순간 정작 여행에는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그곳의 분위기에 스며들지 못하고, 카페에 앉아 밀린 메시지들에 답을 하느라 차를 즐기지 못한다. 감정의 변화가 생겨도 메모 어플에 키워드만 입력해두면 나중에 언제든지 문장으로 수정하면 되므로, 순간의 감정은 키워드에 욱여넣어진 채 나머지는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다.
작품사진을 찍을 것도, 여행안내서를 쓸 것도 아니라면, 도구들을 조금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여행하는 건 난데, 그 과정과 순간들을 집에 있는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실시간으로 나눌 필요가 있을까? 길도 좀 헤매 보고, 엉뚱한 곳에 잘못 찾아가 보고, 모르는 사람과 잠시 웃음을 나누는 것만큼 더 여행다운 일도 없지 않을까?
진정으로 내 감정과 내 느낌에만 충실할 수 있는 여행을 하고 싶다. 종이지도에 색색의 펜들로 표시하고, 길이 헷갈릴 때는 공원에 앉아있는 할머니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순간순간의 마음을 펜으로 수첩에 기록하는 여행을 다시 한번 해보고 싶다.
정말 그 순간에 푹 빠져, 오히려 아무것도 놓치는 것 없이 더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는 여행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