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맴도는 구절 #3
기숙사로 향하기 위해서는 지하철역 입구에서 버스를 10분가량 타고 가야 한다. 5년이 지났음에도 출구 번호가 익숙한 것이 기분 좋았다. 버스 정류장이 있는 사거리는 여전히 복잡했고, 버스는 여전히 배차간격이 길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정류장에 잠시 후 도착 버스를 알리는 알림판이 세워졌다는 것이고 그 버스를 기다리는 나의 자세에는 통금 시간에 대한 초조함이나 침대에 대한 간절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버스를 타고 사거리를 벗어나자 낮은 건물들이 이어져있는 익숙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천루가 가득한 송도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늘 고즈넉한 성곽 근처의 이 곳을 그리워했다. 나는 무심한 듯 정돈된 이곳의 낡은 분위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반가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훑어보니 여전한 곳들도 많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낡은 건물벽을 가리는 깨끗한 간판들도 많이 생겨난 것이다. 세련되게 변한 모습을 발견하면 할수록 내 기억 속 이곳은 점점 더 낡아져 갔고 색이 바래져갔다. 그렇게 내 기억과 현실의 괴리감은 점점 더 깊어졌다.
기숙사가 있는 종점에 내리자 처음의 설렘은 어느새 섭섭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류장 표시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던 종점에는 이제 멀끔한 정류장도 세워져 있었고 그토록 바랐던 인도도 그 앞에 깔끔하게 다져져 있었다. 종점에 있는 학교의 이름이 바뀌면서 정류장의 이름도 바뀌었다. 가파른 기숙사 앞길을 올라가기 직전 마주칠 수밖에 없던 은행나무도 사라져 있었다.
내가 변한 만큼 이곳도 변했을 뿐인데, 나는 왜 그리 서운했을까. 변한 것 하나 없는 기숙사 마당에 서 있으니 비로소 생각났다. 내게 이 동네가 그토록 중요하고 소중했던 이유를. 이 동네가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은 단순히 이 동네가 예쁘고 좋아서가 아니라, 이곳을 공유했던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는 동네가 변하는 것이 서운했던 것이 아니라,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음이 서운했던 것이다. 5년 간 한 지붕 아래 살았던 그 친구들과 여전히 끈끈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데, 나는 그 추억들을 친구들이 아닌 이 동네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배경이었던 이 동네는 그저 그 거대한 추억 속 일부일 뿐인데.
사람도 장소도 언제까지나 내 추억 속에 머물러있기를 바랄 수는 없다. 나에게는 과거이며 추억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현재이며 미래일 테니까. 더 이상 섭섭해하지 않기로 했다. 새로운 건물들이 지어지고 낯선 가게들이 들어선다 해도, 베이지 빛 건물 안에서 서로 모든 것을 공유했던 내 추억은 변치 않을 테니까.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한 그곳은 5년 전 그 모습 그대로 오랫동안 숨 쉴 것이다.
가장 달콤한 쾌락과 가장 생생한 기쁨을 맛보았던 시기라고 해서 가장 추억에 남거나 가장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 그런 순간들은 너무나 드물고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것이어서 어떤 상태를 이루지 못한다. 내 마음속에 그리움을 자아내는 행복은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항구적인 어떤 상태이다.
- 장 그르니에, '섬(Les Iles)' 중